겨울새□ 정해선

2023-03-03 09:22:31

오전 8시 반, 식사를 끝낸 그는 오늘도 서류가방을 들고 집문을 나섰다.

여느때처럼 차는 아빠트소구역을 빠져나와 회사방향으로 달렸다. 안해가 아침상을 치우다 말고 창문으로 내려다볼지도 모르니까. 신호등 세개를 지나자 그는 더는 직진하지 않고 좌회전한 후 2킬로 쯤 더 달려 레저광장에 이르렀다. 광장과 그 남쪽으로 바다가를 따라 뻗은 산책로에는 거의 로인들 뿐이였다. 그들 사이에 끼여 하루해가 저물 때까지 시간을 보내다가 집으로 돌아가군 한지도 벌써 닷새가 넘는다. 다행히 여기 겨울은 그리 춥지 않다. 오늘도 해볕이 잘 드는 벤치를 옮겨가며 앉아있으면 될 것이였다.

그녀는 남편의 차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부랴부랴 창고에 내려가 채소가 든 구럭들을 량손에 가득 들고 올라왔다. 숨을 고를 새 없이 랭장고에서 고기와 생선들을 꺼내서 씻고 손질했다. 채소까지 다듬고 씻어서 썰어놓고 나면 아홉시 반, 열시 반까지는 40인분의 밥과 반찬을 만들어내야 한다. 일회용 밥곽에 담아서 비닐랩으로 잘 두른 후 보온박스에 넣고 나니 약속시간까지는 30분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달라붙었으나 훔칠 겨를도 없이 바로 출발해야 했다.

얼마나 넋 놓고 앉아있었을가? 그는 서류가방에 손을 넣어 여기저기 더듬었다. 엊저녁에 랭장고에서 우유 한캔을 꺼내서 슬그머니 가방 안에 넣어두었다. 그 우유 한캔을 허기진 배속에 부어넣고 나서 혼자 중얼거렸다.

“안해는 도시락도 맛있게 싸는데…”

그러나 도시락을 싸달라고 할 수 없었다. 안해는 그가 온 오전 회사에서 바삐 돌아치다가 지금 쯤 회사식당에서 점심을 먹는 줄로 알 테니까.

사실 회사는 얼마 전에 문을 닫았다. 6년간 모든 심혈을 몰부은 복장회사가 느닷없이 들이닥친 코로나 때문에 1년 반가량 휘청거리다가 결국 쓰러지고 만 것이다. 눈앞이 캄캄했다. 창업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외자기업에서 잔업을 밥 먹듯이 하며 옹근 10년을 버텼다. 물론 그새 직원에서 부장까지 꾸준히 밟아가며 같이 입사한 동창생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었다. 시기가 성숙되자 자신의 회사를 버젓이 차리고 성공의 물결을 탔다. 그 때 그는 말라서 뼈밖에 없는 안해의 어깨를 그러안고 이제 우리의 고생은 끝났다고 했었다. 좋은 직장에 취직할 수 있는 기회까지 버리고 겨울새처럼 고향을 떠나 자신을 따라와준 안해다. 반찬가게에 반찬을 해다 나르는 일을 하면서 야시장에서 파는 구운 오징어 하나도 사먹기 아까워하며 돈을 모으는 걸 볼 때마다 너무 미안했었다. 그런 안해에게 어찌 회사가 망했다는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고물차에 발동을 걸었다.

“드르릉—”

엔진소리가 장난이 아니다. 단돈 800원을 들고 여기 온 뒤로 처음 두 사람에게 생긴 식구였다. 날마다 남편을 회사까지 태워다주고 다시 반찬가게를 오갔던 고물차에는 이 땅에 살아남기 위해 억척같이 견뎌왔던 지난날이 숨겨져있다. 그 후 남편이 회사를 차리면서 처음 내 집이란 걸 마련했고 아들애도 태여났으며 그녀도 반찬 만드는 일을 그만두었다. 그녀는 남편이 세상을 다 가진듯 행복해하던 때가 바로 그 때였다고 생각되였다. 그런데 오늘 반찬을 다시 만들고 고물차를 다시 몰지 않으면 안되였다. 며칠 전 남편이 나간 뒤 서재를 정리하다가 서류 하나를 발견하였다. 모 기업에 보내는 남편의 리력서였다. 종이장을 든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언제까지 속일 셈이였지?’

그러고 보니 요즘 남편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 어려있었다. 서재에 들어박혀있다가 그대로 쏘파에서 자는 경우가 많았고 세면대를 청소하다 보면 빠진 머리카락도 점점 더 많았다. 저금은 친정아버지 수술비 때문에 많이 깨져있고 집 대출금도 아직 몇년 남아있다. 아들애 학비에 생활비까지 매달 지출도 만만치 않다. 회사를 새로 차린다는 건 꿈도 꿀 수 없는 일임을 그이도 잘 알 터이다. 근데 요즘 낮시간은 대체 어디서 보내다 오는 걸가? 점심은 먹었을가? 마음이 너무 아팠다.

노트북을 켰다. 메일함에는 수신통지가 없고 핸드폰도 아주 조용하다. 리력서를 넣은 회사들에서는 아무 소식도 없다. 이 나이에 회사, 그것도 관리직에 취직하기는 정말 하늘의 별따기가 아닌가. 이제 남은 길은 딱 하나, 전에 다니던 외자기업이다. 그 때 같은 회사에 다니던 그 동창생이 지금은 부총경리로 있다고 한다. 몇달 전에 술자리에서 “요즘 상황에 먹고 살기 힘들지? 도움 필요하면 련락해. 내가 과장자리 하나는 줄게.”라고 건방을 떨 때만 해도 꽉 밟아주고 싶었는데…

방금 전에 아들애 얼굴이라도 멀리서 볼가 하여 유치원 쪽으로 갔다가 고물차에서 내리는 안해를 보았다. 도시락을 유치원 책임자인듯한 남자에게 건네면서 연신 굽신거리는 안해의 모습이 초라하고 약해보이다 못해 눈물이 났다. 남들이 다하는 네일아트 한번 안하면서도 시부모님 생활비는 한번도 미룬 적이 없는 안해이다. 지금 뭔가 낌새를 챈 안해는 전화를 걸어와 당장 따지고 들 대신 벌써 자신의 두발로 뛰고 있다.

래일 도시락 만드는 데 쓸 식재료들을 사서 고물차에 싣고 집으로 향했다. 남편이 돌아오기 전에 얼른 창고에 숨겨놔야 했다. 한동안은 남편의 비밀을 지켜 줄 생각이다. 다시 마음을 단단히 먹기까지 남편도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차창으로 겨울바다가 안겨온다. 뭔가 많은 걸 숨기고 있는듯 깊고 무거워보인다. 문득 어디선가 새들이 까맣게 날아와 바다 우를 어지러이 헤맨다. 또 겨울이다.

“빵빵—”

경적소리에 앞을 보니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였다.

“래일은 그이에게도 맛있는 도시락을 싸드려야지.”

  동창생의 핸드폰 번호를 입력하고 통화버튼을 누르려다가 그만두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새들이 우짖는 소리에 머리를 들어보니 새들이 떼를 지어 차겁고 을씨년스러운 바다 우를 날고 있었다. 굶주림과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먼거리를 날아온 겨울새들이다. 이들이 한동안 머물다 돌아갈 때면 따뜻한 해살에 푸른 물결 출렁이는 아름다운 바다를 보며 다시 웃을 수 있을가? 이제 더는 앉아만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힘주어 통화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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