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동의 밤□ 조려화

2023-05-05 09:40:06

날이 금방 어둑어둑해진 것 같은데 복도는 벌써 소등한다. 사람들은 이미 습관이 된 듯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고 아직 이곳 생활에 적응이 되지 않은 몇몇이 복도에서 서성이다가 아무도 없으니 머쓱하여 괜히 여기저기 두리번거린다.

대부분 사람들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여 스마트폰 삼매경에 빠져있다. 아날로그 시대를 살아온 나이 지긋한 분들은 텔레비죤에 정신이 팔려있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침대에 누워 멍 때리는 사람들도 간혹 보인다. 밖은 찌는 듯한 무더위로 아우성인데 여름의 한가운데서 이곳은 조금은 우울하고 따분한 날들이 되풀이되긴 하지만 지독한 더위와는 별로 관계없이 대체로 조용하게 지내고 있다.

세 녀인이 전등도 켜지 않은 채 침대에 누워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나쁜 일 한번 한 적이 없고 남한테 베풀기만 하면서 살아왔는데 어쩜 저한테 이런 벌을 줄가요? 하늘도 참 무심해요.

-주변에서 다들 저보고 답답할 정도로 착한 사람이라고 그래요. 그런 내게 왜 혹독한 시련을 주는 건지 모르겠요.

-자신한테 이런 일이 생길 줄 누군들 상상이나 했겠어요. 우리가 머리를 빡빡 밀고 지금 이곳에 누워있을 거라고는 꿈엔들 생각했겠나요?

-저는 젊었을 땐 죽을 둥 살 둥 모르고 앞만 보고 살았는데 이 나이가 되고 보니 조금은 후회되네요. 왜 스스로에게 모질게도 다그치며 살아왔을가 싶어서요. 마지막에 갖고 갈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는데 말이예요.

-저도 한국에 나가서 식당일을 했는데 휴일 수당을 많이 준다고 쉬는 날에도 일 나갔어요. 놀러 다니지도 못하고 바보처럼 일만 하면서 뭘 위해 그리도 악착같이 살았는지 모르겠네요. 앞으로 내게 주어진 날이 얼마일지는 몰라도 이제부터는 오로지 나 자신을 위해 살거예요. 다 부질없어요.

-후~

누군가 가슴속을 다 훑어내듯이 긴 탄식을 내뱉었고 무거운 침묵이 방안을 채웠다. 창밖에는 별빛이 쏟아지는데 방안은 공기마저 숨막힐 듯 답답하였다. 천정을 바라보고 누운 그녀들의 눈빛이 하나같이 공허하다. 창문 쪽 침대에 누운 녀인이 약간 울컥했는지 코물을 훌쩍거렸다.

-아참, 우리 남편이 위챗으로 사진을 보내왔는데 앞마당에 심은 도마도가 빨갛게 익었더라구요.

-언니네는 채소도 심어요?

-그럼요. 비료 한톨도 치지 않고 길러요. 완전 무공해 유기농이죠. 고추는 얼마나 아삭하고 도마도는 또 얼마나 달다구요. 시중에 파는 것은 따라오지도 못할 정도로 맛있어요.

-듣기만 했는데도 입안에서 군침이 돌아요.

-좀 지나면 옥수수철이거든요. 우리 남편한테 옥수수도 삶아오고 도마도도 따오라고 할게요.

-좋아요. 너무 좋죠.

길고 무거운 침묵을 깨고 대화가 다시 활기를 띠였다.

-뒤마당에 오얏나무, 복숭아나무도 있고 건강에 좋다는 아로니아랑 블루베리도 옮겼어요.

-언제든지 싱싱한 과일과 채소를 드실 수 있겠네요.

-당연하죠. 채소는 거의 자급자족해요. 농사일이 좀 고되긴 하지만 자기절로 가꿔먹는 재미가 쏠쏠해요.

-나도 시골에 내려가 농사나 지으며 살가 봐요. 꽃도 심고 채소도 가꾸고 강아지도 기르면서 말이예요.

-남들 하는 걸 보고 덥석 따라했다가 큰코 다쳐요. 농사일이 만만치 않거든요.

-그러게 뭐든지 해봐야 안다니까요.

언제 우울했나 싶게 수다가 끝이 없이 이어진다. 남편 얘기, 자식 자랑, 음식, 패션, 미용, 건강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다들 밖에 나갈 때 가발을 써요?

-아이쿠, 말도 말아요. 몇번 써봤는데 더워서 못 견디겠더라구요.

-솔직히 나는 삭발한 내 모습이 아무렇지도 않은데 밖에 나가면 다들 이상한 눈길로 쳐다보니 죄 지은 사람처럼 눈치만 보게 되더라구요.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장소에 나갈 때면 모자를 쓰면 돼요. 그게 더 편해요.

-가발은 덥기도 하고 티가 많이 나죠?

-티가 덜 나게 하려면 화장이랑 옷에 힘주면 돼요. 그러면 가발에는 신경 안 쓸 걸요?

-나는 그것보다 목욕을 못하니 온몸이 끈적거려서 괴로워 죽을 지경이예요. 이랑 서캐가 생기지나 않았는지 모르겠어요.

-모르긴 해도 여길 나갈 때 쯤이면 때가 너무 많이 껴서 갑옷처럼 될걸요?

-하하하!

간만에 유쾌한 웃음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숨막힐 듯한 무더위 속의 한줄기 시원한 바람 같은 웃음소리에 옆방에서 나오던 녀인이 괜히 걸음을 살짝 늦추며 귀를 기울인다. 얼굴은 앳되여보이는데 그녀 역시 얼마 전에 삭발을 한 모양인지 이제야 막 자라기 시작한 머리카락들이 하나같이 흰색이다.

-39호 할머니 래일 나가신대요. 끝내는 ‘졸업’하네요. 두달하고도 닷새나 더 계셨다고 하니 참 길고 지루한 싸움이죠.

-드디여 나가게 되였으니 얼마나 좋으시겠어요. 오늘 저녁에 잠이 안 올 걸요?

-저도 가슴이 두근거리는데 할머니는 오죽하실가요?

-그나저나 우린 언제 이 ‘감옥’을 탈출하게 될가요? 갑갑해서 미칠 것 같아요.

-마음 느긋하게 가져요. 조급해하면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킬 수 있어요. 우리 그래도 최악의 상황까지 온 건 아니니까 약해지지 말아요.

-맞아요. 세상이 어디 완벽하나요? 이곳에서의 생활도 우리 삶의 일부일 뿐이예요. 나도 처음엔 너무 두렵고 황당해서 종일 울기만 했었는데 그래도 지금 여기까지 왔어요. 우리 조금씩 나아질 거라고 믿으면서 함께 이겨나가요.

-‘흔들리며 살아가는 게 삶이다’라는 말이 있잖아요.

-언니는 철학자 같아요. 어쩜 멋진 말들이 술술 쏟아져나오죠?

-나도 책에서 본 거예요.

-하하하!

그녀들은 삭발한 머리도, 몸에 두툼히 낀 때도, 갇혀있는 갑갑함보다도 현재에 집중하고 지금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고즈넉한 저녁, 서로의 보이지 않는 슬픔과 아픔을 함께 공유하고 살아온 인생을 뒤돌아보는 이 시간이 그녀들로 하여금 앞으로 살아갈 인생의 길에서 조금이라도 덜 헤매게 할 것이다.

-언니는 방사선치료 이제 몇번 남았아요?

-다섯번 남았어요. 자기는?

-저는 아직 멀었어요.

-아프고 힘들어도 끝은 있을 테니까 조금만 참고 견뎌서 하루빨리 이곳을 벗어나요.

-그래요!

-그럽시다!

  그녀들의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다가올 래일에 대한 희망과 기대가 깃들어있다. 어느덧 반짝이던 별들도 깜박깜박 졸고 방사선 병동의 밤은 소리없이 깊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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