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암나무꽃 (외 5수)□ 리기춘

2024-03-22 07:14:08

당신은 개암나무꽃을 보았습니까


보여도 눈에 남지않는 꽃

진달래처럼 일찍 피여나지만

진달래처럼 화려하지 못한

꽃이 아닌듯 꽃으로 피여

노르므레한 수줍음을 입고

봄향기를 살랑살랑 흔듭니다

물 오른 가지에 아기이파리

얼굴을 내밀면 착한 미소에

연초록 곱게 발라주고

산바람 따라 조용히 갑니다

조용히 떠나간 자리에

푸름은 두툼히 쌓여가고

개암은 통통 익어가거만

그런 것을 모르고 만족하며

존재의 감각마저 남기지 않고

너무 순하게 사라지는

세상에 없는 듯한 꽃


당신은 개암나무꽃을 보았습니까

개암나무꽃을 보았다면 당신은

그 꽃을 사랑하려 합니까…



갈증


늦잠에서 깨여난 눈빛이

화분에 시드는 꽃을 본다

시드는 꽃이 눈에 들어오자

내 몸에서 갈증이 꿈틀한다


보이는 꽃을 눈 밖에 두고

시드는 줄 몰랐다는 것과

내 몸이 힘겨운 갈증을

하염없이 알렸겠는데

여직 깜깜했다는 것이

너무나 애달픈 일이다


사막에 두고 온 갈증이

음수에 등한한 사이로

우리들에 끼여들었구나

자책이 마음을 찌른다


나는 꽃에 미안하고

나에 미안해 재빨리

목마른 꽃에 물 한조롱 주고

나는 광천수 한컵 마이였다


꽃은 꽃답게 생기를 찾고

나는 나답게 웃음을 찾고

마주 보며 함께 행복했다



뿌리는 뿌리를 만나면


땅 속 세상에서

모든 나무뿌리는

저들 뿌리를 만나면

서로 손 잡고 엉키여

다정한 친구같이

화목한 식구같이

운명을 함께 한다


달갑게 주어진 운명 속에

피줄기와 피줄기를 이어

하나의 뜻을 푸르게 묶어

세상에 싱싱하게 추켜든다


가뭄에 여윈 가난도

서로 용케 버티며

해빛 아래 씩씩한 자식들의

푸르른 소망이 시들지 않게

제 몸의 정수를 아낌없이 바친다


남들이 저어하는

땅 속 세상에서

동고동락하며

단단히 뭉친 뿌리들

뿌리 명함장으로

충성은 밖으로

무성하게 푸르고

정조는 땅속에서

조용히 반짝인다



도라지꽃


꽃으로 부르기에는

그닥 익숙하지 않아

사람들의 입에

고옵게 오르지 않아도

진실이 숨쉬는 가슴에

아름다움이 남는다


푸른 숲속에 선히 피여

향기는 산내음에 주고

미소는 산이슬에 주고

아련히 감추는 연두빛 사랑

애틋히 숨은 진실 누가 알랴

꺾어가는 것을 부디 삼가하고

싱싱하게 알뜰한 정성으로

인삼을 닮은 아이를 키우려

아름다운 청춘을 숲에 묻고

순결한 정조를 땅에 바친다


뜨근뜨근한 푸른 세월 속에

소원 성취되면 살며시 가는

요란하지 않게 소담한 꽃

장미 같은 화려함이 없이

시골의 울 엄마 닮은 꽃

여직 오선보에 오르지 못한

이 꽃을 ‘도라지’ 타령에

불러 들이면 좋지 않을가…



선인장


속에 품지않고 드러낸 가시

서슬 푸르게 날카로운 빛이

화려한 멋을 사막에 묻어두었다

어디에 옮겨앉아도 변함없는 것이라

거치장스러운 것은 애당초 걸치지 않고

푸른 피 속에 엉킨 무뚝뚝한 진실로

제 삶의 가치를 푼푼히 추켜세우고

짜릿한 존엄에 하얀 꽃을 피운다

세월의 풍운에 몸부림치지 않는

실팍하게 곧은 자세 싱싱하다

오늘, 너의 앞 가까이에서

순하게 따끔해지는 아픔을

령혼에 넣어 선히 감각하며

빨갛게 얼룩지는 부끄럼을 씻고

나는 달관의 빛으로 순수해진다



가을갈대와 가을바람


가을갈대는

자기의 푸름을 훔쳐간

가을바람을 미워하지 않는다

가을바람이

서늘한 냄새로 다가와도

가벼운 몸매를 흔들며 반겨준다


가을바람은

가을갈대의 아량에

무척 감동된 듯

쌀쌀한 성미를 해빛에 덥혀

가을갈대의 곧은 몸매를

서걱서걱 곱게 만져주며

하얀 머리발을 금실에 감아

눈부시게 나붓겨준다


가을갈대와 가을바람이

참 사이 좋게 어울리니

푸른 하늘이 감탄하여

시원한 계절의 좋은 자리에

  아름다운 수채화 한폭 심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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