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현 만보진의 김재선에 의해 시작된 학춤은 지난 2008년에 국가급 무형문화유산 명부에 오르면서 오늘날 우리의 소중한 문화자산이 됐다 ”
옛날에 학은 장수와 지혜를 상징하는 신성한 동물로 여겨졌다. 그래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는 의식을 거행할 때 무당들은 학의 우아한 움직임을 본따서 춤을 추었다고 한다.
어디 한번 먼 옛날의 이야기를 파노라마로 만들어보자.
고즈넉한 분위기가 흐르는 깊은 산 속, 푸른 솔잎 사이로 해살이 스며들며 금방 꾸며놓은 신단에 신비감을 얹어준다. 그리고 신단 주변에는 숙연한 표정을 지은 마을사람들이 신에게 제사를 드리려고 준비를 한다…
2017년 10월 14일, 북경시민족극원에서 열린 소수민족지구 예술원단 전시공연에서 선보여진 조선족학춤.
드디여 몸에 형형색색의 천을 두르고 화려한 가면을 쓴 무당이 나타나 신성한 장단 가락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한다. 두 팔을 활짝 펴서 너울거리는 모습이라든가 무릎을 살짝 굽히고 발끝을 세워 발맘발맘 걷는 모습이라든가 가끔가다 목을 길게 빼들고 머리를 좌우로 천천히 움직이는 모습 모두가 어쩌면 학처럼 우아하고 도고하다…
무당의 춤사위는 주변 자연과 어우러져 신비로운 분위기를 더욱 짙게 만들고 마을사람들은 그 분위기에 말려들어 저도 모르게 자기의 소망을 신한테 빈다. 올 농사를 풍요롭게 해주옵소서, 가족의 건강을 지켜주옵소서, 우리 마을을 태평하게 해주옵소서…
이 같은 력사적, 문화적 배경과 학의 상징성을 고려해서인지 학춤은 무당의 의식무용에서 유래되였다는 설이 해당 화제에서 가장 설득력이 있는 주장으로 꼽힌다.
조선족학춤 주인공으로 활약하고 있는 리영화(가운데 아래쪽).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또 학춤이 불교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불교에서 학은 부처의 지혜를 상징하고 또 학춤이 사찰에서 승려가 추던 춤에서 비롯되였다는 설이 있기 때문이다.
학춤의 기원이 아직까지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을 제쳐놓고 어찌됐든 궁정 연회나 의례에서 선보였던 학춤은 매우 엄격한 격식과 정교한 동작으로 구성되여 왕조의 위엄을 드높였다면 민간 농경 의례나 마을 축제 등 다양한 행사에서 선보인 학춤은 서민층을 상대로 하기에 그 격식이나 동작에 이렇다 하는 요구가 따로 없고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을 뿐이다.
우리 지역에서 지금 보존, 계승되고 있는 조선족학춤은 안도현문화관 관장을 지냈던 강덕수(1954년생)가 발굴, 정리했다. 강덕수는 조선족학춤의 제2대 전승인이다.
“대표적 기능 보유자로 제1대 전승인은 민간예인 김재선입니다. 당시 그는 학춤을 출 때 흰옷을 입고 초신을 신고 흰 부채를 학의 날개로 삼아 춤을 추었습니다.”
강덕수가 들려주는 김재선의 이야기이다.
김재선은 1890년 3월 27일에 조선 강원도 금강의 한 민간예인 가정에서 태여났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서 여러가지 무용기예를 익혔고 1936년 3월에 고향을 등지고 지금의 안도현 만보진 일대로 이주해 농사를 지으면서 보낸다. 당시 낮이면 들에 나가 밭일을 하고 밤이면 등잔불 깜박이는 초막집에서 마을의 청년남녀들을 모아놓고 우리 민족의 그 옛날부터 전해오던 춤을 추고 가르치군 했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1952년에 향에서 전 향 문예경연대회가 있었는데 김재선은 무대에 올라 학춤을 추기로 마음먹는다. 그리고 학춤을 멋지게 선보이기 위해 어려운 사정에도 집안에 한채밖에 없는 이불을 뜯어 학을 만들었다고 한다. 며느리가 시집을 올 때 갖고 온 이불이였다.
당시 김재선은 철사를 구부려 크고 작은 타원형을 만든 다음 그것들로 틀을 만들고 다시 가는 철사로 둘레를 궁형으로 결어 ‘학’의 몸체를 만들었다. 그리고 둥근 나무막대기에 철사를 스프링처럼 감은 뒤 몸체에 붙였는데 그것이 ‘학’의 목이였다. ‘학’의 머리부위는 이불솜으로 형태를 만든 후 엷은 천으로 감쌌고 주둥이는 마분지로 만들어 천을 붙이고 색칠했다. 그런 다음 ‘학’을 이불 천으로 감쌌고 거기에 흰천으로 ‘W’와 ‘M’자 모양의 ‘털’을 만들어 차례로 붙이고 꼬리털은 검은천으로 모양을 본따서 붙였다. 물론 ‘학’의 몸뚱이 부위의 검은색 털도 검은천을 오려 붙였다. 날개는 흰천을 두겹으로 감싸고 변두리를 실로 박아 팔을 넣을 수 있게 하였고 날개 옆에 구멍을 내여 ‘학’의 몸통을 썼을 때 그곳을 통해 바깥을 볼 수 있게 했다. 그런가 하면 ‘학’의 배 부위에 흰천을 드리워 몸통을 썼을 때 그것이 무릎까지 덮이게 했고 ‘학’의 다리와 발은 검붉은 토색바지를 입고 붉은 버선을 신은 후 붉은색 나무신을 신는 것으로 대체했다.
이렇게 만보향 심심산골에서 김재선에 의해 시작된 학춤은 지난 2008년에 국가급 무형문화유산 명부에 오르며 오늘날 우리의 소중한 문화자산이 됐다. 그리고 1959년에 전 주 민간예인경연대회가 열렸는데 그때 김재선은 또 학춤으로 무대에 올랐고 당시 자치주 주장인 주덕해 동지의 접견도 받았다.
가무극 《장백산아리랑》에서의 조선족학춤.
김재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나서 강덕수는 차분하게 부연했다.
“우리 민속춤엔 가슴속의 희로애락이 나와야 돼요. 어렵던 시기, 좋았던 시기, 고통스웠던 시기의 그 모든 것들이 몸짓을 통해 가슴을 밀고 나와야 하는 거죠. 삶의 투영이라고 할가…”
그 말은 강씨 자신이 지난 수십년간 산과 강을 넘나들며 현지의 독특한 민속풍속들을 발굴하고 수집하며 또 그런 민속활동에 직접 참여하면서 느낀 바였다.
“80년대초부터 민간예술발굴 작업을 시작했는데 안도지역에는 참으로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민속놀이가 많았습니다.”
당시 연변에서 민간민요수집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지만 민간무용수집은 막 시작하는 단계였다. 종래로 해본 적이 없었던 일이라 막막했지만 그는 단연히 수첩과 연필을 들고 시골마을들을 답사하기 시작했다. 시골마을을 찾아가서는 특히 마을의 좌상 어른들을 만나는 것을 빼놓지 않았으며 수집한 자료들이 탐탁하지 않으면 두번이고 세번이고 다시 찾아갔는데 한 마을을 10번도 넘게 다녀온 적 있었다. 그렇게 민간무용과 민간놀이 수집에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그를 두고 사람들은 ‘강도깨비’란 별명을 달아주기도 했다.
1982년 3월에 강덕수가 만보향 금하촌을 찾았을 때 김재선은 이미 세상을 뜨고 며느리가 집에 있었다. 김재선은 며느리에게 학춤은 물론 거북춤, 사자춤, 깍깍이춤 등 많은 민간무용을 전수했는데 지금 안도현에서 발굴한 이런 민간무용 모두가 김재선에서 며느리에게로 이어지면서 발굴, 정리된 문화유산이다.
“김재선의 며느리가 자리를 툭 털고 일어나 시집 와서 배웠던 학춤을 추는데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습니다. 한참 동안 넋을 잃고 말았습니다.”
강덕수는 그때 봤던 그 춤사위의 첫인상이 너무나 강렬했다고 한다.
“학춤을 만보에서 이어가려고 했지만 당시 만보는 이래저래 여건이 탐탁치 않았습니다. 그때 신툰에서 문예공연이 자주 열렸는데 학춤도 그때 신툰의 무대로 옮겨가면서 지금까지 이어졌답니다.”
학춤은 이주해온 곳의 자연, 사회, 력사, 문화 등 환경에 맞게 변화되고 발전되여 100여년이 지나는 사이에 우리만의 특색과 체계를 가진 민속무용으로 꾸준히 변화, 전승되였다.
“학춤은 조선족 민속무용종목 가운데서 유일하게 조류형상을 소재로 한 특수한 춤 형식입니다.”
강덕수가 하는 말이다.
학춤에 대한 문헌기록을 보면 《고려사》에 학춤은 77명이 참가한 대형 가무중의 한 부분으로 ‘오방처용무’가 끝나면 ‘학련화대’를 추었다는 내용이 있다. 학은 련꽃을 터뜨리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악학궤범》에는 ‘박을 치면 청학과 백학이 나는 듯이 발을 디디고 지당판 앞에 나아가…’라는 춤보법을 묘사한 구절이 있는데 이는 학춤도 독립적인 궁중무용임을 설명해준다.
“하지만 민속무용은 전해 내려오는 과정에 민속성과 지역성의 영향을 받아 변화, 발전하기에 우리 조선족 학춤은 우리만의 특색을 갖고 있답니다.”
우리의 민속무용에 대한 강덕수의 자부심이였다.
《악학궤범》 권5의 무보를 보면 련못을 상징하는 네모난 널판자를 놓고 그 주위에 련꽃, 칠보등롱, 련통을 놓는다. 그 련꽃 모양의 두 련통에는 동녀(童女)를 숨어있게 하고 청학과 백학이 나와 련통을 중심으로 춤을 추다가 련통을 쪼으면 숨어있던 두 동녀가 나오고 두 학은 이를 보고 놀라 달아나는 내용으로 되여있다.
하지만 강덕수가 발굴해낸 학춤은 조류인 학을 의인화하면서 학의 청초함과 우아한 몸짓 등을 소박한 민속의 률동에 녹여낸다. 그리고 동녀가 학을 타고 피리를 불며 환상의 세계로 가는 것으로 특징지어진다. 음악으로는 꽹과리, 징, 장구, 북 등 타악기가 중심이 되고 굿거리 장단으로 반주한다.
학춤이 처음 우리 지역에 들어온 그때에는 학의 기본 동작만을 모방하다 보니 춤이 꽤 단조로왔고 독무나 쌍무가 위주였다. 그러다가 우리 지역에서 전승되는 과정에 굿거리 장단을 곁들여 연기하고 군무로 발전했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익숙하게 알려진 학의 모양을 본딴 탈도 제작되고 복장도 점차 화려하게 모습이 바꾸어지면서 점차 우리만의 것으로 구색을 갖춰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조선족 학춤은 안도지역에서 보존, 전승되여온 지역특색이 다분한 문화재임이 틀림이 없다.
안도현의 학춤은 보존, 계승 작업이 착실하게 잘 진행이 되고 있는데 현재 성급 전승인 강려화, 주급 전승인 리영화가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강려화는 저의 딸입니다. 춤을 곧잘 추더니 이렇게 민속무용의 전승인으로 자랐습니다.”
강덕수는 그런 딸이 대견스럽단다.
강려화는 2004년에 안도현문화관의 무용수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조선족 학춤과 조선족 아박춤의 자료정리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우리만의 춤사위들을 하나하나 정성껏 기록하고 보존하며 후대에 전하려고 노력해왔습니다. 어쩌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이 길을 걷는 게 제가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인지도 모릅니다.”
마치 보물을 찾듯 잊혀져가는 춤을 찾아 곳곳을 누비며 그 가치를 알리는 데 애썼던 아버지의 열정은 고스란히 딸에게로 이어졌다.
안도현문화관에서 창작한 조선족학춤의 한 장면.
강려화는 자연스럽게 민간무용을 관심하게 되였고 아버지의 땀과 노력이 담긴 춤사위를 펼치면서 그것의 의미를 더욱 깊이 리해했으며 뒤이어 무용수로서의 능력과 기량을 인정받아 대표적인 기능 보유자에로 지정되기까지 한다.
아버지와 딸은 조선족 학춤을 매개로 특별한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아버지는 딸에게 있어서 스승이자 든든한 후원자이고 딸은 아버지에게 있어서 그의 꿈을 이어가는 제자이자 동반자인 셈이다.
조선족 학춤 주급 전승인인 리영화도 강덕수가 아끼는 무용수이다. 리영화는 2013년에 처음으로 조선족 학춤을 배우기 시작했고 이내 각종 공연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현재 리영화는 안도현문화관에서 조선족 학춤 무용수 및 주요 전승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리영화는 2014년에 제1회 중국조선족 무용대회에서 조선족 학춤 주인공으로 활약했고 2017년에는 대형 가무극 《장백산아리랑》에서 조선족 학춤 주인공으로, 2019년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70돐 기념 전 주 군중성 문예전시공연에서는 학춤 주연 무용수로 무대에 올랐다.
“조선족 학춤은 단순한 춤동작을 넘어 우리 민족의 력사, 문화를 담고 있는 살아있는 유산입니다.”
강덕수는 지금도 숨겨진 춤사위를 발굴하는 데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안도현문화관당지부 부서기 리광운은 “문화관은 꾸준히 각 향, 진과 학교, 사회구역에 조선족 학춤 전습소를 마련하고 전승인이 직접 양성반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조선족 학춤을 소재로 하는 무용작품도 창작하고 있습니다.”고 전했다.
지난 6월에 길림시에서 열린 무형문화유산 공연무대와 올해 우리 주 ‘문화와 자연유산의 날’을 맞아 무대에 올랐던 조선족 학춤 모두 리영화가 직접 창작한 작품이다.
신연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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