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요람’ 약수동, 파란만장한 세월 거쳐 오늘날 웃음꽃 피여나는 마을로

2025-06-16 09:27:59

"자그마한 산골마을에서 타오르기 시작한 혁명의 불씨는 파라만장한 세월을 거쳐 오늘날 행복한 생활로 꽃피고 있다. "


중공동만 제1차 대표대회 유적, 중공화룡현위원회 유적 등 10기의 비석이 비림을 이루었다. 

동북의 첫 인민정권인 약수동쏘베트정부, 인민정권을 보위하는 홍색무장인 평강구유격대, 첫 중심현당위인 중공연화(연길·화룡)중심현위원회, 첫 농촌지역 당원대표대회인 중공동만당원대표대회, 첫 농민대표대회인 연길·화룡 량현 농민대표대회… 이 많은 첫시작들은 15가구가 살고 있었던 약수동 상촌에서 탄생되였다. 상촌, 중산, 하촌 3개 마을의 약 200가구로 이뤄진 약수동, 상촌은 그중 가장 작고 편벽한 마을이였다. 항일전쟁 승리 80돐을 맞아 이 자그마한 산골마을에서 타오르기 시작한 혁명의 불씨는 오늘날 행복한 생활로 꽃피고 있다.

1985년 화룡현인민정부에서 세운 ‘약수동항일기념지’ 비석.

◆동북 최초의 홍색기발

“토지혁명을 일으키자! 쏘베트정권을 수립하자!”

1930년 봄, 일제의 철권통치에 맞선 약수동 농민들의 함성이 산골짜기를 울렸다. 5월 26일, 평강 일대에서 모인 천여명의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동북 최초의 인민정권인 약수동쏘베트정부가 탄생했다. 이날을 시작으로 80여명 청년으로 이루어진 약수동농민적위대가 결성되였고 5월 30일 밤에 적위대를 필두로 수백명의 대중을 이끌고 투도구 일본령사분관을 습격했다. 이는 약수동쏘베트정부 수립 후 첫 혁명행동이였다.

일본침략자들과 지방반동군벌의 이중진압에 의해 약수동쏘베트정부는 며칠 지속되지 못하고 와해되였으나 그 명맥은 이어졌다. 7월 10일에 첫회 당원대표회의가 소집됨에 따라 평강구당위가 설립되였고 8월 13일에는 동만 제1차 당원대표대회를 소집해 중공연화중심현위원회를 설립했다…

1932년 11월부터 한달도 채 되지 않은 기간에 일본군은 약수동을 세차례에 걸쳐 ‘대토벌’을 감행했다. 이 과정에서 김순희 렬사를 비롯한 8명의 혁명가가 체포되여 희생되였고 상촌 전체가 불타버리는 참혹한 상황이 벌어졌다.

동북지역 혁명사상 전파가 가장 이른, 농민들의 자발적 항일투쟁에서 중국공산당 지도하에 조직적이고 목표가 분명한 반제반봉건 무장투쟁으로 전환한, 김순희와 박상활 등 70여명의 항일렬사들이 용솟음쳐나온 이곳, 약수동은 화룡 ‘혁명의 요람’으로 불리우고 있다.

두그루의 소나무와 함께 세워진 김순희 등 렬사 순직지 비석.

◆과거와 현재를 잇는 ‘다리’

약수동의 력사는 체계적으로 보존되고 있다. 지난 4월 29일, 화룡시 투도진 룡문촌 약수동에 다달으니 중앙에는 ‘동북 첫 인민정권’이 쓰여지고 상단에는 ‘화룡현약수동쏘베트정부유적지’라는 글이 새겨진 큰 돌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모양, 무늬, 색상 등이 호랑이를 련상케 하는 이 비석은 하남성 남양산 노을옥이라고 한다. 료해한 데 의하면 홍색땅을 보호, 활용하고 혁명정신을 계승, 발양하기 위해 화룡시로혁명근거지건설촉진회는 화룡시 당위, 정부의 위탁으로 2016년부터 루계로 200여만원을 투입해 약수동쏘베트정부유적지공원 건설 및 전면 보수에 착수했다. ‘노을옥’ 비석도 이때부터 유적지공원내에 세워지게 된 것이다.

1924년에 박상활 렬사가 심은 버드나무.

‘화룡현약수동쏘베트정부유적지’ 비석 오른켠에는 우거진 버드나무 한그루가 서있다. 이 나무는 1924년 박상활 렬사가 심은 나무로 전쟁의 포화와 세월의 풍상을 겪었음에도 여전히 푸르고 약수동쏘베트정부 유적의 유일한 생존 ‘증인’이다. 전해온 데 의하면 이 나무는 두차례 위기를 딛고 다시 자라났는데 한번은 한 촌민이 농기구를 만들려고 줄기를 잘라갔고 또 한번은 일제가 약수동 마을을 불태울 때 함께 불타버렸으나 놀랍게도 이듬해 다시 싹을 틔워 마치 항일투사들의 불굴의 의지를 닮아 말없이 백년 세월 이곳을 지키고 있다. 그 곁에는 동상을 입은 발을 스스로 절단하며 싸우다 장렬히 희생한 박상활 렬사의 기념비가 세워져있다.

박상활 렬사가 심은 버드나무 옆에 세워진 박상활 렬사 기념비.

머지않은 곳에 버드나무와 마주한 두그루의 소나무가 있는데 그 아래는 김순희 렬사가 희생한 곳이다. 희생 당시 임신 8개월이였다. 1932년 11월, 일본 토벌대의 접근으로 당조직은 철수하기로 결정했고 김순희는 임신으로 인한 불편함이 동지들에게 부담이 될 것을 념려하여 함께 이동하지 않고 이곳에 남아 계속 투쟁하기로 했다. 12월 1일 새벽, 김순희는 일본군들에게 체포되였고 적들은 혹독한 고문을 가하며 유격대의 위치를 알아내려 했다. 일본군은 그녀의 배 우에 나무판자를 올리고 밟으며 고문했으나 김순희는 혀를 깨물며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결국 김순희에게서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한 일본군들은 그녀와 다른 몇명의 동지를 살해한 후 근처 초가집에 던져넣고 불을 질러 시신을 소각했다. 김순희가 희생한 후 현지 주민들은 그녀가 희생한 자리에 두그루의 소나무를 심어 영령을 기렸다. 두그루의 소나무는 마치 어머니가 아이를 품은 모습처럼 얽혀 자라났으며 지금도 ‘모자송’이라 불리며 슬픈 력사를 전해주고 있다.

김순희 등 렬사 순직지 비석.

‘혁명렬사 영생불멸’ 비석 뒤 70기의 비석은 희생된 렬사들의 이름이 새겨져있고 50여메터 길이의 주제화랑에선 당시 이곳에서 벌어진 위대한 혁명투쟁과 렬사들의 영웅사적이 상세히 기록되였다. 서쪽으로 약 100메터 떨어진 곳에는 약수동 항일기념지를 기리기 위해 1985년에 화룡현인민정부에서 세운 자그마한 ‘약수동항일기념지’ 비석 앞으로 중공동만 제1차 대표대회 유적, 중공화룡현위원회 유적, 평강구쏘베트정부탄생지 유적 등 10기의 비석이 서있다.

유적지공원은 홍색문화 선전과 홍색정신 계승에서 중대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전 주 기관 간부, 사회 각계 인사들의 참배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한 방문객은 “자손들에게 반드시 이곳을 보여줘야 한다.”며 “선렬들의 불굴의 투지와 희생정신을 잊지 말고 선렬들이 험난한 환경 속에서 이룩한 업적을 소홀히 여기지 말며 선렬들이 강국건설을 위해 마련한 소중한 기반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소중한 홍색정신 재부를 계승하고 발전시켜나가야 한다.”고 감회를 드러냈다.

약수동주제화랑.

◆웃음꽃 피여나는 마을

“어르신들, 맛있게 드세요!”

유적지를 품은, ‘중국 소수민족 특색촌락’이자 ‘전국 아름다운 홍색 촌락 건설 시범촌’ 영예를 받아안은 룡문촌의 로인식당에 이날도 어김없이 마을 로인들이 찾아왔다.

중국로령사업발전기금회의 ‘변경 로인 점심식사’ 프로젝트 지원으로 지난 8월 문을 연 이곳은 일주일에 세번씩 마을 로인들에게 따뜻한 밥상을 제공한다. 주방일은 마을 로인중 솜씨 좋은 4명이 담당하며 로인들은 인당 2원의 저렴한 비용으로 함께 식사하며 정을 나누고 있다.

유적지공원에 세워진 ‘노을옥’ 비석.

“집에선 김치 반찬 하나로 때우다가 여기 오면 반찬도 다양하고 분위기도 좋아서 밥맛이 달라요.” 로인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지난 로인절에는 연변조선족전통음식협회가 준비한 효도음식 대잔치가 열려 로인들이 명절음식을 나눴다.

장춘뢰 촌당지부 서기는 “옛날엔 총소리가 울리던 이곳에 이제 웃음소리가 가득하다.”며 소회를 밝혔다.

한편, 최근 몇년간 유기농쌀 공유농장 등 산업대상으로 수익을 창출하고 촌민 소득을 늘인 이 마을은 경제발전과 복지증진을 위한 새로운 부강의 력사를 쓰고 있다.

“선렬들의 희생을 잊지 않고 더 큰 번영을 이뤄내겠다.” 장춘뢰 지부서기의 다짐이였다. 

글·사진 김은주 기자

来源:延边日报
初审:金麟美
复审:郑恩峰
终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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