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청현 도심을 벗어나 구불구불한 도로를 따라 10여킬로메터를 가다 보면 청산에 둘러싸인 소왕청항일유격근거지 입구에 이른다. 동만항일전쟁력사기념관(원 길림왕청애국주의교양중심) 해설원 임국영의 안내로 중공동만특위와 왕청현당위 기관 유적지, 왕청현 유격대대부 유적, 제2구쏘베트정부 유적 등 20여곳의 유적이 집중된 이곳의 혁명력사를 생생하게 마주할 수 있었다.
왕청현제2구쏘베트정부 유적지.
◆항일유격근거지의 조성과 소왕청쏘베트정부의 수립
소왕청항일유격근거지는 항전시기 중국공산당이 동북에 설립한 비교적 이른 항일유격근거지이다. 유적지는 왕청현 동광진 동림촌 동남부에 위치해있으며 남쪽에서 서북쪽으로 뻗은 길이가 약 10킬로메터이고 너비가 약 2킬로메터의 하곡분지에 자리잡고 있다. 당시의 왕청현성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져있었고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골짜기가 깊어 밖에서는 공격하기 어렵고 안에서는 방어하기 쉬운 지형으로 유격전을 펼치기에 유리했다.
중공동만특위 소재지 유적.
1931년 1월, 왕청현당위는 이곳에 중공소왕청구위(제2구위)를 설립했다. 이후 혁명대중들이 소왕청 지역으로 모여들며 력량이 점차 강성해졌다. 1932년초, 소왕청에서 왕청현반일유격대를 설립했고 4월에는 왕청현당위가 요영구에서 소왕청 마촌으로 옮겨왔다. 같은 해 11월, 중공동만특위 서기 동장영이 특위기관을 이끌고 연길현 왕우구에서 이곳으로 이주하며 왕청현당위와 함께 사무를 보았다. 이로부터 소왕청은 동만 항일투쟁의 지휘중심지가 되였다. 12월, 마촌에 소왕청쏘베트정부를 설립하고 토지, 경제, 량곡, 교육, 군사 등 사무기구를 두었으며 시정강령을 제정하고 정치, 경제, 문화와 군사 등 면에서 일련의 혁명조치를 취했다. 이를테면 등급에 따라 토지를 획분하고 농민들을 동원, 조직하여 농업생산에 종사하게 하며 병기공장, 인쇄공장, 복장공장, 병원, 학교를 개설한 등등이다.
중공동만특위 병기공장유적지.
중공동만특위 밀영유적지.
당시 이 지역 주민의 절반 이상이 반일회, 부녀회, 자위대, 소년선봉대 등 반일조직에 참가해 유격대 작전에 협조했으며 확대 편성된 왕청현항일유격대대는 후일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후에 동북항일련군 제2군으로 발전)를 구성하는 기반력량으로 되였다.
소왕청(마촌)항일유격근거지 유적 분포도
◆일본군의 대토벌과 항일력량의 전략적 전이
왕청현항일유격대대 밀영유적지.
소왕청항일유격근거지의 성장은 일본침략자들을 불안하게 했다. 일본군과 괴뢰군은 유격대 및 유격근거지에 대해 군사 ‘토벌’을 감행했다. 근거지 군민들은 중공동만특위와 왕청현위의 지도 아래 여러차례 침범하는 적들과 맞서 싸웠다. 1933년 11월, 일본군과 괴뢰군은 비행기, 대포로 소왕청항일유격근거지에 대해 극히 광적인 대토벌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적들은 50여일의 토벌로 1000여명의 근거지 군민을 살해했고 당시 겨우 400여명의 생존자만 남았다. 항일력량을 보존하기 위해 1934년 1월말에 중공동만특위, 중공왕청현위는 소왕청항일유격근거지를 떠나 전략적 이전을 하기로 결정했다. 이동 도중에 중공동만특위 서기 동장영은 왕청현 동광진 묘구촌 부근 대북구 밀영에서 희생되였으며 당시 나이가 27세였다.
소왕청항일유격근거지 유적지 우물터.
소왕청항일유격근거지는 왕청현항일유격대대 밀영, 왕청현제2구쏘베트정부 기관, 중공동만특위 병기공장, 중공동만특위 인쇄공장 등 수많은 혁명유적을 남겼다. 현재 이곳에서는 당시의 전투와 생활 모습을 재현한 복원 유적지들이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소왕청항일유격근거지 비석.
◆부녀부장 최금숙과 항일소녀 김금녀
왕청현제2구쏘베트정부 유적 앞에는 동장영과 함께 있는 최금숙의 조각상을 볼 수 있다.
1930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고 1930년대초에 선후하여 중공소왕청구 부녀위원, 중공왕청현위 부녀부장 사업을 맡아한 최금숙은 ‘추수투쟁’과 ‘춘황투쟁’에서 녀성, 아동들을 이끌고 지주들에게 량곡을 요구했고 합법적인 형태로 봉건지주들과 대면하여 론리투쟁을 벌려 그들이 가난한 농가에 량곡을 나눠주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1932년 4월 한간앞잡이 규탄대회에서 “침략자가 물러나지 않으면 끝까지 싸우자!”는 연설로 대중을 고무시켰다.
동장영과 최금숙의 조각상.
1934년초 동장영이 페병과 위병이 도져서 왕청현 십리평 묘구 대북구의 마을에서 병마와 싸우고 있었다. 당조직에서는 최금숙에게 동장영을 간호할 임무를 주었다. 3월 21일, 적들은 십리평 묘구 일대를 포위했고 최금숙은 동장영을 보호하다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로 희생되였다.
동장영, 최금숙 조각상과 멀지 않은 곳에 붉은넥타이를 매고 있는 김금녀 조각상과 김금녀 렬사기념비가 세워져있다.
김금녀 조각상과 렬사기념비.
1932년에 일제에 의해 가족 6명이 학살당한 김금녀는 아동단에 가입하며 “일본놈들을 때려잡아 가족과 동네사람들의 원쑤를 갚겠다.”고 다짐했다. ‘항일선전대’에 참가한 그는 가족의 비극을 소재로 한 가무극을 만들어 각 항일부대에서 공연하며 항일정신을 고취시켰다. 1934년 김금녀는 부대를 따라 왕청으로 이동하던중 소왕청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불행히 적에게 체포되였다. 적들은 어린 금녀를 협박했지만 “비밀을 알아낼 꿈도 꾸지 말라.”며 저항했다. 일본군관이 사탕으로 유혹하자 “너희는 나의 원쑤, 죽일 거면 빨리 죽여라.”며 박치기를 하는 등 끝까지 항거했다. 채찍과 몽둥이로 얻어맞으며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를 웨치다 12살의 어린 나이로 숨졌다.
왕청현유격대 대부 유적지.
◆혁명의 ‘불꽃’을 전하는 현대적 교양공간
당년의 피어린 투쟁의 흔적과 평화로운 현재가 공존하는 이곳에 세워진 동만항일전쟁력사기념관은 ‘봉화’를 주제로 한 전시를 상설 운영하고 있다.
길림왕청애국주의교양중심 '봉화' 주제 전시관 내부 모습.
기념관에 들어서면 곳곳에 전시된 력사사진, 유물들과 생생하게 복원된 정경들이 마치 시간려행을 하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이곳은 ‘변강위기, 분발반항’, ‘기치수립, 외세방어’, ‘포악한 세력에 대항, 열혈분전’, ‘불요불굴, 승리쟁취’ 등 4개 부분으로 나뉘여 1840년부터 1945년까지 105년 동안 연변인민이 외적에 맞서 투쟁한 력사, 동북지역에서 인민을 인솔하여 항일혁명을 진행한 당의 빛나는 업적을 전면적이고 생동하게 전달하고 있다.
수많은 유적들이 집중된 소왕청은 오늘날 애국심과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교양장으로 자리매김하여 우리에게 용기와 희생 그리고 진정한 애국심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주고 있다. 해마다 수많은 관람객들이 이곳을 방문하여 혁명정신을 배우고 있다. 임국영에 따르면 2021년 6월 개관 이후 1200여기의 양성반, 13만명 이상의 방문객이 소왕청을 찾았다.
소왕청항일유격근거지는 중국공산당의 령도 아래 동북 민중이 펼친 치렬한 투쟁의 상징적 공간, 과거의 피어린 투쟁과 평화로운 현재가 교차하는 력사의 현장으로 각광받고 있다.
글·사진 김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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