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장아장 걷기 시작하는 아이를 보면서 나도 모든 엄마들이 흔히 내는 욕심을 한번 과하게 내보았다. 그것은 아이에게 좋은 독서습관을 키워줘야 한다는 육아지식을 바탕으로 아동책을 한권 두권 사들이는 데로부터 시작하였다. 한달도 안되는 사이에 어느새 장난감 옆자리에 무져놓은 책높이가 아이의 키보다 더 높아져서 부득이 육아용 책장을 따로 장만하지 않으면 안될 판국에까지 이르렀다. 눈치를 보다 못해 남편이 한마디 한다.
“집이 도서관이요?”
뜨끔해서 책장을 쳐다보니 내가 보는 책보다 아이가 읽어야 할 책들이 휠씬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겨우 두살짜리 아이를 놓고 내가 너무 조급한 게 아닌가 회의가 드는 순간이였다. 어쩌면 나 역시 천하의 허다한 부모들처럼 내게 없어서 회한이였던 부분을 내 아이에게만은 그런 부족함이 없게 만들려는 대리만족 심리가 작용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나는 어렸을 때 독서를 많이 안한 탓으로 지금도 독서에 대해 흥취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 그런 반면에 지금처럼 내 머리속에 생각을 글로 표현해야 할 시각이 닥쳐오면 마치 머리를 감는 도중에 수도물이 끊기거나, 중요한 통화를 하는 도중에 배터리가 떨어져 휴대폰이 자동으로 꺼지거나, 컴퓨터로 한창 작업을 할 때 정전이 될 때랑 비슷한 심정이 된다고나 할가. 그럴 때마다 독서의 중요성과 필요성이 물을 만난 마른 미역처럼 내 마음속에서 부단히 부풀어나고 있었다. 어쩌면 여태껏 독서를 많이 못한 게 한이 맺혔다고 해도 과하지 않겠다. 그러니 이런 마음을 가진 한 아이의 엄마가 제 아이의 훌륭한 독서습관을 위해 집에다 도서관을 차린다 한들 누가 감히 나서서 말리리…
그러나 례외는 또 있다. 참다 못해 남편이란 사람이 터진다.
“책을 사지 말라는 말이 아니고 아이의 수준에 맞게 한권 한권 다 읽고 충분히 소화를 했을 때 다음단계의 책을 사란 말이요. 아직 애가 책 볼 줄이나 아냐고?”
남편은 남자의 카리스마로 내게 최후의 통첩을 내렸다. 한 엄마의 공들인 탑이 애 아빠의 질타를 받는다고 당장 무너지지는 않겠지만 어차피 이미 사놓을 만큼 많이 샀으니 당분간은 조용히 지내도 무방하기에 쉽게 타협이 된 셈이였다.
그날 이후부터 거의 매일이다 싶게 도착하던 도서택배가 드디여 수령완료라는 표시가 뜨더니 다시는 오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책을 구입하는 데 쓰던 정력을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데로 몰두하게 되였다.
제목이 《좁쌀 한톨》이라는 우리 말 전래동화가 내가 읽어준중에서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이였다. 한 젊은이가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가는 도중에 밤이 되여 주막집에서 하루밤을 묵게 되면서 보짐에서 좁쌀 한톨을 꺼내 주막집 주인에게 보관해달라고 맡겼다. 주인은 속으로 ‘별 싱거운 녀석 다 보겠네!’ 하면서 어이가 없다는 듯 담 너머로 좁쌀을 던져버렸고 다음날 아침 젊은이가 어제 맡긴 좁쌀을 달라고 하자 주인은 깜짝 놀라서 쥐가 먹었다고 둘러댔다. 젊은이는 주인장에게 “그럼 좁쌀을 먹은 쥐라도 잡아주시오!”라고 하자 주인은 할 수 없이 쥐를 잡아 젊은이에게 주었다. 이렇게 되여 젊은이는 처음으로 좁쌀 한톨을 가지고 쥐 한마리를 바꾸게 되였고 다음으로 들리게 된 주막집 주인에게는 보짐 속에 넣고 온 쥐를 맡겼다.
“살다 살다 쥐를 맡기는 놈은 처음이군. 소름 끼쳐!”
그 집주인은 젊은이가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쥐를 던져버렸다. 다음날 젊은이가 주인장에게 자기가 맡긴 쥐를 달라고 하자 주인은 할 말이 없어서 고양이가 쥐를 잡아먹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젊은이가 주인장에게 “그럼 쥐를 먹은 고양이를 대신 주시오!”라고 당당하게 말하자 주인은 주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이렇게 젊은이는 쥐 한마리로 고양이 한마리를 바꾸는 데 성공하였다. 그 뒤로 가면서 젊은이는 고양이 한마리로 말 한 필을 바꾸고 그 말로 또 소 한마리를 바꾸게 되는데 마지막에 그 소로 인해 정승댁의 따님과 결혼까지 하기에 이른다. 전반 이야기가 생동감이 있고 마치 련쇄고리처럼 고리에 고리를 물고 진행되는 것이 신선하고 젊은이가 갖고 있던 최초의 자본이 눈덩이 굴리는 식으로 차츰 불어나는 과정 또한 신기하고 재미났다. 옛날부터 전해져온 전래동화라 사실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인지 아니면 어느 누가 지어낸 이야기인지 지금은 알 길이 없겠지만 나는 진심으로 선인의 지혜를 감탄하였다.
《좁쌀 한톨》은 아이가 특별히 좋아하는 동화책이라 나는 매일 저녁 한번씩은 아이에게 읽어주군 했었다. 두살짜리 아이가 이 이야기에 담긴 내용을 지금 당장 얼마나 알아들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중요한 건 아이의 긴 성장 과정에서 부모인 내가 무엇을 가르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였다. 나는 아마 아이에게 ‘최소 원가로 최대 리익을 창출하는 생존법칙’ 같은 건 한번에 가르칠 재간이 없을 것 같다. 이미 어른이 된 나마저도 아직 터득중에 있는 어려운 인생과제이니까. 하지만 적어도 나는 아이에게 세상을 사는 몇가지 방법을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첫번째로, 나는 아이에게 세밀한 론리적 사고 능력과 재치 있는 언변 능력을 키워줄 생각이다. 만약 동화책 속의 젊은이가 이런 능력을 갖추지 못했더라면 주막집 주인이 궤변을 늘여놓으며 고양이를 주지 않으려 할 때 십중팔구는 본전도 못 찾았을 것이다. 더구나 고양이로 말을 바꾸고 말로 소를 바꾸는 과정에서 말과 소를 가진 주인들이 멍청하지 않은 이상 손해보면서 자기 것을 쉽게 내줄 리가 있었을가? 그러니 젊은이의 능력은 현시대를 놓고 말하면 적어도 변호사급 정도 실력은 되지 않을가 짐작해본다.
두번째로, 나는 아이에게 변수에 따라 대응할 수 있는 순발력과 응변능력을 련마하게끔 도울 생각이다. 례를 들면 말이 고양이를 발로 차서 죽이지 않았더라면 다음날 젊은이는 고양이 대신 말을 바꾸지 못하게 되고마찬가지로 소가 말을 뿔로 받아 죽이지 않았더라면 젊은이가 말 대신 소를 획득할 가능성도 없다. 심지어 맨 처음 주막집 주인이 좁쌀을 잃어버리지 않고 다음날 그대로 돌려준다면 그 뒤에 모든 일들이 발생하지 않는다. 인생에는 우리가 예상치 못한 너무나 많은 변수가 존재하기에 계획 대로 실천하려면 변수에 대응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세번째로, 나는 아이가 담략이 크고 식견이 넓어지도록 도와줄 생각이다. 그것은 마치 젊은이가 정승댁에 찾아가 그 앞에서 비굴하지도 거만하지도 않게 자신의 래의를 밝히는 것과 같다. 젊은이는 정승에게 “내 소를 돌려주시오!”라고 말했을뿐더러 정승이 우리 딸이 그 고기를 먹었는데 어쩌겠냐고 하자 “그럼, 따님을 제게 주셔야지요.”라고 대답했다. 정승은 젊은이의 배짱을 알아보고 장차 크게 될 인물이라고 짐작되여 딸과 결혼을 시켰다. 요즘 세월에 남자든 녀자든 그 어떤 어려운 상황이나 기세 앞에서도 주눅이 들지 않고 림기응변하자면 젊은이와 같은 담략과 식견이 꼭 필요한 것 같다.
네번째로, 나는 아이에게 항상 신심과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줄 생각이다. 이야기 속의 젊은이는 좁쌀 한톨을 원가로 들이고 여덟짐의 큰 마가 행차가 없이도 정승댁의 따님과 혼인을 할 수 있었으니… 세상의 많은 일들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어쩌면 안될 것 같던 일도 신심과 희망을 품고 노력하다 보면 가능성을 창조할 수 있다는 도리를 나는 아이와 함께 여러가지 실천을 통해 깨우쳐줄 생각이다.
나는 이 동화책 속의 좁쌀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동전 1원이 될 수도 있고 한권의 책이 될 수도 있고 또는 집 한채가 될 수도 있고 어느 학교, 어느 직장 또 혹은 어떤 하나의 신분 등 모든 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비록 최초의 자본이 매우 중요한 건 사실이지만, 어떻게 끊임없이 당신의 자본을 승화시키고 강대해지겠는가 하는 것이 우리가 살면서 직면하게 될 현실적인 문제들이기에 무시해서는 안될 부분이기도 하다. 사실 부모가 곧 아이의 가장 좋은 롤모델이기 때문에 아이의 교육을 잘하려면 내 본인이 우선 더 우수해져야 한다는 점을 각성해야 된다. 이건 누구나 잘 아는 도리지만 필경 실천에 옮기자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나는 이걸 해내는 부모들이 참 대견스럽다 생각하고 나도 해낼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다.
현재 내 아이의 나이는 네살이다. 이제 제법 재잘재잘 말을 잘하는 아이에게 어느 날 나는 무심결에 《좁쌀 한톨》을 주어들고 왜 이 동화책을 좋아하는지 물어보았다. 아이의 대답은 의외로 간결했다.
“동물이 많아서요.”
순간 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표정관리가 잘 되지 않았다. 아이의 단순한 대답에 빵 터져야 할 타이밍인 것 같은데 막상 내가 세운 거창한 계획들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올 수가 없어서였다. 아이는 나의 모든 상상을 깨고 자기만의 세계가 따로 있었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나 또한 나만의 세계에서 아이를 위한 교육을 계획하였던 것이다.
그날 나는 아이의 대답을 듣고 나서 그동안 내가 간과한 부분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아이의 교육은 부모만의 생각과 계획으로 단독적으로 결정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육아교육은 아이와 부모가 각자 평행선으로 달리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의사와 실제 조건을 토대로 하여 아이가 피라미드를 짓는 것을 부모가 옆에서 도와줘야 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다시 생각해보면 동화책 속의 젊은이도 좁쌀 한톨로 처음부터 뭔가 큰 계획을 세우고 의도적으로 진행했던 건 아니지 않나 싶기도 하다. 그저 상황이 그리 되니 현재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기회를 놓치지 않았을 뿐이 아닐가? 물론 기회는 준비된 사람에게만 온다는 철칙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런 의미에서 봤을 때 내가 미리 세운 ‘좁쌀 한톨’의 육아교육도 그나마 유효한 셈이지 않는가?
다만, 향후부터는 남편의 의견도 적당히 참고하면서 절대 모를 뽑아서 키우는 미련한 짓 따위는 더는 하지 않도록 주의할 것이다. 그리고 이제부터라도 아이의 성장 속도를 맞춰가면서 항상 아이의 진심과 기본능력을 우선으로 간파한 후, 아이에게 정말로 도움이 될 수 있는 교육을 실시하는 현명한 부모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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