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그막 재혼 □ 리순자

2023-12-15 08:41:47

낮게 드리운 하늘은 희끄무레하다. 뭉게뭉게 겹쳐진 구름이 권일이의 가슴팍을 지지누르는 것 같아 답답하다. 월자와 재혼한 지 일년 반 사이에 벌써 두번이나 보따리를 싸쥐고 집에 가겠다는 걸 혼자 살아갈 자신이 없어 두 손을 싹싹 비비며 잘못했다고, 가지 말라고 붙잡았더니 습관을 잘못 들인 탓인지 오늘 아침에 또 보따리를 들고 나갔다. 이젠 잡지 않을 거다. 자기 발로 걸어 들어오면 좋고 그냥 내버려둬야지. 권일이는 속다짐을 하면서 지나간 일들을 되새겨보았다.

평생을 중학교 수학교원으로, 또 우수교원 영예를 안고 정직하게 살아온 권일이였다.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대학까지 졸업시켜 시집장가를 보내놓고 또 마누라의 요구에 따라 손군들까지 하나하나 다 봐주고 나니 이젠 령감 로친이 편안하게 행복하게 잘살 날만 남았다고 좋아했는데 덜컥 일이 생겼다. 평시에 소화제로 살아오던 마누라가 인젠 소화제도 말을 안 듣는다면서 병원에 가더니 위암 말기란 청천벽력  같은 진단을 받았다. 상해에 있는 큰아들 집에 가 다시 전면검사를 받아봐도 똑같은 진단이 나왔다. 권일이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 잡듯이 의사의 손을 잡고 제발 사람을 살려달라고 애걸했지만 날로 수척해지는 안해를 잡을 힘이 없었다…

한달 만에 마누라를 저세상으로 떠나보내고 권일이는 아들의 만류도 듣지 않고 고집을 부리며 집에 돌아왔다. 안해가 없는 집은 싸늘하기 그지 없었다. 구석구석 안해의 손길과 그림자가 얼른거려 추억에서 헤여나올 수 없었던 권일이는 아예 음식을 전페하고 마누라더러 자기도 데려가라고 속으로 애원하였다.

날따라 수척해지는 아버지를 볼 수 없어 자식들은 합의 끝에 새 엄마를 모시기로 하고 로인협회 회장한테 주선을 부탁하였다.

나이 칠십에 이제 재혼은 안한다고 고집을 부리던 권일이였지만 어느 지인의 소개로 활달한 성격에 이목구비가 단정한 월자를 만나자 마음이 움직여 재혼을 결정하였다.

처음 만남부터 월자는 자기는 공부도 못해서 가방끈이 짧아 권일 선생님의 상대가 되겠냐면서 겸손한 태도를 내비쳤다. 그러는 월자가 권일이한테는 더 미덥게 다가왔고 나가서나 들어와서나 월자씨라고 호칭하였다.

월자는 권일이의 요구에 따라 ‘권일 선생님’으로부터 ‘여보’라고  아주 살갑게 불렀다. 월자의 살뜰하고 다정다감한 성격에 권일이의 그늘진 얼굴에 점차 화기가 돌기 시작했고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는 자식들도 기뻐하면서 월자를 어머니라고 정겹게 불러주어 권일이는 흐린 날 없이 매일 맑은 날씨를 맞이하는 기분이였다.

그런데 옥에도 티 있다고 나무랄데 없는 월자였지만 돈 씀씀이만은 너무 헤픈 것 같았다. 권일이가 좀 아껴 써가면서 살림하면 어떻겠느냐고 의견을 내놓았더니 권일이를 쪼잔하다고 나무렸다. 쪼잔하다는 말에 화가 난 권일이가 뭐라고 좀 했더니 숨 막혀 못 살겠다며 자기는 보따리 하나 들고 왔으니 나갈 때도 하나만 들고 가면 된다며 가겠다는 걸 권일이는 내키지 않는 반성을 하면서 잡아두었다. 그리고 월급의 3분의 2를 아예 월자한테 맡겨놓으니 권일이도 숨이 좀 나오는 것 같았다.

한번은 월자가 또 몸보신도 할겸 닭백숙을 해먹자며 닭 한마리 사다가 분주히 주방에서 돌아쳤다. 한참 후 식사준비가 다 되였다 하길래 가 보니 상다리가 부러지게 한상 가득 차려놓은 것이였다.

“오늘 혹시 손님을 초대했소?”

“아니, 당신과 나. 우리 둘.”

월자가 권일이를 쳐다보며 쌔물쌔물 웃는다.

“근데 뭐가 이리 많아? 닭 한마리면 충분하지. 더덕구이, 도라지무침… 이러다 집구석 망하는 거 아니요?”

권일이는 롱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

“여보, 식욕이 성욕이래요. 잘 드시고 힘내서 오래 살아야지.”

‘성욕은 뭐 개뿔 같은 성욕.’

권일이는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 채 말없이 숟가락을 들었다. 그리고는 ‘아무리 많이 차려도 난 안 먹는다’는 반항심으로 닭고기만 말없이 뜯다가 수저를 놓았다. 권일이의 이런 행동에 아무리 ‘가방끈이 짧은’ 월자도 권일이의 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

“정말 재미 없어 못 살겠어요. 상대가 기분 좋게 성심껏 했으면 받아주는 재미라도 있어야지. 엇서는 그 심보는 배운 게 많아서 그런가요?”

월자는 확 화를 내면서 신을 찾아 신었다. 자책감이 좀 든 권일이는 월자를 진심으로 말렸다.

그렇게 겨우 잡아둔 월자가 어제는 홈쇼핑에 갔다 오더니 약 한꾸러미를 들고 들어온 것이다.

“이건 눈과 간에 좋고 이건 뼈 건강에 좋고 이건 피를 맑게 하여 풍에 안 걸린대요. 그리고 이건…”

권일이는 억이 막혀 말이 안 나왔다. 홈쇼핑인가 뭔가에 갈 때부터 말렸는데 친구집에 간다 속이고 나가서 이렇게 사들인 것이다. 이것만 먹어도 배불러 밥 어떻게 먹냐 했더니 월자가 발칵 대들었다.

“건강할 때 건강 챙기려고 그러는데 자기 몸에 쓰는 것도 이렇게 발발 떠니 정말!”

“아까워서가 아니라 먹으려면 병원에 가 건강검진을 받고 내 몸에 부족한 걸 먹어야지 그 사람들 의사야? 내 몸이 그걸 요구하는지 안 하는지 누가 알아? 모르면 좀 물어나 보구 사던지 말던지.”

권일이도 화가 났다.

“그래 알았어요. 내가 무식해서 남의 말만 듣고 샀다고 그러죠?”

“아니, 여기서 무식하단 말은 왜 나와? 의사 말 안 들어보고 돌팔이들한테 당한다고 그러는 거지.”

“이건 약이 아니라 보건식품이래요. 누구에게나 다 필요하대요. 돈 뒀다 관에 갖고 가? 에이, 그랑데령감 같으니라구.”

권일이는 그랑데라고 하는 월자의 말에 말없이 침대에 가 누웠다. 그렇게 어제 저녁은 서로 등을 돌리고 잤다. 날이 밝아 아침이 되여 권일이가 눈을 떠보니 월자가 아침밥을 지어놓고 말도 없이 사라진 것이였다.

권일이는 밥상에 마주 앉았지만 지난 밤 뜬눈으로 새다가 새벽녘에야 좀 눈을 붙혀서인지 밥알이 모래알 같았다. 이번엔 절대로 전화도 하지 않고 빌지도 않을 거라고 속으로 다짐하였다.

한참을 초점 없이 밖을 응시하다가 시계를 보니 점심때가 되였다. 배에서도 시장기가 돌았다. 권일이는 밥 둬숟가락 먹었는데 입이 쓰거워서 무슨 맛인지 알 수 없었다. 방에 들어가 오래간만에 마누라의 사진을 꺼내 보았다.

‘여보, 미안하오. 당신의 빈자리가 너무나 허전하여 월자와 함께 일년 반을 이 집에서 살았소. 우린 정말 인생을 잘못 살았소. 애들을 시집장가만 보내면 우리 임무는 끝나는데 손군들까지 봐주면서 너무나 몸을 혹사했소. 없는 살림에 아껴쓰면서 애들을 나라에 바치고 당신은 병만 얻었소. 마음 착한 당신은 지금 천국에 있겠지? 거기서는 아프지 않소? 내 자리까지 마련해놓소. 우리 거기서는 둘만 살기오.’

권일이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다시 돌아서서 마음을 다잡고 세수도 하고 월자가 사다준 화장품을 골고루 잘 발랐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 아빠트단지를 한바퀴 돌고 집에 들어왔다. 시계를 보니 오후 네시이다. 여름이라 아직은 해가 많이 남았다. 오늘은 왠지 시간도 더디게 흘러간다. 어제 월자가 사온 보건품을 하나하나 뒤져보았다. 마누라는 이런 걸 하나도 못 먹어보고 갔다.

‘월자는 이런 걸 먹어서 건강한가? 왜서 자꾸 월자가 떠오르지?’

생각 말자고 밀어보니 더 생각이 난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어져 집에는 어둠이 좀씩 깔린다. 혹시라도 전화벨이 울리겠나 싶어서 화장실에 갈 때도 손에서 휴대폰을 놓지 않으면서도 입으로는 이번엔 절대 빌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시계가 일곱시를 가리키자 혼자 아침에 해놓은 밥을 물에 말아서 먹네 마네 하고 텔레비죤을 켜려는데 마침 전화벨이 울렸다. 제꺽 확인하니 아닌 게 아니라 그렇게 기다리던 월자였다.

“여보, 나 지금 발목을 접질렀어요.”

“거기 어디요?”

권일이는 리모컨을 던지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급하게 물었다.

“동북아뻐스역 앞 동쪽.”

“알았소. 움직이지 말고 거기서 기다리오.”

권일이는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을 택시를 잡아타고 갔다. 가로등 밑에 월자가 안스럽게 서있었다. 권일이는 택시에서 내려 한달음에 달려갔다.

“어디 보기오. 병원 가야지.”

“여어보…”

월자는 권일이의 허리에 매달렸다. 그러는 월자를 권일이도 으스러지게 꽉 그러안았다.

“요 맹꽁이.”

“호호호호.”

“하하하하.”

둘은 가로등 불빛이 환한 사거리를 손잡고 의지하며 천천히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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