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은 사과 □ 최희애

2023-12-28 15:38:59

연구생공부를 마치고 공무원시험에 합격되여 연길에서 사업하고 있는 아들애는 요즈음 결혼준비로 무척 바삐 돌아치고 있다. 어느 주말, 아들애는 신혼집을 장만할 적금이 들어있는 은행카드를 가지러 오랜만에 집으로 왔다.

그동안 외손자를 자주 보지 못해 그리워하는 어머니를 생각하여 나는 아들애를 앞세우고 어머니 집으로 향했다. 뜻밖에 외손자를 보게 된 부모님은 기뻐서 어쩔 바를 몰랐다. 어머니는 외손자를 끄당겨 가까이에 앉히며 “요즘 결혼준비로 집을 보러 다닌다고 하던데 그래 일이 순조롭게 돼가고 있나?”하며 궁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아들애한테 다그쳐 물었다.

“네, 잘돼가고 있습니다!”

말수가 적은 아들애의 대답은 언제나 토끼 꼬리처럼 짤막하다. “네 에미가 너를 낳고 우리 집에서 산후조리를 하던 때가 어제 같은데 네가 벌써 28살이나 돼 결혼준비를 하는구나. 그러니 우리가 안 늙을 리 있나? 네가 장가가는 것까지 보니 정말 산 보람이 있는 것 같구나.”

어머니는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으시며 아들애의 손을 어루쓴다. 아버지는 언제나 입에 자물쇠를 잠근 듯 아무 말 없이 시무룩이 웃으며 우리 얘기에 조용히 귀를 귀울이기만 하고 있다.

어머니는 오랜만에 만난 황금 같은 시간을 허투루 흘려보낼세라 또다시 새로운 질문을 들이댄다.

“너와 령이 련애를 몇해 했다고 했지? 너희들은 련애하면서 서로 얼굴 붉혀본 적 있나?”

“거의 2년이 됩니다. 령이는 무남독녀지만 성격도 쾌활하고 남을 잘 배려하기에 우린 아직까진 서로 얼굴 붉혀본 적은 없습니다.”

조금 수줍어하며 대답하는 아들애의 얼굴에는 행복의 물결이 넘실넘실 넘쳐나고 있었다.

“그래야지, 앞으로도 계속 서로 배려하고 아끼며 한평생 살아가거라… 령이도 무남독녀이니 부모님들이 얼마나 애지중지 키웠겠나? 넌 공부도 너의 아버지보다 많이 했고 성격도 너의 아버지처럼 우락부락하지 않으니 너의 아버지 같은 길을 안 걸을 거라고 믿는다.”

어머니의 여느때와 다른 모습에 나는 조금은 당혹스러워졌다.

“어머니, 손주가 장가 간다니 인생공부라도 시키려고 그럽니까?”

“인생공부까지는 아니고 딸 둘을 키운 엄마로서 현빈이가 장가 가기 전에 이 외할머니가 마음속에 깊숙이 파묻었던 가슴 아픈 이야기를 하고 싶구나…”

어머니는 언제보다 진지한 표정을 짓는다.

아들애는 점점 오리무중에 빠져 나와 외할머니를 번갈아보았다.

“이 지난 이야기는 네가 모르는 너의 아버지에 관한 얘기다. 이젠 네가 장가갈 나이가 되였으니 알아야 될 것 같아서 내가 너한테 들려주는 거란다.”

온 저녁 한마디 참여 없던 아버지가 “다 지나간 얘기를 애 앞에 꺼내서 뭘 하오?”하며 위엄 있는 목소리로 엄마를 제지하려 했다. 그러나 이미 엎지른 물이나 다름없고 화살은 이미 시위를 떠나버렸다.

아들애는 외할머니가 대체 무슨 얘기를 하시려나고 호기심에 찬 표정을 지었다. 엄마의 얼굴에는 누구도 막지 못한다는 비장한 결심이 내비치고 있었다.

“현빈아, 네가 다섯살 나던 해 너의 엄마와 아빠가 크게 싸운 적 있었단다. 네 엄마가 피투성이 되여 병원 급진실에 누워있더라는 소식을 너의 이모 친구한테서 뒤늦게 전해들었어… 너무 놀라서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허겁지겁 너의 엄마를 찾아갔지… 대체 무슨 일이냐고. 네 엄마는 출근도 못하고 집에 있었는데 눈이 퍼렇게 멍이 든 데다 퉁퉁 부었고 입도 터져 왕벌한테 쏘인 것처럼 퉁퉁 부어 몰골이 말이 아니더구나… 우리가 다그쳐 물어서야 네 아빠가 그렇게 심하게 손을 댔다고 털어놓더구나!”

집안의 분위기는 삽시에 먹장구름이 내려앉은 것처럼 어둡고 침침했으며 아들애는 어느새 손톱을 입에 넣고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동안 아들애가 손톱을 물어뜯는 나쁜 습관을 고쳤다고 생각했는데 외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는지 아들애가 저도 모르게 또 손을 입에 가져다대는 것이였다.

“그때 정말 너의 아빠를 엎어놓고 패주고 싶었고 집에 든든한 남자가 없는 것이 원통하더구나. 너의 외할아버지는 또 평생 남한테 싫은 소리 한마디 안 하시는 위인이시잖니? 애들 앞에 나서서 강의하는 교원이 그런 얼굴을 해가지고 어떻게 단위에 출근하겠나? 너의 엄마는 무슨 낯으로 이 도시에서 살겠냐며 너의 아빠와 갈라서고 이 도시를 떠나겠다고 아득바득 우기더구나! 그때 네가 다섯살이였다.”

어느새 엄마의 눈시울은 축축히 젖어들었고 울음 섞인 목소리도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키운 딸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지? 어려서부터 참하고 말썽 일으킬 줄 모르고 예쁜 짓만 골라하는 네 엄마를 우리는 욕 한번 한 적도 없이 키웠다. 비록 남처럼 부유하진 못해도 딸애지만 이 사회에서 당당하게 살라고 온갖 정성을 다해 공부도 열심히 시키고 애지중지 키웠지! 교원이라는 네 아빠가 그렇게 자질이 없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었지! 그동안 네 엄마가 한번도 내비치지 않아 우리는 아무것도 몰랐는데 너의 아빤 평시에도 가벼운 손찌검을 자주 했다는구나!”

엄마는 더 말을 잇지 못하였고 얼굴에서는 어느새 눈물이 줄 끊어진 구슬처럼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어느새 일어서서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거실을 왔다 갔다하고 있었다.

“어린 네 앞에서 엄마한테 매를 댔으니 너도 얼마나 놀라고 마음에 상처를 입었겠나? 휴…”

엄마가 걱정하는 눈길로 손자를 쳐다보며 입속말로 중얼거렸다.

“자식이지만 아버지가 그렇게 형편 없을 줄을 몰랐습니다. 제 기억 속에는 아버지가 엄마한테 손찌검하는 건 못봤습니다.” 아들애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마디 했다.

동창생의 소개로 남편을 만난 나는 첫눈에 남편의 멋진 모습에 반해버렸었다. 키도 크고 잘 생기고… 우린 늦게 만난 것을 후회하면서 서로 일년 가까이 뜨거운 련애 끝에 결혼식을 올렸다. 그때 나는 소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남편은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련애시절 그렇게 싹싹하고 나를 공주처럼 떠받들던 남편이 결혼 후 완전히 딴 사람으로 변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외독자로 모든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란 남편은 집안의 모든 일은 자기 뜻에 따르기를 원하는 것이였다. 나의 월급도 자기가 관리할 것을 원했고 거기에 대남자주의까지 심하여 가무엔 손가락 하나 까딱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임신하고 막달까지 단위에 출근하랴 가무를 전담하랴 그런 것까지는 괜찮았다. 어차피 식솔이 둘 뿐이라 별로 가무도 많지 않으니 나는 그럭저럭 남편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고 모든 가사를 도맡아하였다.

귀여운 아들애가 태여나 내가 석달 간의 산후휴가를 내고 집에 있으면서부터 남편의 잔소리가 심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 따라 나는 감기몸살이가 나 힘들었는데 아들애도 나한테서 감기가 옮았는지 온저녁 잠들지 못하고 빽빽 울어댔다. 귀찮아진 남편은 우는 아들애를 돌봐줄 대신 자기와는 관계 없는 듯이 다른 칸으로 훌쩍 건너가 문을 걷어닫고 수수방관하는 것이였다. 새벽녘에 아들애가 겨우 잠이 들어서야 나도 혼곤히 잠이 들었다.

잠결에 무엇인가 내 얼굴을 사정없이 쳐대는 바람에 깊은 잠에서 겨우 정신 차리고 눈을 떠보니 남편이 애 기저귀로 내 얼굴을 사정없이 내리치는 것이였다. 잠결에 맞은 내 얼굴은 벌써 다리미로 지진 것처럼 따가워났다. 어쩡쩡해 일어나 앉으니 남편이 “아낙네가 남편이 출근하는데 아침밥도 안 차리고 뭐해?”하며 또다시 기저귀로 내 얼굴을 내리치려고 하는 것이였다.、

“현빈이도 아파 새벽녘에야 겨우 잠들다 보니 미처 못했어요. 하루쯤 당신 절로 닭알이라도 지져 요기하고 출근하면 안돼요?”

나는 마음속의 분노를 눅잦히며 손으로 기저귀를 막았다. 남편은 성이 나서 펄펄 뛰며 “매일 집에 있는 신세에 뭘 잘했다고 대답질이야.”하며 나한테 발길을 날리는 것이였다. 그것이 우리의 첫 무력전쟁이였다.

내가 단위에 일이 있어 조금이라도 늦게 퇴근하는 날이면 남편과 전쟁이 벌어지는 날이였다. 민감한 남편 때문에 나는 단위에서 꼭 참가해야 할 활동을 내놓고 친구들 모임이며 동창들 모임에는 아예 발길조차 돌리지 않았다. 나는 얼음판을 걷는 심정으로 남편의 비위를 맞춰가며 조마조마하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마음속으로 몇번이나 리혼을 결심했지만 어린 아들애한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고 차마 리혼녀라는 딱지를 달고 살 용기가 없어 참고 참으며 살아왔던 것이다. 그렇게 참고 살다가 아들애가 다섯살 나던 해 내가 병원에 실려갈 정도로 남편한테 물매를 맞은 것이였다.

그날 엄마가 지금까지 모르는 일이 있는데 내가 병원에 가게 된 것은 남편이 내 머리를 내리치려 하는 술병사리를 내가 얼결에 팔로 막다가 병사리가 깨지면서 팔에 유리쪼각이 박혀 병원에 달려간 것이였다. 그날 남편은 밖에서 술을 거나하게 마시고 집에 들어왔는데 갖잖은 일로 나한테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남편이 시비를 걸기 시작할 때부터 어린 아들애는 옆에서 비참하게 울음보를 터뜨렸다. 남편은 그러는 아들애는 아랑곳하지 않고 가슴속에 쌓아 둔 분노를 나한테 쏟아붓기라도 하듯이 주먹을 날리고 있었다. 꼭 마치 권투선수가 연습이라도 하듯이 내 얼굴을 쥐여박아 코피가 터져 내 얼굴은 삽시에 피범벅이 되였다. 그래도 화풀이가 안되는지 병사리로 내 머리를 내리치려는 걸 내가 팔꿈치로 막았던 것이다. 병사리는 내 팔꿈치에 맞아 산산쪼각 나면서 내 살을 찢고 내 팔에 박혔다. 삽시에 예리한 아픔이 온몸을 엄습해왔고 팔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졌다. 남편도 그때에야 정신이 들었는지 나를 끌고 허둥지둥 병원으로 달려가는 것이였다.

병원은 우리 집과 몇백메터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수건을 상처에 간신히 덮고 남편한테 끌려 병원으로 달려가다 보니 아들애를 신경 쓸 경황도 없었다. 아들애는 “엄마!”하고 자지러지게 울며 우리를 뒤쫓아 병원까지 왔다. 남편한테 끌려가는 내내 나는 내 아픔보다 뒤에서 따라오는 아들애를 잃을가 봐 아들애의 그 가슴 허비는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을가 봐 더 무서워 아들애의 이름을 간신히 부르며 뒤를 돌아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 일이 있은 후 나는 남편에 대해 완전히 신심을 잃었고 리혼을 결심했었다. 하지만 정작 내가 리혼하겠다고 비장의 카드를 내드니 남편은 한번만 용서해달라며 손이야, 발이야 빌었다. 그렇게 사위를 증오하던 우리 부모님도 남편이 저렇게까지 용서를 비는데 현빈이를 아버지 없는 애로 키우고 싶은가며 한번만 용서하라고 나를 설복하는 것이였다. 네 타고난 복이 그러하니 갈수록 심산이라고 리혼녀의 딱지를 달고 애까지 딸린 몸으로 다시 어떤 좋은 사람 만나겠냐는 것이였다. 이렇게 나는 아픈 상처를 가슴에 품고 현빈이한테 완전한 가정을 주기 위해 리혼을 포기하고 남편과 살기로 마음먹었다.

비록 한집에서 한가마 밥을 먹고 산다지만 마음속으로 극도로 남편을 증오하는 나는 남편한테 언제 한번 웃음기 있는 얼굴모습을 보여준 적 없었고 집안 분위기는 늘 서리가 내린 듯 랭기로 감돌았다. 그 후 남편은 크게 손찌검하는 버릇은 떨어졌지만 제멋대로 성을 내고 그릇을 쥐여뿌리는 나쁜 버릇은 별로 개변이 없었다.

그러다가 남편이 언젠가 단위 령도와 크게 다투고 사직하더니 한국으로 로무를 떠났다. 그렇게 떠난 남편은 한국에 간 몇년 동안 생활비도 부치지 않았고 집에 기별도 없었다. 혼자의 월급으로 아들애를 키우며 경제적으로 비록 힘들었지만 마음만은 편하기 그지 없었다. 내가 혼자 힘들게 아들애를 키우는 모습이 늘 안스럽고 마음이 아팠던 부모님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은 세를 주고 친정집에 들어와 함께 살자고 했다. 그러면 이미 퇴직한 부모님이 현빈이를 돌봐줄 수도 있다는 것이였다.

남편이 한국으로 떠난 후 점점 말수가 적어지고 생기를 잃어가는 아들애를 보면서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함께 북적이며 생활하면 아들애의 성장에도 유리할 것 같아 부모님과 함께 생활하기로 결정했다. 외할머니 집에서 함께 생활하면서부터 과묵하던 현빈이는 점차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주말이면 외할아버지 오토바이에 앉아 고기잡이도 다녀오고 외할아버지 문구치러 다니는 데도 강아지처럼 졸졸 따라다니며 외할아버지를 무척 따랐다. 역시 남자애한테는 부성애가 필요했나 본다.

부모님들이 현빈이를 많이 돌봐준 덕분에 나는 여유시간이 많아졌다. 나는 퇴근 후에는 결손가정의 자녀를 상대로 꾸린 저녁 복습반에서 애들을 가르치면서 수업료를 받아 우리의 생활에 보태군 하였다. 비록 경제상황은 어려웠지만 우리 네식구는 늘 따뜻한 가족사랑을 나누며 아기자기 행복하게 생활했다.

나는 남편이 생활비를 부쳐오지 않아도 종래로 의견을 내비치지 않았다. 남편이 내 옆에 없는 것이 더 홀가분하기만 하였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기러기부부로 생활하고 있는데 오히려 이것이 나한테는 제일 좋은 안배라고 생각되였다. 현빈이한테도 아빠가 한국에 로무를 갔다고 떳떳이 말할 수 있고… 이렇게 현빈이와 서로 의지하면서 함께 복습반도 다니고 선생님들과 교류를 가지면서 현빈의 공부를 엄격하게 틀어쥔 덕에 현빈이는 줄곧 학습성적이 출중했고 끝내 중점대학에 붙었다. 그동안 중국에 한번도 발길을 돌리지 않았던 남편은 현빈이가 대학에 붙었다니 그제야 집에 한번 왔다 갔지만 또다시 잠적한 듯 련락이 뜸해졌다.

이미 23년이 지난 오늘 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그날의 일이 엄마 아빠한테 아직까지 이렇게 큰 상처로 남아 있을 줄을 나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원한은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기라는 말이 있지만 어떤 원한은 어쩌면 한평생 가슴속에 남아있는 지도 모른다. 외할머니 집을 나선 후 나는 “현빈아, 엄마가 너의 외할머니 외할아버지한테 불효녀구나!엄마는 그동안 네가 건강하고 훌륭하게 자라는 모습에 아빠가 나한테 준 상처는 잠시 잊고 살았는데… 너의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아직까지 마음속에 그 아픔과 원통함을 품고 있었구나.”하며 든든한 아들애의 손을 꼭 잡았다.

아들애는 아무 말 없이 터벅터벅 걸어가더니 “엄마, 나한테 왜 자꾸 손톱을 뜯는 나쁜 습관이 있는지 늘 의문스러웠는데 이제야 알 것 같아요. 언젠가 심리학책에서 봤는데 어려서 놀라거나 공포스러운 환경 속에서 자란 애들이 이런 습관이 있다고 합니다. 가정폭력의 영향이 얼마나 큰지 이제야 알았습니다. 길지 않은 인생 사랑만 줘도 모자랄 가족한테 이런 큰 상처를 준 아버지가 정말 리해가 안가네요. 엄마는 정말 나를 위해 자신을 많이 희생한 것 같아요!”하며 어른스럽게 내 가냘픈 어깨를 꽉 그러안는 것이였다.

“오늘 외할머니가 한 얘기는 네가 앞으로 아빠와 같은 길을 걸을가 봐 걱정되여 하는 얘기다. 그러니 꼭 명심하고 앞으로 결혼생활을 지혜롭게 해나갔으면 좋겠구나. 엄마는 네가 성가하면 멀리서 너희들을 응원하고 지지할게. 혹시 엄마가 필요하다면 엄마가 한달음에 달려가겠지만…”

“알았어요. 엄마 저는 절대 아빠와 같은 길을 걷지 않을 겁니다. 내 사랑하는 녀인한테 어떻게 손을 대겠습니까?”

아들애는 확신의 표정을 짓는다.

이튿날, 아들애는 은행카드를 가지고 돌아갔다. 카드에는 아들애의 결혼준비에 보태라며 남편이 보낸 얼마간의 적금과 내가 그동안 아글타글 모은 모든 재산이 들어있었다. 한국에 간 후 한번도 생활비를 보내지 않았던 남편이 마음먹고 아버지 의무를 하려고 한 것 같았다. 아들애는 이 돈으로 신혼집 선불금을 내고 나머지는 장기주택기금 대출로 해결하기로 했다. 7월 3일은 아들애와 녀자친구가 처음 만난 기념일이란다. 우리는 이날 결혼식을 올리기로 결정했다. 아들애를 대학에 보내고 그동안 한번도 중국에 발길을 돌리지 않았던 남편이 아들 결혼식에 참가하러 중국으로 들어왔다.

아들애의 결혼식은 우리가 사는 도시에서 간단하면서도 정중하게 치러졌다. 몇년 만에 만난 아들이 떳떳하고 멋지게 변화된 모습이 대견한지 례식장에서 부모 좌석에 앉은 남편은 흐뭇한 표정으로 싱글벙글 입을 다물 줄 몰랐고 흥이 겨워 덩실덩실 춤도 열심히 췄다. 아들애와 며느리의 손을 꼭 잡고 앞으로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며 행복하게 살라고 아버지의 립장에서 정중한 부탁도 하는 것이였다. 20년 가까이 한국에서 생활한 남편은 이젠 나이가 들어 그런지 이전보다 깔끔해졌고 많이 상냥해진 것 같았다.

남편은 이번 걸음에 겨우 보름이란 청가를 맡았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이틀 전, 저녁식사를 마치고 남편이 뜬금없이 아들애가 집에 올거라며 아들 마중하러 기차역으로 나가자는 것이였다.

“무슨 일로 밤에 급히 온담까? 며늘애는 함께 안오고?”

금방 신혼려행을 다녀온 아들애가 피곤할 텐데 무슨 일로 밤에 급한 걸음을 하는지 내가 의아해 다그쳐 물어도 남편은 계속 기타부타 말이 없이 주섬주섬 옷을 주어입으며 마중 갈 준비를 다그치는 것이였다.

출입구를 빠져나온 아들애는 차에 올라타며 “외할머니집으로 향해 가세요. 엄마.”하고 핸들을 잡은 나한테 무게 있게 지시한다.

아들애의 명령에 따라 나는 묵묵히 엄마집을 향해 차를 몰았다.

불을 어둡게 켜고 텔레비죤을 보던 부모님은 우리 세 식구의 뜻밖의 광림에 어안이 벙벙하여 어서 앉으라고 자리를 내주는 것이였다.

아들애는 정중하게 두 로인한테 무릎을 꿇더니 “제가 집안의 유일한 아들이자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큰 손주로서 꼭 해야 할 의무가 있어 이렇게 밤중에 찾아왔습니다. 20여년 전 아버지가 엄마한테 폭력을 휘둘러 외할머니 외할아버지한테 그렇게 깊은 상처를 준 일에 대해 아버지가 두분한테 꼭 사과하겠다고 합니다.”하며 종래로 본 적 없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는 것이였다.

남편과 아들애는 사전에 미리 이야기가 오간 것 같았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 내밀 듯 난데없는 아들애의 말에 우리 모두가 어쩡쩡해있는데 남편이 장인, 장모 앞에 무릎을 털썩 꿇는 것이였다.

“어머니, 아버지. 20년 전 제가 나이도 어리고 성격도 우락부락하여 련옥이한테 몹쓸 짓을 한 것에 대해 사과합니다. 두분한테 그렇게 큰 상처로 남아있을 줄을 제가 생각지 못했습니다. 이제라도 그 노여움을 푸시고 저를 용서하시고 마지막 남은 인생 하루라도 마음 편하게 행복하게 사십시오!”

남편은 머리를 땅에 닿게 깊숙이 숙이고 사과했다.

남편의 뜻밖의 행동에 아버지는 어쩔바를 몰라하며 “다 지나간 일이요. 일어나오…”하며 남편의 몸을 일으키려 하였다. 엄마는 그러는 아버지를 흘겨보면서 밀막았다.

“사위가 오늘 이렇게 나오니 내 몇십년 가슴에 품고 있었던 얘기를 해야겠소. 사위도 자식 키우는 사람으로서 그렇게 애지중지 키운 자기 자식이 남한테서 매를 맞는다면 그 심정 어떻겠소? 그것도 함께 잘살라고 믿고 맡긴 사위한테 말이요. 우리는 그 일이 있은 후 딸이 불쌍해 매일 얼마나 속을 태웠는지 모르오. 그러면서도 리혼하겠다니 현빈이를 생각해서 극구 말렸지… 그 후 웃음기 하나 없는 딸의 얼굴을 볼 때마다 우리는 속으로 눈물을 떨구면서 우리가 딸을 불구뎅이에 밀어넣은 건 아닌지 하면서 자신을 저주했지… 지금은 현빈이가 이렇게 우수하게 성장해줘서 우리한테는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모르겠소. 우리 현빈이가 앞으로 자네와 같은 길을 걸을가 봐 애한테 지난 일을 얘기했는데 현빈이가 자네를 설복하여 우리한테 사과할 줄은 몰랐구려…”

이야기를 끝낸 어머니는 머리를 땅에 박고 엎드려 용서를 구하는 사위의 어깨를 사정없이 내리치는 것이였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주먹이 내리칠 때마다 엄마, 아빠의 20여년간 쌓였던 그 깊은 원한이 부서지고 와그르르 무너져 연기처럼 사라져버렸으면 하는 바람 뿐이였다. 그러면 나도 부모님에 대한 미안함과 죄송함을 훌훌 털어버리고 남은 인생에는 효도만 하며 행복하게 살 것만 같았다.

이틀 후 남편은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였다. 공항으로 배웅하는 차에서 우리는 서로 말이 없이 흘러나오는 음악을 자기 기분에 맞춰 감상하고 있었다. 서로 마음이 홀가분해진 우리 사이, 침묵을 깨고 남편이 입을 열였다.

“당신 그동안 참 수고 많았소. 현빈이를 저렇게 훌륭하게 키워줘 감사하다는 말밖에 할 게 없구만. 당신은 우리 김씨 가문의 일등 공신이요.”

20여년 만에 처음으로 나는 남편한테서 이렇게 진지한 감사의 인사를 받아보았다.

공항에 도착하니 아들애와 며느리가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떠나는 아버지를 아들애는 힘있게 끌어안으며 “아버지, 너무 힘들게 일하지 말고 건강을 챙겨가며 일하세요. 언제든지 힘들면 중국으로 들어오십시오. 이렇게 든든한 아들이 있는데 무엇이 걱정입니까?”하는 것이였다. 어느새 눈가에 물기를 머금은 남편이 “알았다. 아빠가 항상 너한테 미안하구나… 앞으로는 더 노력하여 너한테 당당하고 자랑스러운 아빠가 되고싶구나!”하며 아들애의 어깨를 으스러지게 잡아안는 것이였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늘 떨어져있던 부자간이지만 지금 이 순간 정말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리별의 진풍경이였다.

남편을 바래고 밖에 나오니 구름 한점 없는 파란 하늘에서는 윙 소란한 소리와 함께 비행기가 한줄기의 흰선을 남기고 저 멀리 사라졌다. 내 마음속에 20년간 쌓이고 짓눌렸던 번뇌와 고민도 저 멀리 사라져버린 비행기와 함께 사라져버린 것처럼 마음은 홀가분하면서도 상쾌하기 그지 없었다. 나는 명랑한 기분으로 차의 발동을 걸었다. 머리속에는 엊저녁 남편이 한 말이 귀에서 울려퍼지고 있었다.

“현빈이도 가정을 이루었으니 우리도 인제 우리 인생 살아가야 할 것 같구만… 당신이 나를 만나 그동안 참 고생 많이 했소. 우리 이젠 이 유명무실한 혼인관계 결속 짓기오. 당신만 원한다면…”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쳐왔던 나는 남은 인생은 오직 나만을 위해 열심히 살리라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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