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자랑을 하자는 건 아니고 솔직히 말해서 나는 자녀들 교육, 신칙을 한시도 등한히 하지 않는다. 천하의 자식 가진 부모는 다 그럴 것이다.
부정부패를 호되게 족치면서 륙속 부패분자들을 잡아내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인민들은 통쾌해서 갈채를 보낸다. 나도 물론 그중의 하나이다. 통쾌하기 그지 없다. 호랑이든 파리든 몽땅 잡아내라! 억세게 척결하라!… 인민들은 당을 응원한다.
그러면서 또 다른 한면으로는 그들의 친인들을 생각하게 되는데 그럴 때면 착잡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무고한(관련이 없는) 그들, 친인들의 심정이 어떨가… 모르긴 해도 아마 감고신염산 오미가 다 괴여오를 것이다… 잘나갈 때는 가문의 영광이고 자랑이고 행복이였겠지만 계하수가 된 지금은 그야말로 개꼴망신이고 패가망신 랑패이다. 총적으로 슬프고 유감스럽고 아쉽고 불쌍하고… 대개 그럴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가긍스럽다. 아글타글 자식을 키워 나중에 저런 신세가 된다면 얼마나 비참한 노릇인가?
옳은 말은 듣지 않고 시키는 일은 바로 하지 않고 량심을 버리고 못된 짓거리만 하여 죄진 놈은 이제 법이 알아서 처리하겠지만 그 친인들에게 생각이 미치면 나의 마음은 저도 모르게 무거워진다. 그것은 나의 자녀들도 부정부패 앞에 완전 로출이 되여있기 때문이다.
나의 아들과 며느리는 외지에서 꽤 높은 령도간부로 있고 큰딸과 사위 역시 직장내에서 일정한 직책을 맡고 있다. 막내딸은 병원의 신경내과 주임이고 막내 사위는 주둔부대 퇀급 간부이다. 나는 아들네와 큰딸네는 대체로 믿음을 갖고 있다. 아들과 큰딸은 어릴 적부터 정직하게 성장했고 지금까지 정직하게 사업하며 발전하여왔다. 며느리와 사위도 원칙을 알며 견지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온당하게 나가고 있다. 당은 간부를 엄하게 관리하며 여러가지 규정, 학습과 활동, 조사와 고찰을 수시로 하는데, 그들은 말썽을 듣는 일이 없었고 모범당원, 선진간부로 번번이 당선되였다.
내가 늘 조마조마하고 시름을 놓지 못하는 애물단지는 막내딸이다. 어릴 때부터 오냐오냐하며 응석받이로 키웠더니 멋이나 따고 련애나 하고 공부는 건성건성, 자존심과 주대와 고집이 잔뜩 자라 어벌짝이 커졌다. 사위녀석도 어슷비슷하다. 집에서 귀염둥이 보배둥이로 자랐고 어린 나이에 진급이 빨랐다. 이 점이 나는 늘 탐탁치 못했다. 막내딸네는 뜨르르 잘 산다. 한번은 내 앞에서 ‘부정수입물’을 자랑하기에 따끔하게 교육했으나 입을 버린 것 같지 않았다. 나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아들과 큰딸에게 상황을 말해주고 협력을 지시하였다. 그렇게 한 시기 지내보니 막내딸 부부에게 확실한 개변이 있는 것 같았다. 물품류는 사절하거나 값을 쳐서 되돌려주고 ‘훙보’는 거절하고 받았던 건 돌려주고… 개변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태평가에 노들강변코노래를 부르며 공원을 흐느적거릴 수는 없었다. 추울세라 더울세라… 넘어지랴 떨어지랴… 항상 자식들을 념려하게 된다. 당이 당원과 간부를 사랑하고 관심하고 념려하는 그 심정과 똑같은 부모의 마음이다. 고민 끝에 나는 한가지 조치를 연구해내였다.
내가 보건대 사람의 됨됨이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량심에 있다.
세상은 광천수통 같이 말쑥하지만 않다. 같은 세상, 같은 벼슬길에서 누구는 락마하고 누구는 활개치며 발전한다. 왜서일가? 열가지 백가지 원인이 있지만 결국에는 그 량심 하나에 달린 것이다. 나는 자식들이 똑바른 량심, 명석한 량심을 소유하면 만사대길일거라고 생각을 했다. 자식들이 우수한 량심을 수립하는 데는 여러 면의 요소가 역할을 발휘할 것이다. 그중에서 ‘부모의 부탁’도 큰 작용이 있을 것이다. 락마한 관원들의 참회록을 보면 모두가 “당에 미안하고 부모에게 미안하다.”고 하였는데, 그들이 가장 후회하는 것인즉 당과 부모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다. 나는 ‘부모의 부탁’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금년 설을 우리는 북경에 있는 아들집에서 쇠기로 결정했다. 세집 큰사돈님들도 동참하기로 했다. 나는 그 기회에 육필로 된 <부모의 부탁>을 자식들에게 선물로 줄 작정이다.
나의 <부모의 부탁>은 다음과 같이 되여있다.
“… 나의 아버지는 일자무식의 농사군이였지만 원근에 ‘법이 없어도 살 사람’이라고 소문이 났다. 너들도 기억에 있겠지만 지난 세기 80년대 초반까지 우리 집은 힘들게 살았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그때까지 우리집은 ‘먹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지. 그것은 아버지 어머니의 수입이 낮은 데다 너희들 삼남매가 한창 자라며 소비만 할 때고 할아버지 할머니는 밥보다 약을 더 잡숴야 할 상황이고… 살림이 참으로 힘들었다. 나는 17살에 중등전문학교로 갈 때까지(경제난으로 고중은 갈 수 없었다.) 팬티란 걸 몰랐고 운동화를 한컬레도 만져보지 못했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맨발이고 겨울에는 짚신감발이였다. 우리 집이 가난하게 산 원인은 집체분배수입이 상대적으로 낮고 어머니가 지병으로 앓았기 때문이다. 중등전문학교에 다닐 때 나는 봄부터 가을까지는 맨발이여도 별문제였으나 체면 때문에 좀 큰 운동화를 제일 싸구려를 사서 아껴 신고 기워 신고 한컬레로 3년을, 졸업까지 신었다. 악착스레 추웠던 그때 겨울에는 손, 발, 귀까지 얼었다. 1학년 초겨울 반주임과 동학들의 관심으로 나는 반따이(솜외투)를 입게 되였는데 그것이 밤이면 포대기에 겹덮혀 나를 행복하게 하였다… 학교에서는 3년을 계속 한해에 한번씩 나에게 1등 조학금 5원을 주었다. 나는 방학, 개학 때면 집과 학교 사이 160여리의 산길을 걸어다녔다. 그중에서 130여리는 무서운 무인산중이였다. 어둑새벽에 떠나서 밤중이면 목적지에 도착했다. 1학년 첫 방학 때 역전에 가서 석탄 부리우는 일을 하자고 하니 너무 어리고 약하다고 일을 시켜주지 않았다. 나는 여름방학이면 산에 가서 버섯, 약초부업을 하고 겨울방학이면 싸리, 든장대부업을 해서 어머니 병치료에 썼다. 나의 필기장은 몽땅 마분지였고 쓰는 것은 줄곧 연필이였다. 몽당연필이 되면 38보총탄알깍지에 꽂아 썼는데 연필이 콩알만 해서 더 어쩔 수 없을 때까지 썼다. 맨물세수, 빈 치솔질을 했다. 이렇게 아끼고 아낀 조학금을 어머니 병치료로 드렸다. 나는 당과 인민의 신세로, 선생님과 동창들의 관심으로 150여명 졸업생에서 특등모범생으로 중등전문학교를 원만히 졸업하였다. 그리고 졸업하는 해 성 모범공청단원의 영예를 받아안았다.
나의 아버지는 말 그대로 뼈빠지게, 앓지도 못하고 소보다 더 부지런히 일하였다. 농한기인 겨울목재부업 벌목공모집이 생산대에 떨어지면 명액이 2, 3명씩 내려왔다. 위험하고 힘들고 고생스럽지만 벌이는 안되기에 가려는 사람이 없어서 아버지는 해마다 혼자서 그 험한 곳으로 갔다. 겨울철, 일년 농사로 지친 농민들이 뜨끈뜨끈한 구들에서 가마니깨나 치며 편안히 휴식할 때 아버지는 설한풍이 울부짖고 무릎까지 빠지는 눈 속 산판에서, 소도 힘겨워 헐떡이는 아름드리 목재 채벌을 4, 5개월씩 하였다. 또다시 일년 농사가 시작되면 아버지는 닭곰 한마리 잡숫지도 못하고 또 농사일에 달라붙었다. 여름철 농한기에는 버섯, 약초를 캐기도 하고 슬슬 일년화목도 하는데, 아버지는 다그쳐 땔나무를 하고는 떼목 타러 갔다. 그것도 정부에서 민부를 모집해서 하는 생산대의 부업이였다. 몇달 떼목타기를 하고 오면 또 부지깽이도 뛰는 가을철이 되였다.
생산대수입분배는 한공에 2, 30전, 어거리대풍이 들면 7, 80전이 될 때도 있었는데 그런 때가 우리 생산대에서는 서너번인가 있었던 것 같다. 어느 때 내가 손꼽아 헤여보니 나의 아버지가 8급 기술자 수준으로 할 줄 아는 일이 무려 28가지나 되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출세’하지 못하고 심심산골 벽촌에서 농사일을 한평생 하였다. 아버지는 고향과 공산당이 준 땅을 너무도 고마워했고 집체화에 충실했고 사리를 추구하지 않았다. 우리 그 고장은 장마당이란 말도 모르는 산골인 데다가 사실은 장을 볼 사람도 우리 집에는 없었다. 이렇다 보니 우리 집은 참으로 구차했다.
첫머리에 말했지만 나의 아버지는 ‘법이 없어도 살 사람’이였다.
어느 날 뒤집 암탉이 우리 집 뒤울안 벼짚단무지에 알을 낳았는데 아버지가 마침 발견하고 세여보니 닭알이 여섯개나 있지 않은가! 아버지는 닭알을 바가지에 담아 나더러 뒤집에 가져가게 하였다.
어느 해 우리도 어쩌다가 돼지를 중돼지 남짓하게 키웠는데 어머니가 또 몹시 앓아서 더 키우지 못하고 팔게 되였다. 아버지는 공소사에 가서 중돼지 남짓해도 수매하겠냐고, 병치료 때문에 팔려고 한다고 하였다. 공소사 주임은 크게 마음을 써서 가져오라고 하였다. 그사이 나는 무게가 더 나가라고 남들처럼 돼지죽을 있는 대로 다 퍼주었는데 돼지는 실컷 먹고 구유에 남기기까지 하였다. 아버지는 이 상황을 보고 나를 호되게 책망하셨다. 량심없이 이게 무슨 짓이냐고, 생각해서 받겠다는데 돼지죽을 팔겠는가고 하며 아버지는 몹시 화를 내셨다. 그날 아버지는 나에게 “량심을 속이며 나쁜짓을 하면 어느 때든 꼭 그 벌을 받게 된다고, 사람이란 량심을 지킬 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아버지는 구유의 돼지죽을 말끔히 퍼던지고 오후 보리저녁 때가 다 되여서야 배가 홀쭉해진 돼지를 싣고 공소사로 갔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고지식하다고 욕하면서 돼지를 팔지 말라고 하였으나 아버지는 듣는 체도 하지 않았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 곁에 우두커니 앉아서 아무말도 못했다.
목재판 부업, 떼목타기 부업에서 돌아오면 아버지는 눈보라 혹은 몸살로 일하지 못한 날들을 적어서 생산대 대장에게 주었다. 그날의 공수는 받을 수 없다는 량심이였다. 대장은 너무도 기가 막혀 사람들과 여러번 외우며 감탄했다.
로년에 마을사람들은 아들 며느리가 모시자고 할 때 어서 가라고 권고했으나 아버지는 그저 놀면서 어떻게 생산대 민식을 타 먹겠냐고 하면서 한해 두해 합가를 미루었다. 지난세기 70년대말 생산대에서는 대담하게 부업으로 참외와 수박농사를 하였다. 아버지의 재배기술을 믿고 벌인 종목이였다. 아버지 기술에 천시와 지리가 맞아서 그해 원두는 잘 되였다. 아버지와 다른 한 로인이 원두막을 보았는데 또 기막힌 일이 생길줄이야! 그것은 아버지가 그간 두분이 잡순 원두명세서를 생산대에 바친 것이다. 대장과 회계는 너무도 어이가 없어서 한동안 어안이 벙벙해있다가 급기야 한바탕 웃어제꼈던 것이다.”
나는 아버지의 유산을 항상 명기하며 똑바른 량심, 명석한 량심으로 오늘까지 살아왔다. 긴 세월 나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직접적, 간접적인 체험을 통하여 여러번 감격하며 더욱 더 가슴속에 아로 새기게 되였다.
나는 평생 몸담근 병원이라는 직장에서 항상 환자의 주머니사정을 생각해주면서 수입지표를 초과하면 차례지는 장금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착실히 치료사업에만 몰두하였다. 하여 병원에서 부정부패와 탐오집단을 적발, 사출할 때도 나는 흔들림 없이 떳떳했고, 나의 똑바른 량심으로 인해 시와 성의 모범당원, 로동모범의 영예를 안아왔고 서기 겸 원장이라는 직책까지 담당하게 되였다. 내가 이러한 발전을 하게 된 것은 당의 교시를 명심하고 정, 반면 학습을 중시하며 아버지가 준 정신적 유산을 명기하였기 때문이다.
나의 아버지는 나에게 물질유산은 한푼도 남긴 것이 없다. 그러나 귀중한 정신유산을 남겨주었다. 그것은 ‘사람이란 꼭 자기의 량심을 지킬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와 아버지는 평범한 백성이다. 앞에서 한 이야기는 평범한 이야기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왔고, 또 누구나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간단하고 쉬운 소행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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