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년간 여러 농촌학교를 오가며 400명이 넘는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중에 학업을 중도에 포기한 학생은 한명도 없었다. 어떤 학생은 의사로 누군가는 공정사로 되였다. 향촌교원으로 30여년을 지낸 것에 한치의 후회도 없다."
“내가 가르쳤던 반들은 학생이 많을 때는 몇십명, 적을 때는 1명 뿐이였다. 촌에 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한명 뿐이여도 국가에서는 학교를 계속 운영하도록 했다. 국가의 교육정책이 이렇게 좋은데 인민교원인 내가 인재를 양성하는 일에 소홀할 리유가 없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즐거운 하교길 (돈화시교육국 사진 제공).
6일,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돈화시 따푸차이허진 송강하소학교 곽계하 교원은 아침 일찍 학교에 도착해 환한 얼굴로 등교하는 학생들을 맞아주었다. 38년간 이어졌던 그녀의 향촌교육사업, 세월이 흘러 그녀의 머리엔 어느새 하얀 서리가 내려앉았다.
38년간 오르내린 산길 거리가 30여만킬로메터, 억지로 몸을 우겨넣던 농촌의 만원뻐스, 배를 타고 건넜던 홍수로 부풀어오른 강… 30여년간 그녀를 당황케 했던 간고한 환경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수업에 늦을세라 재촉했던 그녀의 발걸음은 언제 한번 멈춘 적이 없었다. 오직 시골 아이들이 산에서 벗어나 더 큰 무대에서 꿈을 펼치게 하려는 마음으로 그녀는 청춘과 열정, 나아가 일생의 전부를 향촌교육사업에 부어넣었다.
강의중인 곽계하 교원.
줄곧 교육사업을 동경해왔던 곽계하는 18살이 되던 1986년에 고향인 돈화시 따푸차이허진 요전자촌에서 소학교 교원으로 되였다. 당시 영광스러운 인민교원으로 되였다는 기쁨에 젖어 꿈에서마저 교편을 잡고 강의를 했었다는 그녀는 반드시 교원의 직책과 사명을 다해 국가를 위해 훌륭한 인재들을 양성하리라 다짐했었다.
1989년, 그녀는 상급의 배치에 따라 따푸차이허진 서쪽 끝에 위치한 황니허소학교로 전근하게 되였다. 20여리의 길을 헤치고 도착한 그곳에는 허름한 초가집 두칸에 나무 걸상과 책상 몇개만 놓여있었다. 그것이 그녀가 수업과 생활을 하는 전부의 자원이였다고 한다. 막막하기도 하고 앞날이 걱정되기도 했지만 마냥 손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들고 간 구들판을 오리고 먹칠을 해 암산카드를 만드는 등 직접 필요한 도구를 만들면서 부족한 부분들을 하나씩 채워나갔다. 또 당시 대부분의 부모들이 온종일 밭에서 일하느라 아이들을 돌볼 겨를이 없었는데 그녀는 부모의 역할도 자처하면서 아이들을 돌봐주었다. 하여 그의 숙소는 아이들의 두번째 집으로 되였다. 그 후 농촌 학교들이 부단히 페교, 통합되면서 그녀의 전근 로정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황니허촌에서 류수촌에로, 류수촌에서 랑재촌에로, 랑재촌에서 요차촌으로… 20여년간 그는 따푸차이허진 9개 촌의 소학교를 돌며 학생들을 가르치는 임무를 참답게 수행했다.
2008년, 곽계하는 따푸차이허진중심소학교의 한 ‘문제학급’의 담임직을 맡게 되였다. 당시 학교에서는 그의 풍부한 교육경험을 감안해 그에게 이 학급을 맡기게 되였는데 곽계하는 향촌교원의 뚝심으로 꼭 이 아이들을 감화시켜 성적을 끌어올리리라 결심했다. 모든 일에서 앞장서 솔선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아이들과 친절하게 담화하면서 그들의 속마음을 료해하고 직접 학생들의 집을 방문해 학부모와 교류하면서 진심으로 아이들의 학습과 생활을 관심했다. 또 과외시간을 활용해 아이들과 롱구운동을 함께 하면서 아이들의 마음을 하나로 단합시키고 학습, 활동에 대한 아이들의 적극성을 불러일으켰다. 그녀의 지도하에 이 학급은 일년 만에 ‘문제학급’에서 ‘연변주 붉은기 중대’로 변신했고 학생들의 성적도 큰 진보를 가져와 학교와 학부모들의 찬사를 자아냈다.
2018년, 10년 동안 진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던 곽계하는 다시금 농촌소학교로 발걸음을 돌리게 되였다. 당시 송강하소학교에 교원이 부족해 인력지원을 바란다는 요청에 그녀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농촌행을 택했다. 송강하소학교의 한 학급 담임이자 학교 전체의 책임자였던 그녀는 학생들을 참답게 가르치는외에 청년교원 양성에도 심혈을 기울여왔다. 새내기 교원들을 데리고 교수안 작성에서부터 수업요령, 학생들과의 교류, 학부모들과의 교류까지 하나하나 차근차근 가르쳤다. 그녀의 지도하에 청년교원은 현재 여러 수업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등 크게 성장한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그녀의 격려하에 향촌의 교육사업을 위해 기여하려는 마음을 굳히게 되였다고 한다.
“30여년간 여러 농촌학교들을 오가며 400명이 넘는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중에 학업을 중도에 포기한 학생은 한명도 없었다. 어떤 학생은 의사로 되여 환자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누군가는 공정사로 되여 멋진 건물을 올리고 있다. 향촌교원으로 30여년을 지낸 것에 한치의 후회도 없다.” 이는 한평생 향촌교육을 위해 헌신한 곽계하에게 있어서 가장 자랑스럽고 뿌듯한 일이다.
아이들이 지식으로 운명을 바꾸고 사회에 유용한 인재로 자라나며 누군가가 그녀의 계주봉을 이어받아 향촌교육사업에 끊임없이 활력을 주입했으면 하는 것이 가장 큰 바람이라는 그녀는 퇴직 후에도 움직일 수 있는 한 꾸준히 향촌교육을 위해 봉사할 것이라고 향후 타산을 내비쳤다.
전해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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