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년 세월 필밭을 경운해오면서 때로 필을 팽개치고 싶도록 쓰고 싶지 않은 소재나 쟝르가 있었다. 소설, 시, 수필, 평론, 아동문학, 뮤지컬, 지어 가사까지… 문학의 거의 모든 쟝르를 섭렵해온 나였지만 자유분방하던 필을 문칫거리게 만들고 멈추게 만드는 쟝르가 있었으니 바로 추모문이다.
함께 해왔던 동인, 친구, 친지들의 떠남에 우두망찰 멈춘 필대 하지만 고인의 업적에 대한 정평과 추모의 정에 못이겨 다시 들어야 하는 필대는 돌이라도 달아맨 듯 무거웁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적지 않은 추모문들을 써온 것 같다. 이 문단의 주추를 놓았던 원로, 도탑게 지내왔던 문우 그리고 살밭은 친지의 떠남을 슬퍼하며 눈물을 쟁인 필대로 추억을 반추했고 그렇게 쓴 추모문이 적이 십여편이 된다는 데서 스스로 놀란 적도 있다.
지난해에만도 우리 문단은 소설가, 평론가, 영화감독을 눈물로 보냈다. 그리고 년초 ‘멜로의 대가’ 경요에 대한 절절한 추모문을 쓴 지도 어제 같은데 오늘 다시 편집가이며 소설가인 조성희 선생을 위한 필을 무겁게 들게 되였다.
넓은 오지랖일지는 모르지만 내가 구태여 조성희 선생에 대해 필을 들게 된 것은 나의 문학에 대한 치기와 열망이 하늘로 치솟았던 문학도 시절은 조성희 선생과의 만남으로부터 시작되였기 때문이다.
***
열아홉살 나던 해 나는 《천지》(연변문학의 전신) 잡지사에서 꾸리는 문학강습반에 참가하여 높게만 보이던 문학의 솟을 대문을 조심스럽게 노크하기 시작했다.
그때는 그야말로 문학의 전성시대였다. 잡지사의 회의실도 이루다 용납하지 못하여 강습반의 문학도들은 연변대학의 계단교실을 빌어 기라성 같은 유명작가들로부터 문학에 대한 진수를 전수받았는데 문학강의를 들으러 온 문학도들이 무려 200여명도 더 되였다.
한달여 만에 강습반을 종강하면서 우수학원 몇명을 뽑았는데 한해 사이에 <노아의 방주> 등 소설작품 세편을 발표한 나도 우수학원으로 선정되였다. 잡지의 안표지에 애된 얼굴도 올렸고 상패와 석고로 주조해 만든 로신의 흉상을 받아안았다. 그 후 평생을 롤모델로 모셔온 대문호의 흉상을 나는 서가의 맨 우에 오래도록 놓아두었다.
그날 종강식에서 젊은 편집 조성희 선생을 처음 만나 보았다. 단발에 미색의 코트를 입은 선생에게서는 문학종사자로서의 세련된 음률이 일신에 풍겼다.
“벌써 소설 세편이라니, 좋은 글재주를 가졌네. 참 대단해요!”
처음으로 잡지사 편집에게서 받아본 격려의 칭찬에 나는 어마지두 얼굴을 붉혔다. 한편 온 세상을 다 가진 듯한 버겁게 기쁜 심경이였다.
그 이듬해 나는 글재주를 인정받고 파격적으로 스무살의 나이에 길림신문사의 편집, 기자로 입사하였다. 연길로 이사를 한 뒤, 스물여덟개의 사과배 광주리에 넘쳐나게 담아온 여태 소장한 책으로 나는 연길시 동쪽에 헌책방을 차렸다.
‘쉑스피어 고서점’이라는 우미한 명칭의 그 헌책방으로 어느 일요일 귀한 손님들이 찾아왔다. 조성희 선생과 당시 소설창작조 조장을 맡고 있던 김창석 선생 그리고 여러 편집선생들이였다. 내가 일껏 차린 책방을 둘러봤고 소박한 음식상에 둘러앉아 맥주잔 기울이고 주흥에 겨워 서로 손벽 치며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문학이라는 명제 하나로 흥그러워진 분위기의 나날들을 나는 이순을 맞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창작에서 자신만의 령역과 쇄신을 꿈꾸었던 나는 소설과 시를 펴내는 한편 새로운 쟝르와 문체의 작품들을 련줄로 펴냈다. 과학환상소설을 몇편 써서 련작을 하려 했다. 하지만 이 쟝르는 치벽한 우리 문단에서 내내 소외되고 있는 부문이였다. 겨우 《북두성》 잡지에 로봇인간을 주제로 한 <가면밀회>라는 과학환상단편을 발표했는데 얼마 후 잡지가 덜컥 페간되고 말았다. 련작을 꿈꾸며 써놓은 작품이 몇편 더 있었다. 일루의 희망으로 조성희 편집에게 작품을 보냈고 전화로 간청하기까지 했는데 얼마 후 작품이 채용되였다는 통지를 받았다.
“과학환상 쟝르라, 이 쟝르가 쉽지 않았겠는데 젊은 사유답게 잘 써냈구만.”
그렇게 물부족에 시달리는 미래의 위기에 대해 말한 나의 또 한편의 과학환상소설 <기묘한 순환>이 1990년경 《천지》 잡지에 발표되였다.
조성희 선생의 부군 조득현 옹은 조선족무용의 주추돌을 놓고 서까래를 올린 유명한 ‘시대의 춤군’이였다. 나는 그이가 집필한 조선족무용 체계에 관한 책자에 대한 신간에 대한 소개도 했었다. 그가 만든 대형 군무 <농악무>가 중앙급 상을 수상했을 때 나는 조성희 선생의 주선으로 그의 자택을 찾아 취재를 했었다. 원로 예술인의 자택 응접실에서 우리는 조선족문화에 대한 담소를 이어갔다. 그렇게 내가 쓴 인물통신 <오래된 젊음의 춤사위>가 자치주 창립 기념 인물부문 상을 수상했고 그 소식을 듣고 조득현 옹은 물론 조성희 선생은 몹시 기뻐했다.
1993년 나는 《장백산》 문학상 수상차 장춘행을 했다. 그때 나는 시로, 조성희 선생은 소설로 수상을 했다. 그리고 원로작가 조성일 선생은 평론으로서 수상했다. 시상식을 마친 뒤의 늦은 밤, 우리는 영예의 트로피를 안고 귀향렬차에 올랐다. 당시 장도선 렬차에는 ‘두만강’호라는 우미한 명칭이 붙어있었고 려객들이 지루한 려로의 피로를 풀고 문화생활을 누리게 하기 위한 서비스의 차원으로 차바곤 하나를 털어 노래방이 개설되여있었다. 조성일 평론가는 “오랜만에 받는 상일세. 이 늙은이에게도 상을 내주니 참 기쁘이” 하면서 손탁 크게 상금중에서 수백원을 잘라 렬차의 노래방을 통채로 도맡았다.
그날 밤 시상식의 주인공이였던 우리는 함께 동행한 작가협회 임직원들, 편집, 기자, 독자들과 밤이 새도록 덕담을 나누고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며 그야말로 축제의 한장을 펼쳤다. 동트는 아침을 향해 밤의 벌판을 관통하는 기차, 기차의 가락 맞는 동음 속에 하모니로 어우러진 노래소리, 간간이 들려오는 힘찬 기적소리… 그것은 정녕 ‘문학호’ 렬차에로의 동승이였고 열기로 가득한 문학축제의 밤이였다.
어쩌면 그번 나의 수상작의 제목은 <밤차>였다.
내게는
대중 없이 타고 싶은
밤차가 있다
성에꽃 수놓은 창가에서
겨울의 구도를 해명하며
몽롱한 리듬에 실려
어디론가 가고 싶은
밤차가 있다
낯모를 이쁜 녀와
늙수그레한 할배와
따슨 화제로 언 마음 무마하며
어우러져 가고 싶은
밤차가 있다
이제 이 시를 읊을 때면 은연중 고인이 돼버린 소설가와 평론가를 그리게 될 터이니… 이런 상념이 갈마들며 저도 모르게 마음이 울컥해지고 눈시울이 붉어진다.
***
나의 두번째 장편소설의 출산도 조성희 편집의 로고와 끈끈한 동아줄로 련결되여있다.
내 생애의 첫번째 장편소설 <마마꽃 응달에 피다>의 련재를 마친 뒤 두달도 못되여 나는 새로운 장편 <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의 련재를 시작했다. 《연변문학》지에 2003년 10월호부터 2005년 2월호까지, 16회에 거쳐 련재를 마쳤다.
두번째 장편 <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 이후로 도합 여덟부의 장편소설을 발표, 출간했고 그외에도 20부의 여러 쟝르의 책자들을 출간했지만 이 작품은 또한 내 인생이 송두리채 뽑히던 그 절실했던 시기에 창작한 작품이여 각별히 사랑이 가고, 화인처럼 기억에 남는 작품이다.
작품은 기성작품이 아니고 한편 쓰면서 한편 련재하는 형태로 창작되였다. 그런데 겨우 4회째 련재하고 내 신상에 거대한 변고가 일었다. 나는 두수 없는 사건에 일방적으로 말려들어 수십년간의 공직을 일조일석에 떼우고 처연히 한지에 쫓겨나게 되였다. 온 세상이 들고 일어나 나에게 돌을 던지는 형국에 문인가정으로서는 천문수자 같은 엄청난 액수의 금액을 꾸어서 부과해야 했다.
그런 사면초가에서도 련재는 이어나가야 했다. 이를 옥물고 등짝이 으깨질 듯한 거대한 압력을 이겨내며 썼다. 안해와 함께 여기저기 찾아가 하소하면서 돈을 꾸어들고 돌아와서, 저녁도 거른 채 2만여자를 치고 윤색하고 나니 동이 번히 밝아오던 그때가 생각난다. 어떻게 그 형국에 컴퓨터 앞에 앉을 수 있었고 또 두드려댈 수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 와중에 이 작품의 주요편집이였던 조성희 선생의 로고가 컸다. 번마다 투고가 늦어졌고 세상이 번거로워 전화를 끊어버린 나에게 메일로 기마다 간절한 청탁을 했다. 아울러 작품이 마무리되기 까지 수십통의 메일편지에서 위안과 격려의 말을 내내 잊지 않았다. (후문이지만 조성희 선생은 나 때문에 잡지의 출간에 영향을 받고 편집부 상벌제도에 따라 벌금까지 했다고 한다.) 그의 따뜻한 위무가 없었더라면 나는 아마 이 글을 이어나가지 못했을런지도 모른다.
련재의 마지막회를 바치고, 조성희 편집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전화 속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왜 신애(소설 속 주인공의 이름)를 죽였소?”
주인공의 불운한 운명을 설계한 나에게 선생은 유감을 표했고 작중인물의 불운한 인물에 대해 애석해마지 않아했다. 한편 “문단에서 볼 수 없었던 신선한 비극미로 작품을 승화시켰다.”고 작품에 대한 긍정을 주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인생에서 가장 곤고했던 시간을 16회 44만자에 달하는 작품의 처절한 글쓰기로 메워나갔다. 어쩌면 당시 련재 잇기는 내 삶 잇기의 그 자체가 아니였는지도 모른다.
***
조성희 선생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2018년 바로 《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의 출간기념회였다. 선생이 와병중이라는 소문을 들었는데 친히 출간기념회 장소에 까지 찾아온 것이였다. 나는 맨 첫 사람으로 《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의 편집에게 책을 싸인해드렸다.
“10여년 만에 드디여 책도 사람도 빛을 보는 구만.”
선생은 자기 일처럼 기뻐하면서 솔찮은 아픈 몸으로 출간기념회가 끝나는 마지막까지 앉아서 축하해주었다.
조성희 편집은 소설편집, 부총편집을 력임하면서 30여년 동안 붙박이로 민족문학지의 파수군의 역할을 충실하게 해왔다. 또한 문학지의 편집들이 자신의 창작을 등한시하는 이 문단의 형국을 깨고 당신은 소설가의 반렬에 올라 중편소설 <빛의 피안>, <시간려행> 등 다량의 소설들을 발표하였고 소설집 《파애》를 출간하기도 하였다. 이로써 《도라지》 문학상, 《장백산》 모드모아 문학상, 김학철 문학상, 연변조선족자치주 장백산문예상 등 상들을 수상하는 편집과 작가의 삶을 이어왔다.
문학편집의 작업은 그저 단조로운 피스톤식의 교정이나 윤색의 반복이 아니다. 그들은 작품 전채에 대한 깊이 있는 장악이나 해독을 거쳐 그리고 작가와의 공동의 작업으로 더 질 높은 작품을 탁마해 만들면서 이 문단을 수놓고 살찌워간다.
그들은 작가들의 살밭은 지음이자 문자의 장인들이며 작품의 산파들이다.
문학의 위상이 바닥에 내쳐진 지도 수십년 전의 일인데 많은 편집들의 우리 문화의 파수군과도 같은 장인정신은 계속된다. 그중 대표적인 장인의 한 사람이 조성희 선생이라고 정평하고 싶다.
더우기 속찬시대, 정보화시대의 요즘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변혁기의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의식 앞에, 오리지날적인 열정과 힘으로 문학에 대한 열애와 추구를 보여준 조성희 선생과도 같은 전문인들의 빈자리는 오래도록 큰 아픔과 허전함을 줄 것이다.
다시금 문학의 성연을 펼치며 질주하던 그날의 밤차를 떠올려본다.
종착역에서
집 떠난 후조(候鳥)처럼
부리 붉게 울며 그려보는
밤차가 있다
낡은 고독과 헌 비애를 뒤로 뿌리며
풋풋한 인정의 그라프 그으며
창생의 순환곡처럼 오가며 타고 픈
밤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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