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렬들 휘뿌린 피의 기억 영원히 색바래지 않게
─연변혁명렬사릉원을 찾아서

2025-05-19 08:59:22

2025년은 중국인민항일전쟁 및 세계반파쑈전쟁이 승리한 지 80돐이 되는 해이다. 80년이 지나 력사의 포연은 이미 사라졌지만 항일전쟁 승리 정신은 영원히 남아있다. 항일전쟁 승리 정신은 애국주의의 숭고한 표현이며 중화민족의 소중한 재부로 우리가 새로운 력사시기에 자력갱생, 간고분투의 정신을 계속 발양하여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실현하기 위해 열심히 분투하도록 격려하고 있다. 중국인민항일전쟁 및 세계반파쑈전쟁 승리 80돐을 기념하고 애국주의 정신을 고양하고 항일전쟁정신을 고양하며 광범한 당원 간부와 군중들이 력사를 기억하고 선렬을 추모하며 평화를 소중히 여기고 미래를 개척하도록 교양, 인도하기 위해 본지는 ‘파란만장한 세월─중국인민항일전쟁 및 세계반파쑈전쟁 승리 80돐 기념’ 특집 면을 기획하고 계렬보도를 펼쳐내는 바이다.   ─편집자

연변혁명기념관.

연변혁명렬사릉원 언덕 아래로 멋진 고층건물과 잘 빠진 도로들이 내려다보인다. 문앞 언덕길은 신진 랜드마크로 부상하면서 찾아오는 관광객들로 북적거린다. 릉원 뒤편으로는 개성이 돋보이는 상가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번화한 미식거리가 펼쳐진다. 도시는 이렇게 더없이 평화롭고 활기찬 모습으로 인민의 행복과 민족의 해방을 위해 몸바쳐 싸운 렬사들의 넋을 기리고 있다.

4월 17일, 연변혁명렬사릉원 관리중심 기념관 관장 류계홍과 함께 릉원 곳곳을 참관하면서 항일전쟁시기의 파란만장한 력사와 렬사사적을 되새겨보았다.

학생들이 렬사기념비 앞에서 선렬들을 추모하고 있다.

1992년에 건설된 연변혁명렬사릉원은 혁명렬사기념비, 혁명기념관, 영렬벽, 렬사묘지 등 부분으로 구성되여있다. 혁명렬사기념비의 높이는 19.28메터에 달하는데 연변이 1928년부터 당의 령도하에 혁명의 길에 들어섰음을 상징한다고 한다. 기념비 량켠에 세워진 커다란 조각은 항일군민이 일본침략자들에 맞서 싸우는 장면과 여러 민족 인민이 적극적으로 전선에 지원하는 장면을 담아 연변인민의 불요불굴의 항일정신을 생동하게 보여주고 있다.

기념비 북쪽에 위치한 건물이 연변혁명기념관이다. 기념관은 총 9개 부분으로 나누어 각 시기의 혁명력사와 영웅사적들을 전시하고 있는데 이날은 특별히 항일전쟁시기의 혁명렬사 사적에 대해 집중적으로 알아보았다.

연변혁명기념관의 내부 모습.

길고 두꺼운 쇠칼에 섬뜩함을 느껴서였을가, 항일전쟁 전시구역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누렇게 녹쓴 작두가 눈에 들어왔다. 류관장이 이 작두는 적들이 중공왕청현위 서기 김상화(1900─1931)를 살해할 때 사용했던 작두라고 알려주었다. 1931년 2월 2일, 북하마탕 후하촌에 들이닥친 적들은 김상화를 포함한 80명의 청년을 체포했다. 적들은 김상화에게 온갖 악형을 가했지만 그는 시종 공산당원의 본색을 지키면서 당의 기밀을 고수했다. 2월 5일, 김상화는 적들의 고문에 대항하여 면도칼로 자기의 목을 베였다. 적들이 소식을 듣고 달려왔을 때 그는 이미 말을 할 수 없었고 속수무책인 적들은 작두로 그의 머리를 자르고 나무에 매달아 대중들에게 보여주는 잔인한 만행을 저질렀다. 후에 대중들은 김상화를 노래하는 <십진가>를 지었는데 그 노래는 오늘날까지 세세손손 전해지면서 후세의 사람들을 교양하고 있다.

연변혁명기념관의 내부 모습.

또 다른 벽면 한가운데는 하얀색 뜨개 침대보가 유리진렬장 안에 넓게 펼쳐져있었다. 다양한 무늬와 글자로 수놓아진 이 순백색의 침대보는 항일영웅 김정길(1910─1933)이 연길감옥에 수감되였을 때 한땀 한땀 떠낸 작품이라고 한다. 언뜻 보면 그저 평범한 침대보 같지만 그 속에는 족쇄 따위로는 절대 묶어둘 수 없었던 혁명에 대한 항일전사의 확고한 신념이 담겨져있었다. 음침하고 축축한 옥중에서 렬악한 환경보다 더 간고했던 것은 적들이 가하는 갖은 혹형이였지만 김정길은 시종 입을 굳게 다물고 당의 기밀을 지켜냈으며 옥중 벗들에게 적극적으로 혁명사상을 전파했다. 그는 면회를 온 친지에게 코바늘과 흰 목화실을 부탁해 침대보를 떠냈는데 여기에 자기의 리상을 새겨 넣어 주변 벗들을 고무했다. “연길현 제4감옥 김정길 신음고통지결품청 녀자해방세계의 고창”, 80송이의 모란꽃과 함께 새겨진 이 27자에는 민족해방과 혁명승리에 대한 그녀의 굳은 신심이 여실히 담겨져있다. 석방된 후 김정길은 1933년 겨울 삼도만에서 일본군 토벌대와 싸우다 영용히 희생되였다. 김정길 렬사는 23살에 짧은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리상과 신념을 담은 이 침대보는 홍색력사의 한페지로 남았다.

연변혁명기념관의 내부 모습.

항일력사 전시가 끝나는 즈음에 항일렬사사진전시벽이 있다. 그 시절의 간고한 생활과 치렬한 전투를 반영하듯 구김의 흔적으로 희미해진 사진과 목숨 바친 이 땅에 사진 한장 남기지 못해 붓으로 그려낸 초상화들… 가지런히 진렬된 렬사사진 가운데는 애된 얼굴의 소녀도 있었다. 가쯘한 단발머리를 한 맑은 눈동자의 녀자아이는 항일유격구의 ‘종달새’로 불리였던 김금녀(1922─1934) 렬사이다. 10살 때 일본군의 토벌로 가족 6명을 잃고 항일아동단에 참가한 김금녀는 어른들과 함께 투쟁에 적극 뛰여들었고 전쟁 최전방에서 위문공연을 했다. 그러다 1934년 왕청라자구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중 불행하게도 적들에게 체포되여 끌려갔다. 적들은 어린아이를 구슬려 항일부대의 상황을 알아내려고 갖은 수단을 들이댔지만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했다. “말하지 않으면 죽여버린다.”고 위협했지만 되려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혁명만세!”라는 답만 돌아왔을 뿐 어린 소녀는 총칼 앞에서 추호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화가 치밀어오른 적들은 결국 악랄한 수단으로 그녀를 살해했고 ‘종달새’ 소녀는 항일투쟁에 어린 목숨을 바쳤다. 사진 속의 김금녀 렬사는 영원히 12살에 머물러있지만 년령을 초월한 그의 혁명정신은 천추에 길이길이 빛나고 있다.

1만 6800여명 선렬의 이름이 새겨진 영렬벽.

유격대를 이끌고 많은 전투를 승리에로 이끌었던 동북항일련군 제4군 군장 리연평 렬사, 자기의 혀와 손가락을 깨물지언정 끝까지 당의 기밀을 고수한 녀영웅 김순희 렬사, 두 눈을 파내는 혹형을 당하면서도 “내 눈을 파내도 나는 혁명의 승리를 볼 수 있다.”고 웨쳤던 녀항일유격대 대원 최희숙 렬사… 영렬벽에 새겨진 항일영웅들과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수많은 무명렬사들, 그들은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앞사람이 쓰러지면 뒤사람이 이어나가면서 불요불굴의 정신으로 영용히 싸워 민족해방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기념비 량켠에 세워진 조각.

오늘날 해마다 청명, 추석, 렬사추모일이 다가오면 연변혁명렬사릉원은 사람들로 붐빈다. 혁명렬사들을 추모하러 온 이들은 혁명렬사기념비에 화환을 올리고 경건하게 서서 묵도를 하면서 렬사들을 기린다.

류계홍 관장은 “해마다 10만여명의 사람들이 릉원을 방문해 렬사를 추모하고 애국주의교양을 받는다.”면서 “연변혁명렬사릉원은 ‘렬사의 정신을 기리고 후대를 계몽 교양한다’는 취지에 따라 전국 애국주의교양기지의 시범, 인솔 역할을 충분히 발휘하여 애국주의교양과 리상신념교양 활동을 적극 전개함으로써 대중들의 정치소양과 애국열정을 끊임없이 향상시키기 위해 힘쓸 것이다.”라고 밝혔다.

  글·사진 전해연 기자

来源:延边日报
初审:金麟美
复审:郑恩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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