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날, 기자는 성도시 금우구에 있는 조일만 렬사의 손녀 진홍의 집을 방문했다. 진홍은 사진을 바탕으로 그린 조일만이 아들 ‘녕아’를 품에 안고 단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유화를 소장하고 있었다.
진홍은 그림을 어루만지며 “사진을 찍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는 떠났고 아버지는 다시는 할머니를 만나지 못했다.”라고 말하면서 생리별의 순간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조일만은 본명이 리곤태이고 1905년에 사천성 의빈에서 태여났다. 큰 형부 정우지 렬사는 중국공산당 천남당조직의 창립자이고 둘째 언니 리곤걸, 둘째 형부 소간청, 넷째 언니 리곤능은 모두 중국공산주의 청년단원이다. 그들의 인도 아래 1926년 여름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뒤 무한중앙군사정치학교(황포군관학교 무한분교), 모스크바 중산대학에서 공부했다.
모스크바에서 그녀는 리일초라는 가명으로 동창생 진달방과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달콤한 신혼생활을 제대로 누려보기도 전에 임신한 그녀는 명령을 받고 귀국하여 호북, 상해, 강서 등지에서 지하공작에 종사했다. 1929년, 그녀는 의창에서 아들을 낳았다. 아이가 겨우 한살 남짓했을 때 그녀와 시누이 진종영은 아들을 다섯째 오빠 진악운의 집에 맡기고 혁명에 전념했다.
그녀는 헤어지기 전에 아들을 안고 기념사진을 찍어 남편에게 보냈는데 이것이 영원한 리별이 될 줄은 몰랐다.
‘9.18’사변 후 그녀는 ‘조일만’이라는 가명을 쓰고 당조직의 파견을 받아 동북으로 가 심양, 할빈에서 항일투쟁을 이끌었으며 차례로 만주총공회 비서, 조직부 부장, 할빈총공회 서기대리를 맡았다.
《동북항일련군사》에 따르면 1933년 4월, 일본 괴뢰의 횡포와 로동자들이 온갖 수모를 당하는 상황에서 조일만은 밤새도록 할빈 전차로동자들의 대규모 파업을 지도하여 도시 교통의 맥락을 단숨에 끊어놓았다. 결국 일본 괴뢰의 통치당국은 사회여론의 압력에 못이겨 로동자들의 작업복귀 조건을 승낙함으로써 파업은 전면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1934년 7월, 조일만은 주하현(현재 상지시)으로 가 중국공산당 주하중심현위 위원직을 맡았으며 이후 동북인민혁명군 제3군 제1사 제2퇀 정치위원으로 임명되였다. 그녀는 비범한 지혜와 용기로 일본과 괴뢰정부 신문에서 유명한 ‘쌍권총 백마’ 녀성 정치위원으로 알려졌으며 일본군들은 그녀를 조상지와 동등하게 중요한 목표로 삼았다.
1935년 11월, 부대의 포위를 돕기 위해 조일만은 주하현 소서북구에서 일본 괴뢰군과의 치렬한 전투중에 중상을 입고 불행히도 적군에게 붙잡혔다.
위만주국 할빈경찰청(현재 동북렬사기념관)의 음산한 고문실에서 놈들은 쇠바늘로 찌르고 인두로 살을 지지고 고추물을 코에 붓는 등 잔혹한 고문들을 다 동원했다. 비인간적인 고통 앞에서도 조일만은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조일만은 “당신들은 마을을 재더미로 만들고 사람을 갈기갈기 찢을 수는 있어도 나의 신념을 없앨 수는 없다!”라고 말했다.
할빈에서 치료받는 동안 그녀는 뼈가 부서지고 상처가 곪는 극심한 고통을 참으며 다리를 절단하는 것을 단호히 거절했다. 그녀는 다리를 지켜낸다면 다시 전장에 나갈 희망이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감화하에 간수 동헌훈과 간호원 한용의는 그녀를 도와 적의 소굴에서 탈출시켰다. 그러나 사흘 뒤 적들은 그녀를 추격해왔고 조일만은 다시 감옥에 갇히게 되였다.
1936년 8월 2일, 당시 31세였던 조일만은 주하에서 영용히 희생되였다. 사형장으로 가는 렬차에서 그는 압송인원들을 향해 종이와 필을 달라고 청했고 적들에게 고문당해 필을 쥐기 어려운 손으로 먼곳에 있는 아들에게 피맺힌 유서를 썼다.
“너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것은 어머니로서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나는 말보다 몸소 보여주려 한다. 네가 성인이 된 후에 너의 어머니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것을 결코 잊지 말아라!”
진홍은 목메인 어조로 랑독했다. 이것은 그녀의 아버지 ‘녕아’ 진액현이 동북렬사기념관에서 직접 베껴 쓴 가보로 전해지는 글이였다. 차마 읽어내려갈 수 없는 그 글씨는 얼마나 큰 감정이 담겨있을가!
혁명이 승리한 후 리곤걸, 진달방, 진종영과 진액현이 여러차례 찾아다닌 끝에 당조직은 마침내 조일만이 리곤태임을 확인했다. 진액현은 동북렬사기념관에서 어머니의 유서를 베끼면서 팔에 만년필로 ‘조일만’이라는 세글자를 깊이 새겼다. 진홍은 “아버지는 나에게 할머니가 편지에 담아 전하는 애국심과 순수한 마음을 가풍으로 삼아 영원히 이어나가야 한다고 당부했다.”고 말했다.
할빈에는 2375메터 길이의 ‘일만거리’가 도시 구조에 융합되였고 의빈에서는 일만공원, 일만촌, 일만대로, 일만중학교가 추모의 장소로 되였다. 사천성퇴역군인사무시스템, 금우구규률검사위원회·감독위원회 등은 진홍을 초청해 선전강연을 진행했다. 중화대지에서 조일만 렬사의 정신은 영원히 기억되고 전파될 것이다.
신화사 기자 사교 양사기 강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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