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가산을 모두 써버렸어도 어머니의 칭찬을 받았다. 그는 항전을 견지하여 적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고 죽어도 굴하지 않는 정신으로 수많은 대중들을 감동시켰다. 그가 바로 항일명장 왕봉각이다.
길림 통화의 한 교원가정에서 태여난 왕봉각은 어려서 서당을 다닐 때 ‘정충보국’으로 자신을 격려했으며 ‘만강홍’을 연주하며 장한 뜻을 키웠다. 1931년 9.18사변 후, 왕봉각은 국토가 일본군에 함락되고 인민들이 도탄 속에 빠지자 결연히 항일구국 활동에 참가했다.

항일무장을 설립하기 위해 그는 가산을 팔고 모금활동을 벌렸으며 림강 홍토애, 통화현 대라권구 일대 산간지대에서 수백명의 무장을 비밀리에 조직하고 항일구국의 기발을 들었다. 1932년 5월, 왕봉각은 부대를 인솔하여 항일장령 당집오가 령도하는 료녕민중자위군에 가입하고 제19로군 사령관으로 있으면서 류하, 금천, 휘남, 해룡, 몽강, 림강 등지를 전전하여 일본군과 싸웠다.
통화 산간지대에서 왕봉각은 과송천, 칠도구 등 요새를 구축하고 유격전으로 일본군, 괴뢰군과 전투를 벌렸다. 1933년부터 1937년까지 왕봉각부대는 산간지대 지형을 리용하며 일본군, 괴뢰군과 수백차례의 전투를 벌려 적에게 심각한 타격을 안겼다.
1937년 봄, 왕봉각은 혹한에서 상상할 수 없는 간고함과 적들의 무차별 공격을 이겨내고 부대를 거느리고 통화, 림강, 집안 등 3개 현 접경지대에 위치한 로호정자 요새에 도착했다. 하지만 일본군과 괴뢰군이 또 따라붙었고 3일간 밤낮으로 격전이 이어졌다. 일본군과 괴뢰군은 비행기까지 동원하여 연소탄을 투하해 산과 들을 온통 불바다로 만들었다.
왕봉각은 부대를 거느리고 적의 포화를 무릅쓰고 포위를 돌파하여 대라권구 부근의 동남쪽 갈림길로 물러났으며 탄알이 다 떨어지고 지원이 끊긴 상황에서 사투를 벌리다가 전군이 전멸되였으며 왕봉각과 안해, 아들도 불행하게 체포되였다.
적들은 왕봉각이 도망칠가봐 큰 못으로 그의 두 손을 매돌 받침대에 박아놓았다. 일본 헌병대장은 얼리고 닥치며 왕봉각에게 투항을 권고했다. 왕봉각은 “머리가 잘릴 수 있고 피가 흐를 수 있지만 투항은 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왕봉각의 항복을 받아낼 수 없는 것을 보고 적들은 또 왕봉각의 어린 아들에게 사탕, 과자, 주먹밥을 주며 아이가 항복을 유인하게 했다. 아들은 겨우 4살이였지만 “나는 중국인이다. 나는 망국노 밥을 먹지 않는다.”고 떳떳하게 웨쳤다.
1937년 4월, 왕봉각 일가는 형장으로 압송되였다. 형장에 이르자 적들은 왕봉각을 미리 파놓은 큰 구덩이에 내려가게 했다. 이때 그는 고개를 들어 마을사람들을 향해 높이 웨쳤다. “절대 포기하면 안된다. 이 왕봉각이 쓰러지지만 또 천만명의 왕봉각이 일어설 것이다. 인심이 살아있으면 나라가 망하지 않는다! 끝까지 싸우자! 중화민족 만세!” 적들은 그더러 무릎을 꿇으라고 했지만 그는 우뚝 선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살인마가 칼을 휘두르자 영웅의 뜨거운 피가 하늘로 솟구쳤다. 부인 장씨는 아이를 안고 구덩이에 뛰여들면서 의연히 순국했다.
영웅의 충정과 적들의 잔인함은 수많은 민중의 반항투지를 불러일으켰다. 력사자료의 기록에 따르면 왕봉각 일가가 희생된 후 비록 일본군이 형장 주변에서 사람을 파견하여 밤낮으로 순시했지만 장군을 묻은 구덩이 주변에서는 여전히 사람들이 제사를 지낸 흔적을 자주 발견했다. 일부 촌민들은 이때부터 항일구국의 대오에 합류했다.
오늘날까지 통화지역에서 왕봉각의 이름은 누구나 다 알고 있으며 곳곳에서 왕봉각 일가의 항일구국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통화시에 위치한 양정우렬사릉원 및 동북항일련합군기념관은 년평균 연 40여만명의 관광객을 접대하고 있다. 전시장에는 형을 집행하기 전 왕봉각 부부가 남긴 사진이 종종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사진 속에서 왕봉각 부부는 앞을 내다보며 의연한 표정을 짓고 있다. 영웅은 비록 우리 곁을 떠났지만 “머리가 잘릴지언정 망국노가 되지 않겠다.”는 그의 절개는 한 세대 또 한 세대를 고무하고 있다.
신화사 기자 장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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