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주성 삼도현 혁명렬사릉원의 산꼭대기에는 푸른 송백나무 사이에 기념조각상이 우뚝 서서 먼곳을 바라보고 있다. 그가 바로 중화민족을 보위하다 희생된 애국장령 등구수이다. 1932년, 일본침략군의 상해 침공을 물리치는 송호전장에서 희생되기 전 그는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우리 군인들은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보위하는 책임을 지고 있다. 포탄은 적을 향해 쏘고 후퇴하는 자는 총살한다!”

등구수는 1899년에 태여났으며 귀주성 도강현(지금의 삼도수이족자치현) 사람이다. 등구수는 교육가정에서 태여났으며 어릴 때부터 충성으로 나라에 보답하겠다고 스스로 격려했다.
1917년, 그는 귀주륙군강무학교 포병과에 합격해 군사기술을 공부했다. 1919년 졸업 후, 그는 귀주군 패장, 련장, 영장, 퇀장 등 직을 력임하면서 군사재능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귀주 군벌 사이의 권력쟁탈 등 현상에 대해 극히 불만스러워했다.
당시 손중산은 국민당을 개조하여 제1차 국공합작을 실현하고 중국공산당의 도움으로 국민혁명군을 건립했다. 등구수는 1926년 귀주를 떠나 광주에 가 국민혁명군에 투신했으며 선후하여 중앙군사정치학교(황포군관학교) 조주분교 교관, 조주─매주 경비사령부 참모처 처장을 맡았으며 후에 또 국민혁명군 제17군 제2사 및 제10군 제29사 참모장으로 전임했다. 1930년부터는 오송요새사령부 참모장으로 있었다.
1932년 1월 28일, 일본군이 공공연히 상해를 공격하면서 중병을 파견하여 오송요새를 포위 공격했다. 상해주둔 국민혁명군 제19로군과 상해인민은 불타는 적개심으로 일본군의 광란적인 진공에 항거했으며 등구수는 포대 방어시설을 정비하고 장병들을 인솔하여 적극적으로 전쟁준비를 하라고 명령했다.
2월 3일, 일본군은 포대 진지를 향해 대포를 쏘고 도발을 감행했다. 등구수는 명령을 받고 포대 장병들을 지휘하여 오송구에 위치한 일본군함에 포를 쏘고 반격하여 1척을 격침하고 3척을 격상했으며 적기 1대를 격추했다.
2월 4일 오전, 일본군은 군함 10여척, 비행기 20여대를 파견하여 오송포대에 대해 개전 이래 가장 맹렬한 폭격을 진행하여 포대를 파괴하고 요새를 점령하려고 시도했다. 이 긴급한 시각에 등구수는 명령을 받고 독전했는데 몇시간의 격전을 거쳐 오송요새는 포화가 하늘을 찌르고 연기와 먼지로 자욱했으며 도처에 깊은 포탄구덩이가 생겼다. 등구수는 위험에 직면해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포대 장병들을 계속 지휘하여 반격을 가했다.
격전중에 적의 파편이 그의 왼팔을 명중하여 선혈이 옷을 붉게 물들였다. 호위병이 그에게 잠시 상처를 치료하라고 부탁했지만 등구수는 단호하게 명령했다. “우리 군인들은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보위하는 책임을 지고 있다. 포탄은 적을 향해 쏘고 후퇴하는 자는 총살한다!” 전투 과정에서 그는 오른쪽 겨드랑이에 총탄을 맞았고 오른손이 부러졌으며 이어 가슴과 배가 파편에 관통되여 피가 솟구치면서 33세의 나이로 장렬하게 순국했다. 전쟁중에 병사들은 그의 시신을 솜이불로 싸서 그 자리에 묻었다. 3월 중순, 등구수의 시신은 당시 상해의 영안공동묘지에 안장되였다.
등구수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후 19로군 군장 채정은 “뜨거운 피가 송호전장에 뿌려졌다.”는 글을 써서 영령을 위로하고 장례를 치렀다. 송경령도 연설을 발표하여 19로군과 등구수가 용감하게 적에 대항한 애국정신을 높이 평가했으며 상해의 여러 신문들도 앞다투어 등구수의 용감한 사적을 보도했다.
1984년 6월 26일, 북경시인민정부는 등구수를 혁명렬사로 비준했다. 같은 해 7월 6일, 민정부는 등구수에게 정식으로 혁명렬사 증명서를 발급했다. 2014년, 등구수는 민정부로부터 전국 300명 유명 항일영렬과 항일영웅군체에 선정되였다.
현재, 삼도현의 혁명렬사릉원에는 등구수의 기념조각상이 서있으며 삼도현박물관에는 몇장 남지 않은 등구수의 사진도 전시되여있다.
신화사 기자 리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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