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선택□ 박영옥

2025-07-18 08:16:24

그녀는 창문을 활짝 열어제꼈다. 청신한 공기가 페부로 들어오면서 온몸이 가뿐해났다. 그렇다. 진정한 삶의 주인이라면 그 누구한테도 기대지 않는다. 삶의 중심을 자신한테 옮기면 행복지수가 높아질 것이 아닌가!


미선이는 아침 설겆이를 마친 뒤 화장하려고 거울 앞에 마주앉았다. 한달 전에 염색한 머리카락이 또 봄을 만난 새싹이 뾰족뾰족 올리밀 듯 밑으로부터 하얗게 나기 시작했다. 아직은 50대 초반이여서 청춘의 흔적이 말끔히 사라지지 않은 나이건만 거울에 비낀 그녀의 얼굴에는 여기저기 주름이 많이 널리기 시작했고 두 뺨에는 콩알 만한 기미도 여러개 돋아있었다. 열심히 기미를 덮어주는 파우더도 바르고 립스틱도 화사한 봄기운을 몰아주는 진달래색갈로 선택하고 보니 조금은 나아보였지만 그래도 륙십대를 방불케했다. 팽팽하던 젊음은 소리소문 없이 허물어졌다.

오늘따라 담담한 애수에 잠겨 미선이는 한숨을 내톱았다.

미선이는 5년 전에 그 남자를 신변에 둔 후부터 화장과 멀리하기 시작했다. 한달 전에 그녀는 어느 잡지에서 본 <진짜 이쁜 녀자>란 글에서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주인공 처녀는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시한부 앞에서도 해볕쪼임을 나갈 때면 선글라스도 끼고 화장도 열심히 했다. 눈물 흘리면서 살기보다 짧은 생명을 살아도 생활을 사랑하고 인생을 사랑하는 마음가짐으로 신변의 사람들에게 아름다움을 자랑하면서 환한 웃음을 두 뺨에 수놓아가는 그런 녀자였던 것이다.

‘그래그래. 난 진짜 바보였어. 내가 저 남자 때문에 축 처진 모습으로 살아가는 내가 정말 바보였어.’

이런 생각이 가슴속에서 마구 회오리바람을 일구면서 한동안 자신을 반성하게 되였다. 중풍 맞은 남자의 시중을 들 때부터 늘 가무잡잡한 얼굴에 지친 마음으로 살아온 자신이 미워났다. 지금부터라도 주름진 얼굴에 풍경을 입히고 싶었다. 미선이는 머리물감 들이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저쪽 방에는 얼굴이 수척한 남자가 이불 속에 반듯이 누워있다. 남자는 5년 전에 중풍에 걸렸는데 대소변도 못 가리는 상황이다.

화장을 마치고 그 남자 곁에 가 이불 속에 손을 넣어본 미선이의 손에 축축한 느낌이 전해졌다. 숙련된 솜씨로 자리를 바꿔 깔고 옷까지 갈아입힌 미선이는 그 남자의 두 손을 이불 안에 넣어주고는 이불을 잘 여며주었다.

“애 아버지, 금방 아들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이번 음력설에 고향에 와 간단한 결혼식을 올리겠다네요.”

순간, 남자가 눈을 번쩍 크게 떴다. 두 손을 후들거리며 쳐들려고 하는 것을 미선이는 다시 이불 안에 넣어주고는 숨을 돌리려고 창문가에 다가갔다. 유리알처럼 투명한 하늘에서 구름 한송이가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었다.

스무다섯살의 나이에 미선이는 정무한테 시집을 갔다. 훤칠한 체구에 부리부리한 눈, 거기다 음악교원이라는 것이 더구나 마음이 끌렸다.

미선이도 활짝 핀 복숭아꽃처럼 청신하고 예뻤다. 그녀를 두고 같은 단위 뭇총각들이 마음을 많이 설레였지만 좀 오기가 있는 그녀의 마음의 빗장을 뽑지 못했다. 그러던 그녀는 정무의 모습에 마음의 대문을 활짝 열게 되였고 그렇게 사랑의 바줄에 묶이게 되였다.

결혼 후 정무는 자그마한 도시의 예술관으로 직장을 옮겨 전직 창작원으로 일하게 되였는데 그때로부터 언어도 우아해지고 옷차림도 사치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밥을 먹다가도 갑자기 술을 놓고 펜을 쥐더니 무언가 쑥쑥 써내려갔고 때론 코노래로 흥얼대기도 했는데 참 감미로운 기분이였다. 도레미파쏘라씨도 일곱개 음으로 아름다운 선률을 만들어가는 사람의 머리속은 얼마나 신비로운 세계일가 하는 호기심으로 미선이는 늘 정무의 뒤모습을 바라보며 형언 못할 행복감에 빠지군 했다. 존경을 넘어 숭배에까지 이른 사랑의 마음 안고 사는 나날은 그야말로 향내 뿐이였다.

아들애가 아홉살 되던 해 남편에 대한 이상한 루머가 떠돌았다. 설마 하고 생각하면서도 한쪼각의 엷은 불안이 미선이 가슴의 구석구석에 연기처럼 채워졌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저녁에 나간 후로 사흘간 무소식이였다. 그러다가 돌아온 남편의 얼굴은 심상치 않았고 다짜고짜 리혼을 제기했다. 청천벼락같은 소리에 미선이는 두 눈이 화등잔이 되였다. 귀여운 아들애에 남부러울 것이 없는 생활인데 웬 리혼소리란 말인가?

“애 아버지 혹시 롱담하시는 거 맞지요?”

“아니. 미안하지만 난 롱담이 아니요. 우리 사이에는 그 무언가 통하지 않소.”

미선이는 하늘이 빙빙 도는 것 같았고 한대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가 뗑해났다. 머리속은 어지러운 선률로 꽉 차있었다.

남편이 다른 녀자한테 마음을 도적맞힌 것이 뻔했다. 그녀는 울지도 않았다. 울어본들 랭정한 현실을 이겨가는 데는 아무런 도움도 없으니 말이다.

얼마 안되여 남편은 려금이란 녀자와 가정을 이루었다. 려금이는 무용수였는데 그 우아함이 극치에 도달했다. 친구들이 미선이보고 여우 같은 려금이를 한바탕 혼내주라고 추기였다. 그러나 그녀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손벽도 마주쳐야 소리 난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물며 미선이는 성격이 온화하고 마음도 지나치게 선량해서인지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가령 그 어느 녀자가 남편의 미모에 혹은 재능에 반해서 유혹한다고 해도 그 유혹을 물리치면 될 일인데 거기에 말려든 것은 안해에 대한 사랑이 식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혼자의 힘으로도 애를 잘 키워냈다. 공부 잘하고 마음도 착해서 동네는 물론 학교에서도 늘 표창 받았다. 그런데 아빠의 빈자리를 메우기란 쉽지 않았다. 가슴 한켠에는 늘 빈구석이 있었는데 그것을 메워보려는 기다림과 욕구가 날로 커갔다.

그녀 곁의 빈자리를 욕심내는 남자들도 꽤 있었지만 그녀는 그 어느 땐가 남편이 곁에 돌아오지 않을가 하는 기대감이 컸다. 싱싱한 운치를 풍기는 데다 핸섬한 정무한테는 녀자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문예를 하는 남자니까 잠간 그럴 법도 하겠지 하는 생각으로 미선이는 남편의 과거를 용서할 마음의 준비도 되였었다. 그런데 정무가 무용수와 고작 몇년 살고는 또 다른 녀자를 만날 줄이야.

정무는 녀성 편력과는 별개로 음악 면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 톡톡 뛰는 류행곡을 많이 만들어내면서 음악가로 주변에 이름을 떨쳤다. 그러니 뭇사람들한테 맹목적인 숭배감을 심어주기에는 넉넉했다.

아들애는 어느덧 장성해서 고중공부를 마치고 일본류학을 가겠다고 했다. 큰 꿈을 이루려는 아들의 소행은 기특했지만 홀로 아이를 키우다 보니 저금이 별반 없었다. 이들은 생각 끝에 아버지한테 찾아가 당당하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차용증을 쓰면 빌려줄게. 그리고 리자는 낮게 쳐줄 테니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고.”

“차용증을요? 그리고 리자까지요? ”

아들이 전기에 닿은 듯 흠칫했다.

하지만 아들애는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아니면 다른 데서 거액의 돈을 구하기 어렵다는 것을. 처음에는 아버지가 류학에 필요한 돈을 대줄 거라는 기대가 컸었다. 아버지가 두번째로 만난 녀자는 아이까지 딸렸는데 그 아이는 학교에서 제일 멋쟁이였다. 고급옷, 고급신, 고급가방까지…

아버지 손에서 빌려온 9만원을 아들 손에서 받아쥔 미선이는 억이 막혔다. 세상에 이런 법도 있단 말인가? 여직 법적으로 정해진 양육비외에 용돈 한번 안 준 아버지였는데 어쩌다가 도움 바랐더니 이렇게 나오다니? 이렇게 매정한 아버지가 이 하늘 아래 또 있을가 싶었다.

미선이는 가슴에서 불이 펄펄 치솟아올라 정무를 짐승보다 못하다고 한바탕 욕하고 싶어서 입을 벌렸지만 목이 꺽 막혔다. 찾아가 한바탕 울분을 쏟고 싶었지만 발이 말을 듣지 않았다. 엄마의 마음을 읽은 아들은 엄마의 손을 쥐고 속삭였다.

“엄마, 너무 속상해 말아요. 아버지도 말 못할 사연이 있어서 그러겠지요. 제 생각에는 이것이 아버지 본의가 아닌 것 같습니다.”

미선이는 정겨운 눈매로 아들을 쳐다보았다.

‘그래그래, 아들이 말이 맞을 거야. 이 세상에 새끼 미워하는 부모 없을 거야. 이건 전적으로 후처의 작간일 거야.’

이렇게 마음을 정리하니 끓어번지던 원망이 식었다. 여직 철부지로만 생각해온 아들이 어느새 센스 있는 애로, 언어와 행동이 묵직한 애로 성장한 것만으로 그녀는 행복감에 젖어들었다.

어느 한번 저녁에 아들애와 함께 달빛을 밟으면서 산책을 하다가 길옆에 있는 바위 우에 나란히 앉았다.

“엄마, 십년 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간 눈물도 많이 참으시며 살아오셨는데 오늘 내 어깨를 빌려드릴 테니까 한번 소리 내여 울어보십시오.”

아들의 다정한 말에서 한웅큼의 체온을 읽은 미선이는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아들을 쳐다보았다. 달빛 아래서 보이는 아들의 얼굴은 그렇게도 준수했다. 미선이는 아들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두 어깨가 쉼없이 오르내림과 동시에 나지막한 흐느낌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들의 말과 어깨는 그녀의 오그라진 가슴을 시원히 펴주었다.

아들이 일본으로 떠나는 날 기차역에서 미선이는 사방을 두리번대며 정무가 나타나길 기다렸다.

‘평소에는 아버지 노릇을 별반 못했지만 이런 때에야 다르겠지. 머나먼 외국으로, 그것도 한두달도 아닌 몇년이나 못 볼 아들인데…’

그러나 기차가 “뿡ㅡ” 하고 기적을 울리며 서서히 역을 떠나갈 때까지 정무는 보이지 않았다. 순간 눈물이 흘러나왔다. 아무리 후처한테 휘둘린다 해도 이럴수가 있단 말인가? 이런 걸 두고 개보다 못한 아버지라고 할가? 배웅을 나온 친척들이 마구 야단쳤다.

“새끼도 모르는 애비는 영영 없는 셈 쳐야지.”

“나중에 어느 땐가 아들을 찾아오면 가차없이 쫓아내야 할 사람이군.”

시야에서 점점 멀어져가는 아들이 불쌍했다. 일찍 셈이 든 아들은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도 안했지만 그 시각 아들을 바래는 아버지의 모습을 얼마나 갈망했을지 미선이는 알 수 있었다. 한창 하늘을 보고 별을 보고 세상을 바라보면서 아름다운 감성을 느낄 나이인 아들애가 아홉살 이후로는 아버지가 보이지 않는 밥상, 아버지가 없는 가장회, 아버지가 빈 잠자리를 묵묵히 견뎌냈다. 미선이는 생의 어두움 속에서 반듯하게 커가는 아들애만 바라보면 뿌듯함을 느끼면서 슬픔을 망각할 때가 많았다. 아들애는 그녀의 꿈이였고 생의 희망이였고 마음의 등대였다. 그러던 아들이 저 멀리 이국땅으로 갔다.

눈물샘이 터졌는지 얼굴에서 비가 내린다. 이럴 때 정무만 곁에 있다면 이다지도 허전하지 않을 것이다. 이다지도 가슴에서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다. 이다지도 엄습해오는 비애가 크지 않을 것이다.

일본에 간 아들은 공부에 지치면서도 아르바이트에 게을리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빚을 빨리 갚고 싶다는 짐은 무던히도 어린 마음을 괴롭혔고 아직은 채 굳지 않은 날개를 무겁게 내리눌렀다. 매일 지쳐서 천근 무게 되는 다리를 질질 끌며 잠자리에 들 때면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컸다. 뜨르르하게 사는 아버지가 집 떠날 때 용돈 얼마라도 챙겨주었다면 그래도 일본땅에 닻을 내린 후 한동안은 적응기간을 가질 수도 있었겠 건만 생계를 위해 아들애는 늘 부리나케 뛰여다니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였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통화를 할 때면 빚독촉이 앞섰다. 아버지와 대화할 때면 곁에서 후처의 투덜대는 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괜히 돈을 꿔주더니 언제 다 받아요? 빚을 빨리빨리 갚으라 하세요.”

후처의 빚재촉은 날카로운 가시가 되여 아들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일도 하지 않으면서 아버지가 뇌즙을 짜서 번 돈으로 호강을 누리는 그런 녀자를 두고 아들애는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 녀자라도 아버지가 좋아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빚재촉만 하지 말았으면 이다지도 밉지 않겠는데… 빚이란 정말 천근무게였다. 그처럼 지지누르던 빚을 벗는 날이면 인적기 없는 곳에 가 한바탕 소리치고 싶었다. 아니, “엉엉” 하는 울음소리가 입에서 터질 것 같았다.

어느덧 3년이 흘러서야 아들은 마침내 빚을 다 갚았다. 마지막으로 1만 1000원을 보내고 난 아들은 엄마를 찾았다.

“엄마, 오늘까지 빚을 몽땅 갚았습니다.”

“네가 그동안 고생인들 오죽했겠느냐? 난 가슴이 아파나는구나. 흑… 흑…”

엄마의 나지막한 흐느낌소리에 아들애도 코등이 쩡해났고 소리없이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는 너무 모질었다. 마지막 빚 1만 1000원도 에누리없이 몽땅 받아낸 아버지였다.

‘아니아니. 아버지 탓이 아니야. 아버지가 자식을 몰라줄 리가. 모두 그 녀자 탓이야.’

현실을 믿고 싶지 않았던 아들은 한참 동안은 아버지를 원망했다가 또 인차 부정하기도 했다.

어느 날 미선이는 아들의 전화를 받았다.

“엄마. 금방 아버지랑 통화했는데 며칠 전 쓰러지셨다고 해요. 같이 살던 녀자는 안 살겠다고 나가고… 그러니 엄마 어서 가보세요.”

“그게 무슨 말이니? 그리고 아버지한테 무슨 일이 생긴다고 해도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지 않느냐?”

미선이의 입에서 격한 말이 튕겨나갔다.

“엄마, 그래도 내 아버지입니다. 비록 엄마한테 죄를 지었지만 이 아들을 봐서 용서해주시고 제가 돌아갈 때까지 아버지를 부탁 드려요. 엄마가 상관 안 하시면 아버지는 희망이 없어요. 엄마, 제발요.”

전화에서 흘러나오는 간절하면서도 울음이 섞인 아들의 목소리에 잠간 무거운 침묵이 집안에 찼다.

‘내가 왜 일찍 나를 배신했던 남자를 걱정해야 돼? 화냥년들한테 돈을 다 떼우고 빈털털이로 된 전남편을 시중해야 할 리유란 조금도 없지 않는가? 아들은 왜 내 마음속에 여전히 도사리고 있는 미움을 몰라줄가?’

그녀는 어수선해진 머리를 붙안고 집안에서 한참 바장대기만 했다. 조금 후 믿기 어려울 만큼 선량함으로 빚어진 그녀는 마음은 평온을 찾기 시작했다

‘양로원에 봉사를 정기적으로 가기도 할라니, 그런 내가 왜 마음이 이렇게 모질어졌을가? 나와 관계없는 사람이라면서 이렇게 모질게 대하는 것을 보니 아직도 내려놓지 못한 것이 많단 말인가! 차라리 의지가지 없는 친구를 돕는다고 생각해보는 것이 어떨가?’

그녀가 남편에 대한 미움은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자기가 만약 거절한다면 아들이 얼마나 가슴 아파할가? 아들이 마음 아파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니 미선이는 가슴에서 통증이 콕콕 쏘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 노릇을 못한 사람이지만 그런 아버지를 공경하려는 아들의 이 기특한 마음에 심히 감동되였다. 그래서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했던가!

그녀는 정무의 집을 향했다. 마음은 곱게 정리했지만 그래도 어딘가 내키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가 정무는 뇌혈전으로 운신도 못하고 있었다. 그처럼 애교스럽고 우아했던 녀자는 보이지 않았다. 정무가 쓰러지자마자 돈을 몽땅 챙겨서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했다.

“어떻게 왔소? 난 인제는 망했소.”

죄진 놈의 담은 실오리처럼 가늘다고 얼굴에 구름장이 가득 낀 얼굴을 하고 말하는 정무의 목소리는 모기소리 같았고 눈굽은 축축히 젖어들었다.

‘이런 걸 두고 죄는 지은 데로 간다고 했을가?’

한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겨우 일어나 앉는 정무를 보노라니 다시 마음이 추스러졌다. 코등이 시큰해났다.

‘죽어가는 사람을 두고 금방 내가 왜 저주했던가? 더구나 애 아버지인데…’

미선이는 정무를 자기집에 데려왔다. 이 일은 주위에 센세이션을 일으킨 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녀가 거리에 나서면 사람들은 귀속말로 수군대거나 지나간 후 다시 되돌아보기도 했다.

일찍 자기를 배신했던 남자를 길가에서 피끗 만나기도 싫은데 한 천정을 이고 매일매일 쳐다봐야 하는 것이 미선이한테는 억울했다. 가장 좋은 시절은 외딴 녀자한테 정력도 빼앗기고 정신도 도적맞히고 금전까지 바쳐가며 남 좋은 노릇을 하더니 이제 와서 ‘페물’이 되다싶이 하니 자기가 그러안아야 하는 이런 불공평도 있단 말인가? 하지만 처음에 마음을 다잡았던 그때를 떠올리고 다시 울화를 가라앉히며 미선이는 하루에도 수십번씩 마음이 그네처럼 왔다갔다 했다. 그런 미선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무는 너무도 파렴치했다. 몸이 좀 말째면 미선이와 화풀이를 했고 때론 성한 팔까지 추켜들고 소리 질렀는데 그럴 때면 미선이는 머리가 콱 하고 터질 것만 같았지만 눈앞에 사람은 그저 환자일 뿐이라고 념불 외우듯 외워댔다. 한참 그러고 나면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애오라지 자상하고 반듯한 아들의 마음을 헤아려주고 아들의 근심걱정을 덜어주는 것이 모성애라고 여기는 미선이였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올리사랑은 없다는데, 아들애는 아버지 노릇도 못한 정무한테 특별했다. 보내오는 편지마다에서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아버지의 처사를 두고 미워하지 마세요. 괜찮습니다. 내 나이면 자립할 법도 한데, 새 가정을 꾸린 아버지한테 가 손을 벌렸으니 아버지의 처지도 리해됩니다. 매일 공부를 마치고 고된 일을 할 때면 괴로울 때도 많지만 그가운데서 귀중한 인생체험을 합니다. 이렇게 애쓴 보람에 이젠 어지간한 고생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이렇게 강해지고 보니 오히려 아버지가 고맙게 여겨집니다. 우리 학급엔 아버지가 병으로 일찍 돌아간 학생이 어쩐지 생각보다 꽤 많아요. 난 그래도 아버지가 계시니 얼마나 든든한지 몰라요…”

너그러움으로 물든 편지를 읽으며 미선이는 아들의 넓은 흉금이 대견스레 느껴졌다.

ㅡ어쩌면 착한 마음도 나를 물려받았을가? 몸을 낳지 마음은 못 낳는다는 말도 틀릴 때가 있군!

처음에는 그토록 마음이 내키지 않는 현실이여서 짜증이 나던 것이 점차 그 원망도 짜증도 줄어들었다. 대낮에 받았던 스트레스가 밤이면 저도 몰래 아물 때가 많았다. 아마도 세월이 흐르면서 같은 일이 반복되느라면 한층의 단단한 외각이 생기는가보다. 그리고 인위적인 노력으로 용서의 대문을 열어제끼고 보니 마음의 응어리는 차츰 풀어지고 있었다.

해가 가고 달이 지면서 그녀의 이마에는 전 남편을 간호한 5년이란 흔적이 새겨졌다. 미선이는 슬슬 지쳐갔다. 몸도 치쳤거니와 마음은 더구나 지쳤다. 스트레스 또한 무더기로 쌓였다. 많이 소모했는데 소모보다 생겨나는 것이 갑절 많아졌다. 아무리 끔찍한 부부라도 이렇게 반신을 못 쓰는 사람을 5년이나 시중해준다는 것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게 아닌데 배신자를 위해 이 기나긴 세월을 허비하고 젊음을 바치며 살아오다니, 너무 불공평한 일이다. 몇번인가 아들한테 푸념을 늘여놓았는데 아들의 대답이 이러했다.

“엄마의 착한 심성과 살뜰한 간호로 여지껏 아버지가 살아계시는 거에요. 하늘이 다 알아봐줄 거예요.”

아들의 말에 미선이는 입 다물어버렸다. 하늘이 알아주면 어떻게 알아준단 말인가? 속절없이 흘러보낸 5년을 되찾아준단 말인가? 그러다가도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지극한 효성을 생각하면 또 목이 꺽 하고 메였다.

‘그래, 내가 아들을 참 잘 키웠지.’

만약 아들이 아버지를 전혀 관계하지 않는다면 미선이는 자식을 잘못 키웠다고 통탄할 것 같았다.


추억의 쪽문을 닫고 흘러가는 구름에서 눈을 뗀 미선이는 ‘아들의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삶의 흔적이 어린 얼굴을 오랜만에 찬찬히 뜯어보노라니 측은해났다. 한창 재능을 피울 수 있는 나이인데 몹쓸병으로 시달림받는 것이 가엾게 여겨졌다.

남자는 또 손을 꺼내들고 일어나 앉으려고 허우적거렸다. 어눌한 말투로 뭐라고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다.

미선이는 가까이에 다가갔다.

“내 상금… 상금만 따로 모았소… 아들 결혼할 때 주려고 모았소…”

미선이는 떨리는 손으로 통장을 펼쳐보았다.

“10만원!”

미선이는 아껴두었던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거울에 비쳐오는 모습이 그 어느 때보다 맑아보였고 생기가 찰찰 넘쳤다. 아들은 줄곧 아버지의 마음속에 있었다. 아들에게 하루빨리 이 사실을 알리고 싶어서 안달이 났지만 다음전화가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녀자는 하나의 아름다운 풍경이라고, 미선이는 지금부터 자기가 있는 곳마다 하나의 풍경을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 몇년간 미선이는 힘들다고 아우성치면서 자기를 잃어버리고 어둡게 살아온 것이 후회되였다.

그녀는 창가로 가서 창문을 활짝 열어제꼈다. 청신한 공기가 페부로 들어오면서 온몸이 가뿐해났다. 그렇다. 진정한 삶의 주인이라면 그 누구한테도 기대지 않는다. 삶의 중심을 자신한테 옮기면 행복지수가 높아질 것이 아닌가!

  다시금 시선을 돌려 그 남자를 쳐다보는 미선이의 눈길이 해살마냥 부드러워졌고 따스했다.

来源:延边日报
初审:金麟美
复审:郑恩峰
终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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