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등대□ 류영자

2025-07-31 16:49:03

차는 고르롭게 석현진을 향한 도로를 따라 달리고 있다. 초여름의 산과 들은  푸르름을 한껏 자랑하고 있다. 하지만 비통에 잠긴 나의 눈에는 울창한 나무 숲도, 만발한 길가의 들꽃도 모두 생기를 잃고 메말라 보였다.

며칠전 내가 부모처럼 믿고 따르던 오빠가 영원히 나의 곁을 떠났다. 오빠의 생전 유품들을 정리하기 위하여 오늘 나는 오빠가 퇴직한 후 지원자로 농촌위생소에 내려가 사업하던 석현진 동흥촌 촌부로 떠났다.

동흥촌위생원은 오빠가 퇴직한 후 다시 의사가방을 둘러메고 성수나게 오르 내리던 오빠의 후반생 사업터다. 오빠는 바로 이 길을 따라 날마다 모터찌클을 타고 출퇴근을 하였다. 오빠는 퇴직 후 8년이란 긴 시간동안 농촌의료사업을 지원하여 맨발의사로 농민들을 위하여 봉사하였다.

차안으로 불어 들어오는 바람은 나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날리며 얼굴을 어루쓸었다. 바람은 오빠의 따스한 손길처럼 부드러웠다. 다시는 오빠의 따스한 손을 잡을 수 없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저절로 흘러 나왔다. 나의 성장의 걸음마다에 힘들어서 울고 싶을 때나 무너져버릴 듯한 상실감에 포기하고 싶을 때나 늘 묵묵히 따뜻하게 응원해주고 지지해주고 다독여주던 단 한사람, 오빠는 언제나 나의 옆에 있었다. 그런 오빠를 다시 볼 수 없다니!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치며 차창 밖으로 휙휙 스쳐 지나가는 가로수들을 바라보는 나의 눈앞에는 오빠와 함께 했던 수많은 추억들이 아련히 떠올랐다.

내가 소학교에 붙은 이듬해, 오빠는 우수한 성적으로 성급 위생전문학교에 붙어 멀리 큰 도시로 공부하러 떠났다. 오빠가 이불짐을 메고 떠나는 날, 유난히 오빠를 따랐던 나는 마을 비술나무아래까지 따라가며 서럽게 울었다.

대학생이 된 오빠는 방학하여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께서 당지부서기 사업을 맡았을 때 신고 다니시던 방수장화를 신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일 밭에 나가 농사일을 직접 하였다. 매번 일밭에 나갈 때마다 오빠는 꼭 약가방을 챙겨 들고 나갔다. 오빠는 촌민들과 함께 땀동이를 흘리며 열심히 일했고 휴식의 한때를 리용하여 밭머리에 앉아서 촌민들의 혈압을 재여주면서 건강상황을 자세히 알려주었다. 저녁이면 위생가방을 둘러 메고 촌에 계시는 환자들의 집을 돌아다니면서 진맥을 하고 건강에 관한 주의사항들을 알려주었다. 오빠는 어릴 때 중약뿌리를 캐서 팔 때부터 쌓은 의학상식들과 학교에서 배운 의료지식으로 마을 촌민들을 위하여 전심전력으로 복무하였다. 오빠는 의과대학생이 될 때부터 이미 의사는 반드시 그 습득한 학식과 치료수단으로 최선을 다해 환자를 위해 힘써야 한다는 의덕이 몸에 배인 것이다.

내가 소학교를 졸업하던 그 해에 오빠는 위생학교(지금의 의학원)를 졸업하고 국가의 통일 분배로 다른 현의 위생원에 분배 받았지만 얼마 안되여 고향마을과 가까운 석현진위생원으로 조동하였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나까지 온집 식구들은 리해를 할 수가 없었다. 주변에서도 안일하고 깨끗한 현급병원을 그만두고 왜 초라한 농촌위생원에 와서 고생을 사서 하는가 하고 물어보면 오빠는 “농촌위생원에는 할 일이 많고 나 같은 지식인을 수요합니다. 나는 촌민들을 위하여 달아 다니는 농촌의사가 더 좋습니다.” 라고 짤막하게 대답하였다. 남들은 리해하지 못해도 나는 오빠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오빠는 농촌위생원에서 촌민들을 위하여 복무하는 맨발의사로 되는 꿈을 향하여 용감히 첫걸음을 내디뎠다.

석현진은 도문시에서 20여리 떨어진 작은 진이다. 우리 고향집과도 거리가 멀어 오빠는 위생원 근처에 작은 세방을 맡고 만강의 열정으로 농촌의료사업을 시작하였다. 젊고 유망한 의료전업 대학생인 오빠가 석현진위생원으로 출근을 시작하자 위생원은 생기로 차넘쳤다. 오빠는 찾아오는 환자들마다 모두 제 집식구처럼 친절히 대해 주고 의술 또한 높아서 대뜸 환자들의 호평을 받았다.

오빠는 몇년간 꾸준히 위생원과 농민환자들을 위해 열심히 의사직책을 리행하였다. 오빠의 헌신적인 사업정신과 농민들을 위하여 복무하는 사업태도는 위생원 내의 직원들과 농민환자들의 절찬을 받았고 상급령도들의 인정을 받아 나중에 석현진위생원 원장으로 임명받아 드높은 사업열정으로 석현진위생원을 이끌었다.

오빠는 도문시위생방역소에서 정교수급으로 퇴직을 맞이하였다. 퇴직후 큰 도시 교수문진을 비롯한 여러 위생원들에서 요청전화가 쉴새없이 걸려왔지만 오빠는 높은 로임도, 훌륭한 대우도 모두 제쳐놓고 석현진에서 조금 떨어진 편벽한 농촌마을에 자리잡은 동흥촌의 촌위생소 농촌의사로 가기로 했다.

오빠는 날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점심 도시락을 사들고 모터찌클을 타고 울퉁불퉁 현도를 넘나들며 출퇴근을 시작하였다. 오빠의 얼굴에는 또다시 생기가 돌았고 예전에 석현진위생원에서 사업할 때의 사업풍격이 다시 드러났다.

오빠는 도문에서 석현진 동흥촌으로 15리길을 아침 저녁으로 낡은 모터찌클을 타고 오르내리면서 출퇴근을 시작하였다. 사람은 자기가 즐기는 일을 할 때 가장 행복하다고 한다. 촌부에 있는 촌위생소는 간소하고 조건이 좋지 않았지만 오빠는 퇴직하고 선택한 자신의 사업터를 사랑하였다. 오빠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빠짐없이 날마다 출퇴근 하면서 촌민들을 자신의 친인처럼 보살펴 주고 건강을 지켜주었다.

동흥촌위생소에 근무하면서 오빠는 촌의 의료위생사업을 깔끔하게 잘 하였을 뿐만아니라 짬만 있으면 촌간부들의 사업도 적극적으로 지지해주었다. 동흥촌은 각항 사업에서 우수한 성적을 올리면서 해마다 진정부, 시정부에서 표창하는 선진촌으로 되였다.

오빠는 어느덧 6년간 농민들이 수요하는 촌의사로 농민들을 위하여 복무하면서 2019년을 맞이하였다. 그해 12월에 전세계를 휩쓴 코로나로 인해 변방도시인 도문시는 다른 지방보다 더 강력한 방역규칙을 제정하고 추호의 빈틈이 없이 코로나 방역사업을 강화하였다. 농촌향진까지 그 범위가 넓고 방역임무가 가중하여 도문시 시내구역과 농촌 제일선에서 사업하는 많은 방역일군들이 급속히 수요되였다. 만 두기를 촌위생원에서 근무한 오빠는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 촌위생소 사업을 계속 견지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방역일군이 부족한 상황에서 오빠는 아무런 주저심도 없이 농촌방역 일선에 참가하겠다고 또다시 자원해 나섰다. 농촌 제일선 방역사업에 인원이 부족한 상황에서 오빠의 신청은 인차 허락을 받았다. 오빠는 또다시 동흥촌위생소에 임용되였다. 오빠는 예전보다 더 바삐 보냈다.촌민들의 병을 봐줘야 할 뿐만 아니라 상급 유관부문의 코로나 방역정책을 준확하고도 엄숙하게 전달하고 시달하여야 했다. 동흥촌이 봉페식 관리에 들어가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였기에 코로나 방역기간 거의 촌부에서 생활하였다. 간단한 식사로 끼니를 때우면서 날마다 조수 두명을 데리고 전촌 40여명 촌민들의 핵산검사를 책임지고 철저한 방역조치로 전 촌의 코로나 방역 임무를 철저히 잘 완수해나갔다. 편찮은 몸으로 한 여름날 두터운 방역옷을 입고 땀을 철철 흘리며 핵산검사를 하면서도 오빠는 언제 한번 힘든 내색을 내지 않았다.

코로나 방역은 임무가 막중하고 요구가 높았다. 오빠는 전 촌의 핵산검사를 책임지고 하루도 빠짐없이 열심히 해나갔다. 마을의 년세 많은 분이나 병약한 분들의 핵산검사는 집집이 찾아 다니면서 직접 가서 해드리군 하였다.핵산검사를 하러 다닐 때면 청진기와 혈압기를 가지고 다니면서 수시로 촌민들의 혈압과 혈당을 검사하였고 마을에 계시는 10여명의 년로한 로인들과 빈곤호의 집은 오빠 로임으로 약을 사다 드리군 하였다. 촌민들은 자연히 오빠 오기를 기다렸고 생활용품들을 사는 일도 오빠한테 맡기면서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오빠와 상론하고 결정하기를 좋아하였다. 오빠는 촌민들의 맨발의사이면서 촌민들의 로고를 헤아려 주는 가족같이 가까운 친인이기도 하였다.

그렇게 오빠는 하루도 빠짐없이 마지막 2년 반이란 시간 동안 방역일선에서 헌신적으로 사업하였다. 코로나 해제를 다섯달 앞둔 어느날 오빠는 너무나 아쉽게, 너무나 갑작스레 심근경색으로 돌아가셨다. 한달 전 나보고 “이제 코로나 방역이 끝나면 어머니와 큰 누나를 모시고 전국 일주 려행을 떠나자.” 라고 말하던 오빠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그 누구와도 작별인사 한마디도 못한 채 년로하신 어머니 먼저 홀연히 저 세상으로 떠났다.

년로하신 어머니를 모시고 다섯 남매를 거느린 우리 가문의 유일한 남자, 나를 든든하게 지켜주던 오빠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로 총망히 가버렸다. 오빠는 삶을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열애하는 의료사업터를 떠나지 않았다.

장례식 날 오빠의 고운 마음을 헤아려서인지 도문시는 봉페식 관리를 해제하였다. 빈소에는 찾아온 손님들로 웅성거렸다. 오빠 단위 옛동료들로부터 동창생, 그리고 사회의 많은 친구들이 오빠의 갑작스런 변고에 비통의 마음 안고 몰려왔다. 석현진 동흥촌의 촌민들과 시장의 로점상들, 그리고 장애인들까지 수십여명이 오빠의 빈소를 마지막까지 지켜주었다.


사념에서 벗어난 나의 눈에서는 눈물이 거침없이 흐르고 흘러 내려 옷 앞섶을 흠뻑 적셨다. 눈물을 훔치면서 앞을 내다보니 저 멀리 산굽이에 작은 주유소가 보였다. 주유소를 지나 오른쪽으로 굽이를 돌아 산 하나를 넘으면 동흥촌 촌부에 도착한다. 차는 가까스로 산길을 톺아올랐다. 오빠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이 산길로 모터찌클을 몰고 힘들게 다녔을 것을  생각하니 또다시 가슴이 미여지며 눈물이 또 앞을 가리웠다. 나는 가까스로 비통을 참으면서 촌부에 도착하였다. 촌부문앞에는 이미 촌간부들과 소식을 듣고 달려 온 십여명 촌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촌간부의 안내로 우리는 오빠의 촌위생실 사무실에 들어섰다. 항상 사업에서 빈틈이 없는 오빠의 사무실은 소박하고 깨끗했다. 작은 사무용 책상은 벽쪽에 기대여 있었고 코로나방역 핵산보고서들이 가쯘하게 책상 우의 책꽂이에 꼽혀 있었다. 맞은쪽 벽 한면에 책장과 약궤가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책장 안에는 의료방면의 서적들이 빼곡히 들어 있었고 약궤 안에는 많은 약들이 즐비하게 진렬되여 있었다. 촌장은 슬픈 눈길로 약궤 안의 약들을 들여다 보면서 말씀하였다.

“이 약궤안의 대부분 약들은 류원장님이 자기 로임으로 사다 놓은 응급약들입니다. 빈곤한 촌민들에게 늘 무상으로 발급해 주었습니다.”

“촌간부들은 물론 류원장님 본인이 아파도 이 약궤안의 약들만은 절대 다치지 않았습니다.”

곁에 서 계시던 부촌장이 한마디 보탰다.

나는 약궤안을 들여다보면서 약궤의 유리를 손으로 어루쓸었다. 환한 웃음을 지으시며 약궤안에서 약을 꺼내여 촌민들에게 나눠주는 오빠의 모습을 방불히 보는 상 싶었다.

나는 오빠가 쓰던 책상 앞에 다가가서 서랍을 열었다. 오른쪽 책상서랍에는 오빠가 평시에 드시던 허리 디스트에 복용하는 약들과 진통제들이 수두룩히 들어 있었다. 아픈 허리에 넓은 띠를 두르고 걸을 때마다 밀려오는 통증으로 엉거주춤하면서 걸어 다니던 오빠의 모습이 우렷이 떠올랐다. 가까스로 치미는 눈물을 참으면서 나는 나머지 서랍들을 모두 열어보았다. 상급 위생부문의 회의 전달 문건으로부터 촌위생소 사업총화까지 차곡차곡 가쯘히 정리되여 있는 서류들 속에서 나는 정교한 회색노트 하나를 꺼내 펼쳐보았다. 오빠가 평시에 일기 삼아 써오던 사업일지였다. 사업일지에는 오빠의 일상이 상세히 기록되여 있었다. 어느날에는 비가 너무 세게 내려 동흥촌으로 올라 가는 길이 막혀서 모터찌클을 겨우 끌고 산을 넘어 왕할머니 관절염 약을 사다 드렸고, 어느날에는 식물인으로 10여년 고생한 조할아버지 다리를 주물러 드렸으며, 어느날에는 수술을 앞둔 빈곤호 류할머니집에 가서 수술방안을 함께 작성하였다고 적혀있었다. 그외에 누구집에는 래일 두부를 사다 줘야 하고 누구는 돋보기를 바꿔줘야 하고 누구집 손주는 온라인 공부에 따라가지 못하여 방조해야겠다는 생활상의 자질구레한 일들도  적혀 있었다. 환자들을 제집식구처럼 생활의 구석구석까지 보살펴 온 오빠의 갸륵한 심성을 글줄마다에서 엿볼 수 있었다. 사업일지를 훑어보면서 나는 오빠야말로 시골 환자들이 믿고 의지하는 등대 같은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오빠가 쓰던 모든 유품들을 그대로 남겨두기로 하고 오빠의 사업일지만 품에 안고 일어났다. 누군가가 이제 또 오빠의 뒤를 이어 농촌 의사로 일할 것이라 굳게 믿으면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떠나는 우리를 향해 촌민들은 “동흥촌은 영원히 류원장님을 잊지 않습니다.” 하며 눈물로 배웅을 하였다. 오빠는 마지막 순간까지 석현진 동흥촌 촌민들로부터 “류원장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웠고 “류원장님”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의 인상 속에 영원히 남았다. 후시경으로 보이는 촌간부들과 촌민들이 손을 저으면서 배웅하는 모습이 점점 작아졌다. 차는 고르롭게 현도 길을 따라 달렸다. 나는 품에 안고 있던 오빠의 사업일지를 다시 펼쳤다. 첫페지의 “농민의 훌륭한 맨발의사로 되자”란 오빠의 친필 글씨가 한눈에 안겨왔다. 오빠는 직업도덕건설을 강화하여 의덕을 쌓고 전공을 연마하고 의술을 끊임없이 향상시키면서 농민들의 건강을 지켜주기 위하여 최선을 다 하였다. 사회주의 인도주의 정신으로 환자를 위해 최선을 다해 사업해온 오빠는 진정한 맨발의사가 되기에 손색이 없다. 오빠의 따스한 손길처럼 부드러운 바람이 나의 얼굴을 스쳤다. 오빠는 돌아 갔어도 오빠가 나에게 베풀었던 모든 사랑은 오롯이 나의 마음속에 남아 수시로 나의 앞길을 밝혀 줄 것이다. 푸른 하늘, 흰 구름 속에서 흰 가운을 입은 오빠가 위생가방을 둘러 메고 모터찌클을 타고 질주하면서 달리는 듯 싶다.

来源:延边日报
初审:金麟美
复审:郑恩峰
终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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