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서성 동천시 왕익구의 작은 마을인 량가원에는 ‘항일영렬 량희현의 생가’ 기념비가 세워져있다. 72세의 촌민 량삼성이 기념비를 정기적으로 관리하고 있으며 매년 음력설과 청명절에는 량씨네 후손들과 당지 촌민들과 함께 제사를 지낸다.

촌민들은 지금까지도 84년 전의 가렬처절했던 중조산전역을 기억한다. 당시 국민혁명군 륙군 제80군 신편 제27사 부사장이였던 량희현은 탄약과 식량이 다 떨어져 포로가 될 위기에 처하자 장렬하게 황하에 뛰여들어 43세의 생명을 바쳤다.
량희현은 1898년 섬서 동관(지금의 섬서성 동천시) 황보진 량가원촌에서 태여났다. 량희현은 어릴 때부터 영웅이야기의 영향을 받았으며 국가에 보답하려는 뜻을 세웠다. 1925년, 그는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향을 떠나 광주로 남하하여 1926년 3월 황포군관학교 제5기에 입학했다.
졸업 후 량희현은 북벌전쟁에 참가했고 항일전쟁이 전면 폭발하자 송호회전에 참전했으며 여러차례 군공을 세우면서 패장, 련장, 영장, 퇀장으로 승진했고 후에 신편 제27사 부사장을 맡았다. 27사는 섬서적의 병사가 대부분이였으며 황하 서안의 섬서 대려현 일대에 주둔해 산서를 점령한 일본군과 강을 사이 두고 대치했다.
섬서의 ‘동대문’인 동관현의 황하 기슭에 서서 바라보면 맞은편 중조산이 지세가 상당히 높은 곳에 있음을 보아낼 수 있다. 중조산 일대에 도사리고 있던 일본군은 여러차례 동관을 포격하고 롱해철도을 위협했으며 아군 대후방의 안전을 크게 위협했다.
1940년, 량희현 부대는 명령을 받고 황하를 건너 중조산지역에 들어가 일본군과 대치했으며 부대를 이끌고 여러차례 출격해 교통선을 파괴하고 창고를 폭파하면서 적에게 심각한 타격을 안겼다.
1941년 5월 7일, 일본군은 공공연히 중조산전역을 발동했다. 일본군은 10만명의 부대를 끌어모으고 비행기, 대포의 엄호하에 중국 군대가 주둔하고 있던 중조산의 여러 진지를 미친 듯이 공격했다. 당시 병에 걸렸던 량희현은 후방 병원에 가 치료를 받아야 했지만 일본군의 공격 소식을 듣고 의연히 부대에 남아 작전을 지휘하기로 했다. 량희현은 적군의 독가스 살포와 전투기 무차별 폭격을 무릅쓰고 진지를 순시하면서 장병들이 결사 저항하도록 격려했다.
5월 9일, 적군의 미친 듯한 진공하에 중국 군대는 싸우면서 퇴각하기 시작했다. 물자운송의 ‘생명선’인 황하나루터를 뒤에 두고 27사는 결사적으로 진지를 사수했지만 결국 여러갈래로 흩어지게 되였다. 위급한 정세에 직면하여 량희현은 나머지 부대에게 포위를 돌파하라고 명령했다. 량희현은 절벽 끝까지 물러나면서 격전을 벌렸으며 남은 총알을 적에게 퍼부은 뒤 몸을 돌려 거친 황하에 뛰여들어 순국했다.
2015년 8월, 량희현은 민정부가 발표한 제2차 600명 저명 항일영렬과 영웅단체에 선정되였다.
2022년 11월, ‘항일영렬 량희현의 생가’ 기념비가 량가원촌에 세워졌다. 동천시정협 위원이며 왕익구정협 상무위원인 리경군은 그때부터 량희현의 유물을 수집하고 량희현의 후손과 항전 로병사들을 탐방하면서 량희현 장군의 자료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는 기자에게 량희현의 형제중 여러명이 일본침략자와의 투쟁에 참가했으며 량가원촌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의연히 항일전장으로 달려갔다고 말했다.
황토고원에서 황하 기슭에 이르기까지 선렬들이 선혈로 일구어낸 민족 부흥의 물결은 막을 수 없는 기세로 장엄하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신화사 기자 정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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