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북성 안륙시 59세의 주문진은 어린 손자에게 주숙병의 용감한 항일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할아버지가 장렬히 희생된 장면을 이야기할 때 그는 갑자기 허리를 곧게 펴고 엄숙한 표정을 지었으며 목소리 톤이 한층 높아졌다. 84년 전 그 비장함이 다시 눈앞에 나타나는 듯했다.

1941년 7월 29일 아침, 호북 안륙은 비에 휩싸였다. 신사군의 돌파를 엄호하기 위해 일본 괴뢰군에게 포로로 잡힌 신사군 제5사 안수응 유격지대 지대장 주숙병이 연돈점으로 압송되고 있었다. 총받이에 부딪쳐 갈라진 그의 입가에서 피가 흘러내렸지만 그의 얼굴에는 조금의 고통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는 차거운 총검을 보고 갑자기 소리 내여 웃으며 “날 죽이기는 쉽지만 중국의 수많은 항일 인민을 다 죽일 수 있겠는가?”고 말했다. 웃음이 채 가시기도 전에 주숙병은 총검에 가슴이 찔렸다.
“주숙병은 안륙인민의 항일영웅이다.” 안륙시 서류관 부관장 곽세홍은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주숙병이 희생되기 전 3년간 그는 장사를 포기하고 군대에 입대하여 항일 무장을 조직하고 여러차례 적의 공격을 물리쳤으며 신사군이 안륙에 항일근거지를 개척하는 데 토대를 마련했다.
안륙은 호북 중동부에 위치해있으며 한때 신사군 5사의 지휘중심이였다. 1938년, 무한회전이 끝난 후 안륙은 함락되였다. 한때 이 지역에는 토비들이 창궐하고 일본 괴뢰군들이 횡포를 부렸다. 이 혼란한 국면에 당시 37세였던 주숙병은 깊은 감촉을 받았다.
주숙병은 학자 집안 출신으로 연돈점에서 잡화 장사를 했다. 의리가 깊은 그는 자주 가난한 이웃을 돕고 일본 침략자들에게 깊은 혐오감을 느꼈으며 안륙에서는 상당한 명망을 가지고 있었다. 사회가 혼란스러워지자 일찌기 나라에 보답하겠다는 뜻을 품은 그는 앞장서서 100여자루의 총을 모아 무장자위대를 설립했다.
당시 국민당 안륙 현장은 주숙병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려 했지만 그의 소극적인 항일 태도는 주숙병의 강한 반감과 증오를 샀다. 안륙이 함락된 후 일본 괴뢰군의 ‘유지회’도 주숙병을 매수하려고 시도했지만 그는 이를 매우 경멸했다.
1939년 6월초, 일본 괴뢰군이 안륙 갈림길 일대를 ‘소탕’했다. 주숙병은 정보를 얻은 후 부대를 집결해 매복했다. 갈림길은 백조산과 부하 사이에 위치해있으며 그날 괴뢰군이 도착했을 때 주숙병이 가장 먼저 첫발을 발사했다. 순식간에 총소리가 크게 울려퍼졌고 일본군과 괴뢰군은 갑작스런 매복에 대응하지 못하고 허겁지겁 도망갔다.
주숙병이 적을 물리쳤다는 소식이 호북성에 퍼졌다. 7월 하순, 신사군 하남성과 호북성 독립 유격지대는 련락원을 주숙병 주둔지로 파견하여 그를 신사군에 정식으로 초대했다. 주숙병은 중국공산당의 항일 주장을 오래전부터 경모했던 터라 주저하지 않고 과감히 가입했다.
7월 24일, 당시 신사군 하남성과 호북성 독립 유격지대 제1단체 정치위원이였던 주지견은 주숙병의 무장을 신사군 하남성과 호북성 독립 유격지대 1단체 3대대에 편입시켰고 주숙병이 대대장을 맡도록 했다.
그해 10월, 주숙병이 이끄는 부대는 경산성 동북신가를 기습 공격한 수백명의 일본 괴뢰군과의 신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는데 이는 신사군이 호북성 중부 지역에서 처음으로 거둔 중대한 승리였다. 그 후, 지대 당위는 그의 중국공산당 가입을 비준했다.
1941년 7월 28일, 주숙병은 주지견을 부하로 호송한 후 백조산 아래에서 적의 기습공격을 받았다. 포위를 돌파하면서 주숙병은 불행히도 다리에 총을 맞고 일본 괴뢰군에 체포되여 다음날 희생되였다. 주숙병을 위한 추도식에서 당시 신사군 제5사 사장이였던 리선념은 ‘부하를 건너 당신의 공적을 기리고 청산이 우리의 사기를 북돋아주기를 바란다.’는 대련을 썼다.
비록 영웅은 희생되였지만 정신은 영생불멸할 것이다. 수년간 안륙시는 주숙병 등 영웅들의 사적을 책으로 엮고 혁명유적지를 보수하고 렬사릉원을 건설했으며 홍색정신을 계승하고 홍색문화를 선양했다.
주문진은 어릴 때부터 어른들에게 할아버지 주숙병의 항일이야기를 전해들었다. 현재 왕의정진 당승촌의 촌주재 간부로서 그는 적극적으로 농촌의 홍색문화 관광 브랜드를 구축하여 안륙 항일 력사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다. 주문진은 “할아버지의 영웅담은 항상 저를 격려하고 있다. 우리는 아무리 멀리 가도 어디서 왔는지, 왜 싸웠는지를 꼭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안륙에서는 홍색정신이 대대로 이어지고 있다. 조붕진의 ‘70후’ 엽소오는 어릴 때부터 홍색문화의 영향을 받아 일찌기 입대하여 여러차례 표창을 받았다. 2010년,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블루베리 산업에 뛰여들어 촌민들의 치부와 소득 증대를 이끌었다. 또한 안륙 농업, 문화, 관광의 융합에 참여하여 홍색관광 거점을 구축했다. 엽소오는 “안륙은 홍색유전자가 비옥한 땅이다. 그 당시 항일 영웅들은 총을 들고 고향을 지켰다. 오늘날 우리는 실속있게 일하며 위대한 항전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신화사 기자 전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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