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고향을 떠나 상해에서 지루하게 병마와 싸웠던 나는 일년 만에 드디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공항에 도착해 비행기에서 내리니 마치 내 도착을 알기라도 한 듯 친구들의 문자가 줄지어 날아들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춥더니 네가 오늘 온다고 그러는지 날씨가 풀렸어. 고향이 널 반기는구나.”
“무사히 왔어? 정말 보고 싶었어. 시간 되면 꼭 보자.”
문자를 하나하나 읽어 내려가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가슴 한복판에 따뜻한 물결이 일었다. 나는 행장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짧게 답했다.
“그동안 걱정 끼쳐서 미안해. 나쁜 건 다 떼여냈으니 이제 오래오래 살 거야. 너희가 너무 보고 싶었어.”
출구를 나서니 마중 나온 오빠와 형님이 서있었다. 울컥 치밀어 오르는 눈물을 삼키려 애썼지만 목구멍이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오빠의 눈에도, 형님의 눈에도 맑은 이슬이 맺혀있었다.
그들은 나를 꼭 껴안았다. 그 품은 어머니 아버지의 품처럼 따뜻하고 포근했다.
“우리 막내, 정말 고생 많았다. 고향에 잘 돌아온 걸 환영한다.”
차 안에는 자주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깨려 입을 열면 목소리는 자꾸만 눈물에 반죽되여 축축해졌다.
점심은 오빠가 맛있는 불고기집에서 사주었다. 불고기를 먹으며 남편이 내 병세를 자세히 말하자 가족들은 모두 눈굽을 찍었다.
“나쁜 건 깨끗이 떼여냈으니 걱정 안 해도 됩니다. 이 동생 믿어주세요.”
나는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씩씩하게 말했지만 흐르는 눈물은 감출 수 없었다.
“그래, 내 동생은 내가 믿는다. 지금 의술이 좋으니 얼마든지 오래 살 수 있을 거야.”
오빠도 우렁차게 말했지만 눈가엔 눈물이 그득했다.
“몸이 정말 많이 야윈 것 같소. 좋은 걸 많이 먹소.”
올케도 눈가를 닦으며 말했다.
“큰 수술을 했으니 좀 약해지는 게 당연하지요. 곧 다시 건강해질 거예요.”
나는 해맑게 웃어 보였다.
옆에 앉은 남편이 부지런히 고기를 내 접시에 얹어주었고 맞은편 오빠와 올케도 앞다투어 내 그릇에 고기를 쌓아주었다. 순식간에 내 접시는 불고기로 산더미가 되였다.
“이걸 어떻게 다 먹어요? 벌써 배불러요. 그만 주세요.”
“많이 먹어야지.”
오빠는 기어이 내 그릇에 고기를 한 점 더 얹어주었다.
그때 선배가 문자를 보내왔다. 떡을 보내주겠다며 집주소를 알려달라는 것이였다. 떡이라는 말에 내 눈이 반짝 빛났다. 몇달 전 동아리 모임에서 선배가 직접 만든 입쌀떡이 떠오르며 입안이 촉촉해졌다. 나는 인차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집주소를 보냈다.
오후 네시쯤이 되자 문 밖에서 똑똑 노크 소리가 났다. 문을 열어보니 고급스럽게 포장된 닭곰이 배달된 것이었다. 잠시 어리둥절하다가 금새 깨달았다. 선배가 아름다운 거짓말을 한 것이였다.
나는 닭곰을 받고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닭곰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왜 거짓말을 하셨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주소를 안 알려줄 걸 그랬어요.”
“그래서 거짓말을 한 거예요. 내 마음이니까 맛있게 먹고 하루빨리 건강해지길 바랄게요.”
“잘 먹을게요. 정말 고맙습니다.”
상해에서도 그리웠던 고향 닭곰이였다.
저녁에 나는 한그릇을 게눈 감추듯 비웠다. 량이 너무 많아 남은 것은 잘 포장해 랭장고에 넣었다. 그 후 사흘 동안 닭곰을 먹으며 선배의 친절함에 감사하고 선배의 따뜻한 마음을 곱씹었다.
저녁을 먹고 설겆이를 마친 뒤 침대에 벌렁 누워 휴대폰을 열어보니 고중 동창들 위챗 단체대화방에 미자가 올린 글이 눈에 띄였다.
“경희가 좀 아프다는데 우리 래일 병문안 가서 경희를 토닥여주자.”
문자를 본 순간, 눈물이 터져 나왔다.
사실 나는 그간 동창들의 경조사엔 성심껏 참여했지만 언젠가부터 아프다는 리유로 모임엔 잘 나가지 못했다. 그런데 내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이렇게 먼저 마음을 열어주다니.
이튿날 아침 아홉시, 동창 아홉명이 우리 집을 찾아왔다. 그들을 보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평소 련락이 뜸했던 동창들까지 함께였다. 나는 집 근처 카페로 그들을 모셨다.
동창들은 “경희는 워낙 밝고 씩씩하니 꼭 병마를 이겨낼 수 있다.”며 용기를 주었고 어떤 음식을 피해야 하는지 상세히 설명하기도 하면서 하나같이 용기를 주었다.
20년 전 신장 이식을 받았고 몇년 전 또 큰 수술을 겪은 동창은 “마음가짐이 약보다 중요해.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해.”라고 하면서 긍정적인 마음으로 치료에 림하라고 격려했다. 붓기 찬 얼굴에 미소를 띠고 담담하게 말하는 그에게서 따뜻한 기운이 전해졌다. 반장이 두툼한 봉투를 내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
“동창들의 마음이야.”
순간 또 한번 눈물이 쏟아졌다.
우리는 건강에 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했다. 자주 만나지 못했지만 그날은 어느 때보다 편안하고 즐거운 시간이였다.
며칠 후에는 나의 자매들 위챗 단체대화방에 모임 공지가 떴다. 우리는 맛있는 점심을 먹고 부근의 카페로 향했다. 내가 병원에서의 일들을 털어놓자 자매들은 “얼마나 힘들었겠냐.”며 함께 아파했다. 그들의 따뜻한 위로에 내 마음은 다시 충전되였다. 상해에 있을 때도 길게 위로의 문자를 보내주며 나의 아픔을 함께 나누어주었던 사람들이였다. 오늘도 그들은 자매답게 나를 품어주고 위로해주었다.
오랜 친구들은 사흘이 멀다하게 우리 집 근처 맛집으로 나를 불러내 영양을 보충해주었다. 어느 친구는 “이제 좀 살 만해졌는데 이게 무슨 일이냐.”며 눈물을 흘렸고 그 눈물은 따뜻하게 내 마음을 적셨다. 먼곳에 사는 친구는 생선과 견과류를 보내주었을 뿐만 아니라 매주 한번씩 전화를 걸어 내 외로움을 달래주었다. 그와 길게 수다를 떨고 나면 내 우중충했던 마음은 어느새 밝아졌다. 친구는 내 기분을 둥둥 띄워주는 마법사 같았다.
내 남편, 내 딸, 내 사위는 나의 든든한 버팀목이였다. 아픔을 겪으면서 비로소 내가 가족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뼈저리게 느꼈다. 가족이 없었다면 나는 이미 무너졌을 것이다. 가족은 똘똘 뭉쳐 나를 구했다. 그 지극정성에 같은 병실 환자들도 부러워했다. 그들은 조선족 남편의 정성과 조선족 자식의 효성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암은 분명 두렵고 막막한 존재이다. 하지만 온몸으로 나를 감싸안아준 가족, 함께 울고 웃어준 형제자매, 발걸음을 아끼지 않고 찾아온 친척과 친구들이 있었기에 나는 지금 암과 당당히 맞설 수 있다.
몸은 예전보다 야위였고 쓰디쓴 약을 매일 삼켜야 하는 때도 있지만 이 모든 현실을 투정 없이, 원망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려 한다. 륙십이 넘은 나이에 암까지 안고 살아가니 여생이 길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내 하루는 내가 만든다. 내가 가장 캄캄하고 힘들 때 따뜻한 해살처럼 비춰주고 든든한 버팀목이 되여준 사람들처럼 나도 이제 삶이 버거운 이들에게 손을 내밀고 포근히 안아주고 싶다.
암 앞에서 좌절하지 않고 조금씩 나아지는 오늘에 초점을 맞추며 해맑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 그 자체가 다른 암 환자들에게 작은 희망과 본보기가 되였으면 좋겠다.
함께 울고 웃으며 나를 지켜준 은인들이 내 곁에 있기에 내 마음은 외롭지 않다. 오히려 마음 깊은 곳에서 온기가 가득 차올라 어느 때보다도 든든하고 따뜻하다.
그리고 이제 나는 그 따뜻함을 조금씩 나누며 나처럼 어둠 속에서 괴로워했을 누군가에게 빛이 되여주고 싶다. 내가 가장 지치고 숨 막혔을 때 손을 내밀어 나를 감싸준 사람들처럼 나도 이제 누군가의 든든한 힘이 되여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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