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공에 감도는 ‘옛 피리’의 부름소리

2024-03-18 04:20:29

무대에서 저대 연주를 하고 있는 전승인 리은희.

옛날에 이 악기는 신조라고 불렸다고 한다. 하늘의 부름소리라는 의미이다. 조는 조상할 조(吊)의 옆구리에 입구(口)를 갖다 붙인 회의자(會意字)이다.

‘신조’라 불리웠던 옛 피리의 모양.

“신조는 앞면에 지공(指空) 두개, 뒤면에 또 지공 한개가 있고요, 세 지공과 가까운 아래쪽 끝머리의 음공(音空) 그리고 대의 우쪽 꼭대기의 취공(吹空) 도합 5개의 음공이 있어요. 세로부는 취주악기입니다.”

김기복의 말에 따르면 신조는 시초에 제기(祭器)로 많이 사용되였다. 그러고 보니 저음의 처량하고 은은한 소리는 땅 우의 망자를 손저어 떠나보내고 고음의 맑고 투명한 소리는 멀리 하늘가의 누군가를 부르는 듯하다.

“앞면의 두 음공은 각기 唺과 慸, 뒤면의 음공은 焄, 취공은 闒, 기가 빠져나가는 아래쪽 끝머리의 음공은 錷이라고 부릅니다.”

김기복은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현 용화향(지금의 남평진에 속함) 혜장의 촌민이다. 1910년경 일제에 의한 한일합방시기 가족과 더불어 압록강을 건너 종국적으로 이곳에 정착을 했다.

혜장마을의 제관(祭官)은 따로 얘기하지 않아도 언제나 김기복이 맡았다고 한다. 염을 하고 입관을 하고 운구를 보내고 봉분을 쌓아올리는 가운데 신조의 소리는 삐삐~삘리리 하고 내내 그칠 줄 몰랐다. 이 기이한 소리는 마치 하늘 어디에 뭐라고 소통을 하는 듯했다.

신조와 더불어 제관이 부르는 후메이(呼麥)는 특이한 토납술(吐納術)로 인간을 천지만물과 하나로 어우른다. 후메이는 오늘날 몽골족의 특수한 민간 가창의 형식으로 세상에 알려지고 있다.

어찌했든지 상고시대의 이 ‘피리’ 모양을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김기복의 손자 김성찬이였다. 김기복은 1990년대말 거의 100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이에 앞서 악기 신조와 관련한 것들을 손자 김성찬에게 물려주었던 것이다.

당나라 때부터 사용되였다고 하는 김씨 가족의 악보에는 옛문자 ‘闒, 闟, 闧, 闥, 圐, 圖, 圆,  盷, 䯨, 蒐’로 신조 다섯 음공의 연주 지법과 숨, 기의 강약, 속도 그리고 혀와 입술 조절의 조합방법 등을 자세하게 적었고 일명 오지(五知)의 ‘扌, 丷, 宀, 勹, 㐈’로 신조 다섯 음공의 소리를 일일이 밝혔다. 이렇듯 부호와 문자로 기술하는 문자악보(文字譜)는 일찍 춘추전국시기(기원전 770~기원전 221)에 나타났으며 현존하는 대륙 최초의 문자악보는 남북조(420~529년) 때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후메이와 악기 연주를 합체한 신기한 ‘피리’는 까자흐인의 민족악기 스푸즈어(斯布孜额)에도 나타난다. 이 악기의 몸체는 옛날 초원이거나 그늘진 산비탈에 자라는 굵고 단단한 갈대로 제작되였다고 전한다.

김씨의 선조 역시 신조를 구리대로 만들었다고 한다. 구리대는 학명이 백지(白芷)로 습지에 자라는 흔한 풀이다. 시골에 가면 그늘진 바자굽에서 들판의 갈대처럼 쉽게 만날 수 있다. 한자 남짓한 구리대의 줄기에 아래우로 맞구멍을 뚫었는데 이 맞구멍의 안쪽 구멍에는 자잘한 솜털이 있어서 잡음을 없앨 수 있었다.


삐삐~삘리리 하고 갑자기 피리가 오래도록 울린다.

펑퍼짐한 산둔덕에는 금세 선민(先民)들이 옹기종기 모인다.

모닥불을 무덕무덕 지피고 짐승고기를 통째로 매달아 올린다. 미구에 고기를 덕지덕지 뜯으며 마음껏 먹고 마신다.

급기야 사람들은 불무지를 둘러싸고 소리소리 외치며 덩실덩실 춤을 춘다.



석기시대에 사람들은 날짐승의 뼈에 구멍을 내여 불고 이 소리로 인간의 신호를 전했으며 또 이 소리로 수렵물을 유인했다.

인간 최초의 악기 피리는 실은 이렇게 생겨났다고 사학자들은 말한다.

중국 상고시대의 치우부족련맹은 황제부족과 벌린 중원쟁탈전 탁록대전 후 그 대부분이 부득불 대륙의 서남과 서부, 동북부 일대로 이주했다. 그리하여 몽골, 로씨야 동부 일대에  피리는 스푸즈어 등 각이한 이름의 악기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악기 신조는 김씨 가족에 유물로는 전하지 않는다. 또 어느 문헌에도 그것에 대한 기록이 없다. 종국적으로 김씨 가족에만 알고 있는, 긴긴 세월 동안 대를 이어 제작과 연주, 음악의 비법이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오늘날 세상의 대부분의 피리는 참대피리이다. 참대피리는 음색이 좋고 제작 원가가 낮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기간 보관하는 데 무척 어려우며 발견된 유물은 거개 뼈피리거나 옥피리이다.

하남성 가호(贾湖)유적지에서 출토된 8000여년 전의 피리.

실제로 세상의 제일 오랜 피리는 날개뼈로 제작한 피리이다. 1986년, 중국 하남성 무양현 가호촌의 석기시대 고분에서 날짐승의 뼈로 만든 8000년 전의 피리가 발견되였다. 이듬해 또 출토된 7공 뼈피리는 약 9000년 전의 유물로 지금까지 세계적으로 알려진 제일 이른 취주악기로 된다. 이때 피리는 음공이 5공으로부터 8공으로 같지 않으며 일부 음공은 옆에 또 작은 음공을 뚫고 있었고 현대의 음조와 전적으로 일치했다.

참대피리와 연주가의 이야기는 뼈피리와는 달리 일찍부터 옛 문헌에 기록되여있다. 《사기》에 따르면 4000여년 전에 사람들은 참대를 잘라 피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때 “황제는 령륜(伶倫, 악관)을 시켜 참대를 채벌한 후 이를 꺾어서 피리를 만들어 불어 봉황의 울음소리를 내게 했다.”

진·한시기에 벌써 7공의 참대피리가 있었으며 이때 앞뒤 두 끝머리의 피리가 있었다고 한다.

피리는 아악(雅樂) 연주악기이다. 아악은 중국의 고대 궁중과 상류층에 연주되던 전통음악이다. 일본에 전입된 것은 다이호(大寶) 원년(701년) 설립된 가가쿠료(雅樂寮)와 내밀한 관련이 있다. 가가쿠료는 고대일본의 왕립음악기관으로 아악인재를 육성하는 기지이다. 가가쿠(雅樂)는 2009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등재되였다.

헤이안시대(平安時代, 794~1185), 피리는 일본에서 더는 희유물이 아니였다. 이때 일본사람들은 피리를 샤쿠하치(尺八)라고 부르고 있었다. 당나라 때의 려재가 만든 세로 부는 피리 ‘尺八’이 전입된 것으로 피리의 길이가 한자 여덟치를 뜻한 이름이다. 구멍이 정면에 여섯, 뒤면에 하나 있었고 세로 불었으니 일본식의 퉁소라고 해야 할가.

아무튼 피리는 반도를 통해 나중에 바다건너 렬도에 전입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정작 반도에 있었던 옛 피리는 샤쿠하치 같은 실물이 아닌 신화이야기로 전하고 있다.


신라 제 31대 신문왕(神文王)은 즉위한 후 아버지 문무왕(文武王)을 기리여 동해 기슭에 감은사(感恩寺)를 지었다. 바다의 큰 룡이 된 문무왕과 천신이 된 김유신(金庾信)은 합심하여 룡을 시켜 동해 기슭의 어느 한 섬에 대나무를 보냈다. 이 대나무는 낮이면 갈려 둘이 되고 밤이면 합하여 하나로 되였다. 신문왕은 이 기이한 소식을 듣고 현장에 거동하였다.

이때 나타난 룡은 왕에게 “비유하건대 한손으로는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지만 두손이 마주치면 능히 소리가 납니다. 이 대나무도 역시 합한 후에야 소리가 나는 것이니… 대왕님은 이 소리로 천하를 다스릴 징조입니다.”라고 말한다.

신문왕은 이 대나무를 잘라 피리를 만들었다.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나으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에는 날이 개고 바람이 멎으며 물결이 갈아앉았다. 그리하여 이 피리를 국보로 삼았으며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고 불렀다.


“만파식적은 이름 그대로 만개의 파도를 갈아앉히듯 온갖 재난을 다 물리치는 피리라는 뜻이지요.”

반도의 적지 않은 학자들은 대금(大笒)의 본원을 이 ‘만파식적’에서 찾고 있다.

대금은 죽부악기로 저대라고도 한다. 대금이라는 명칭이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반도 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권32 〈악지〉(樂志)중 신라악(新羅樂) 관련 항목이다. 〈악지〉는 신라 대금이 ‘당적’(唐笛)에서 왔다고 적고 있다. 따라서 반도에서는 저대라는 이름은 피리 적(笛)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중국력사에서 한나라 전에는 흔히 세로 부는 피리를 적이라고 일컬었다. 진한시기 이후에는 세로 부는 피리와 가로 부는 피리를 통털어 적이라고 일컬었고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되다가 당나라 때에 이르러서는 세로 부는 피리 지(篪)가 소(箫)로 불리우고 가로 부는 피리가 적으로 불리웠다.

저대는 구슬프고 신비한 소리를 내기도 하고 또 경쾌하고 맑은 소리를 내기도 한다. 제례악에 잘 사용되였으며 이를 제외하고 대부분 정악(正樂)민속악에 널리 사용되였다.

이주민들에 의해 대륙에 정착된 후 저대는 음악세계에서 더불어 변화를 거듭했다. 완전한 개공(開空) 상태로부터 반개공 상태의 악기로 변신하며 다시 완전한 페공(閉空) 상태의 악기로 탈바꿈을 하였다. 종국적으로 음공(音空)은 기존의 6개로부터 8개가 추가되여 14개로 되였다. 이중 10개는 열린 음공이고 4개는 닫힌 음공이다. 저대 주재료도 기존의 참대로부터 박달이나 자단, 흑단으로 바뀌였다.

오늘날 저대는 음역이 넓고 고정된 음고(音高)를 지니고 있으며 또 음량이 풍부하고 취공을 혀와 입술로 조절하여 음의 높낮이를 조절할 수 있기 때문에 대표적인 독주악기로도 자주 쓰인다.

리은희는 다양한 음색의 아름다움에 심취되여 저대 연주를 하게 되였다고 말한다.

“어릴 때부터 민족음악을 즐겨들었는데요. 우연히 저대 연주를 보게 되면서 이번에는 (아예) 저대 음악에 빠져들어간 겁니다.”

그리하여 리은희는 열두살 때 연변예술학교(예술학원 전신)에 입학한 후 저대 연주를 전문 선택하여 공부하게 되였다.

첫 무대공연은 독주였다. 고향의 연변TV 방송무대였다. 단박 하늘 높이 ‘그네’를 타고 하늘에 휘영청 날아오를 듯싶었다. 이때 연주한 음악도 ‘그네놀이’였다. 리은희가 고사리손으로 저대를 손에 잡은지 꼭 3년째 되는 1994년이였다.

저대의 세계에서 리은희가 타고 앉은 ‘그네’는 계속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리은희는 저대의 ‘저음구의 부드럽고 구성진 아름다운 음색’을 꾸준히 이어갔다. 이번에는 중앙TV의 무대 ‘민가의 중국’에 올랐고 한국의 MBC신년음악회에 등장하여 독주 공연을 했다.

2012년, 리은희의 저대연주는 전국민족악기연주콩쿠르에서 독주악기조의 최고상인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문화상은 중국문화부가 배우, 표현예술창작을 장려하기 위해 설립한 최고의 정부상이다.

와중에 저대는 중국의 무형문화유산으로 되였고 어느덧 이름 있는 저대연주가로 변신한 리은희는 종국적으로 저대의 주급 대표적인 전승인으로 선정되였다.

‘피리’와 ‘피리’의 주인은 이렇게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변화를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신연희 기자/김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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