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라상에 오른 떡-‘석과자’

2024-02-26 04:09:17

분명 찰진 떡인데 기어이 바삭바삭한 음식의 이름을 넣어 ‘석과자’라고 했다. 김성찬은 할머니가 이 떡을 빚을 때 그렇게 부르더라고 말한다. 할머니 정봉금은 103세의 장수자로 약 30년전에 이 떡을 빚어 손자에게 먹일 때 이미 93세의 고령이였다.

그 무렵 김성찬은 금방 다섯살 나이를 잡은 애송이였다. 그때 그 시절의 기억에는 언제나 쓰디쓴 초약이 샘물처럼 솟구쳐 물컥하고 있었다.

“맨날 약사발을 밀치고 투정하는 손자를 달래느라 할머니는 떡을 자주 빚었어요.”

그리하여 화룡 시골의 한 초가에서는 늘 세상만물이 다투어 떡으로 출현하였다.

옥토끼가 밥상 우에 퐁당퐁당 뛰놀았고 금붕어가 흰 쟁반에서 헤염을 쳤다. 뒤산의 푸른 소나무가 언제인가 시루에 뿌리를 내렸으며 하늘의 두루미가 금방 나무 아래에 앉아 날개를 접었다.

이윽고 솥에서 김이 자오록하게 서려 올라 운무처럼 온 세계를 뒤덮는다.

손자는 날마다 신나는 그 세계를 찾아 또 하나로 어울리고 싶었다. 그래서 할머니를 졸라 고사리손으로 그 세계를 빚기 시작했다. 조손 둘은 마냥 이마를 한데 맞대고 온돌 우에 오순도순 떡의 백년의 그림을 엮고 그렸다.

떡은 소년에게 그야말로 할머니가 선사한 재미있는 동화책이였다.

“옛날 임금님이 ‘석과자’를 빚는 조리책을 대감님에게 하사했단다. 그때부터 이 조리책은 남에게 전하지 않는 우리 정씨 가족의 보물로 되였단다.”

할머니가 손자에게 자초지종 설명하는 말이였다.

할머니는 어릴 때 가족에게서 석과자의 조리법을 특별히 전수받았다고 한다. 떡이라는 이름은 반도에서는 문헌상 1809년 빙허각(憑虛閣) 리씨가 엮은 생활 경제 백과사전 규합총서(閨閤叢書)에서 비로소 나타난다.

떡의 시초가 구경 언제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사실 떡은 오래전부터 반도에 나타나고 있었다. 어원적으로 떡은 옛말의 동사 찌다가 명사가 되여 찌기-떼기-떠기-떡으로 변화된 것이며 본디는 찐 것이라는 뜻이라는 게 학계 일반의 주장이다.

중국에서는 문헌상 춘추전국시대의 《주례(主禮)》에 ‘자(瓷)’와 ‘분자(粉瓷)’라고 하여 곡물을 쪄서 문드러지게 치는 떡과 친 떡에 콩가루를 묻힌 떡이 기록되고 있다.

어찌 됐거나 석과자라는 떡의 호칭은 시간적으로 볼 때 중국의 명청시기에 비로소 반도의 궁정에서 불린 것이다.

“송나라(宋朝, 960년-1279년) 때 대륙의 궁정 떡이 사절을 따라 반도에 전입되였다고 한다.”

큰백모 최애희가 김성찬에게 전한 이야기이다.

최씨는 시집을 온 이듬해부터 어머니 정봉금에게서 석과자의 조리법, 상차림과 이름 등을 습득했다. 얼마 전 80대 고령의 최씨는 석과자의 조리기술과 기타 자료를 김성찬에게 전부 물려줬다. 조부모가 김성찬에게 물려주도록 미리부터 점지하였기 때문이다.

최씨는 또 석과자라는 떡의 호칭은 기실 반도의 궁정에서 바다 저쪽 일본의 영향을 받아 지은 이름이라고 김성찬에게 말했다고 한다.

실제로 과자(菓子)라는 음식 이름은 일본 헤이안시대(平安時代, 794년-1192년) 렬도에서 널리 불렸는데 이 무렵 대륙의 떡이 견당사(遣唐使)를 통해 일본에 류전되고 있었다. 견당사는 기원 7세기초부터 9세기말까지 약 264년 동안 일본이 당나라 문화를 배우기 위해 선후 10여차 당나라에 파견한 사절단을 말한다. 당나라 때 일본에 전입된 떡은 속에 실과를 넣은 것으로서 일본인들은 이 떡을 속말로 그냥 ‘과자’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와는 달리 ‘석’은 반도의 고유한 음식 명칭이다. 토끼 같은 작은 짐승이나 꿩, 오리, 닭 또는 생선의 내장을 빼내고 통째로 말린 포(脯)의 일종이라는 것이다. 저장과 보관을 쉽게 한 이런 식품은 또 제사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제찬이다. 문헌상 신라 신문왕(神文王, 681년-692년)의 페백품목에 처음 등장한다.

그러고 보면 ‘석과자’는 포의 일종인 옛 이름 ‘석’과 렬도의 옛 음식 이름 ‘과자’를 조합한 신조어라는 최씨의 해석에 한결 무게가 실린다.

반도와 렬도 음식 명칭의 합체이지만 시초부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반도의 떡이 꿀과 홍탕을 넣는다면 렬도의 떡은 엿과 설탕을 넣는다. 찹쌀과 콩가루의 비례도 약간 다르다.

그런데 석과자는 어느 때부터인가 반도에서 깜쪽같이 사라진다. 어용 떡의 석과자가 반도에서 류실된 연유는 현재로선 여전히 알기 힘든 미스터리로 되고 있다.

“석과자는 먼저 찹쌀과 메밀 그리고 흰콩을 보드랍게 가루를 낸 후 꿀을 일정 비례로 넣어 반죽을 만듭니다. 이 반죽으로 삼라만상의 각기 모양을 빚어서 시루에 넣고 찌어내는 거지요.”

김성찬은 주방의 그릇에 담은 떡 준비물을 꺼내서 하나하나 설명했다.

“산딸기와 머루 그리고 속명 뱀풀이라고 하는 약초를 빻아 생즙을 만들어요. 이런 생즙을 리용하여 분홍색, 쪽빛, 보라색과 흰색 등 네가지 색상의 떡을 빚어냅니다.”

약 30년 전 석과자는 화룡의 현성 남시장에 한동안 선을 보인 적 있다. 김씨 가족의 어느 친지가 상차림으로 팔았던 것이다. 떡 12개의 가격이 인민페 10원이였다. 그맘때 입쌀 1킬로그람이 1원이였으니 싼 가격은 아니였다. 그러나 백화점에서 어쩌다 만날 수 있는 노른 색상의 ‘색과자’보다 훨씬 멋지고 맛 좋아 금방 남시장의 인기품목이 되였다.

떡은 옛날 반도에서 궁정 명물이였다. 왕과 왕비의 수라상에 올랐고 문무대신의 밥상에 올랐으며 궁정의 각종 연석에 올랐다. 진상하는 떡의 모양과 개수 그리고 의미 등 상차림에는 모두 궁정 례식과 이에 따른 엄격한 규정이 있었다. 쟁반 개수와 쟁반에 오른 떡의 종류, 개수는 각자의 신분에 따라 각각이였다. 이때 떡 품목을 잘못 올리거나 개수가 틀리면 밥상을 차린 상궁은 매를 맞거나 심지어 목이 잘렸다.

왕의 수라상에는 한줄에 세개씩 도합 세줄로 쟁반 아홉개가 놓이며 쟁반마다 떡 아홉개씩 올린다. 첫줄에는 해와 하늘, 달의 모양을 빚은 떡이 각기 놓이고 두번째 줄에는 산과 우주(별), 하늘, 세번째 줄에는 소나무, 두루미, 소나무를 빚은 떡이 각기 놓인다.

김성찬은 상차림을 그려가며 일일이 설명을 했다.

“줄 사이에는 또 작은 쟁반 네개를 따로 놓는데요. 계절과 연회 내용에 따라 각기 농사를 대표하는 쌀, 전쟁을 뜻하는 활과 칼, 칙지를 뜻하는 까치와 나비, 사냥을 떠날 때는 메돼지와 노루 등 산짐승 모양의 떡을 놓습니다.”

“작은 쟁반에는 혹간 인형을 빚은 떡을 담아요. 이 떡은 먹지 않고 땅에 묻습니다. 임금님의 몸에 생긴 병을 저리 가져가라는 의미입니다.”

왕비의 수라상에는 한줄에 세개씩 도합 두줄로 쟁반 여섯개가 놓이며 쟁반마다 떡 여섯개씩 올린다. 첫줄에는 메돼지와 노루, 두루미 모양을 빚은 떡이 각기 놓이고 두번째 줄에는 금붕어를 빚은 떡이 각기 놓인다.

“메돼지는 자식을 많이 낳으라는 의미가 되고 노루는 복을 많이 받으라는 의미가 됩니다. 두루미는 생명, 수명을 뜻합니다.”

“금붕어는 좋은 운수를 의미하는데요. 메돼지와 더불어 자식운이 더하고 노루와 더불어 복을 더하며 두루미와 더불어 수명을 더하라는 뜻이 됩니다.”

잠간, 제사상에 올리는 두루미는 구름이 실리며 또 수라상에 올리는 두루미는 립체 조각물이다.

문무대신의 상차림도 다른 대신들의 상들과 품목이 다르며 쟁반이 세개이고 쟁반마다 떡이 세개씩 오른다.

문신에게는 선귀(旋龜), 까치, 매화의 모양을 빚은 떡 세 쟁반이 각기 오르며 무신에게는 현무, 까치범, 산을 빚은 떡 세 쟁반이 각기 오른다. 문신은 임금을 도와 천하를 관리하며 좋은 소식을 꽃처럼 전하라는 의미이고 무신은 임금을 옹위하여 침략자를 물리치고 강산을 지키라는 의미이다.

문무대신과 왕비, 왕의 상차림 쟁반의 개수3, 6, 9는 천, 지, 인의 수자를 거듭한 수자라고 한다.

궁정의 어용 떡 이야기는 이로써 그치는 게 아니다.

“궁정의 어용 떡은 도합 4대 류형의 27종 81개입니다. 제사와 연회에 사용하는 떡이지요. 4품 이상의 정품관직 관원만 이런 떡을 쓸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왕실과 관원의 서재에도 떡이 등장한다. 탁자의 오른쪽에 붓과 벼루, 가운데 선지(宣紙)를 비치하며 왼쪽에 떡쟁반을 놓았다. “꽃 한송이가 달린 여섯 잎의 란꽃을 형상한 떡 세개를 올리는데요. 군자는 일편단심 임금에게 충성한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궁정의 어용 떡 차림상은 이름과 용처가 각기 다르다고 한다. ‘䣽安’과 ‘仾宦’은 각기 가을 탈곡을 전후한 임금의 제사 상차림 이름이다. 왕비는 제사 떡 차림상이 세개 있는데, ‘紫户’는 자식 출생 때 쓰며 ‘龢尌’는 자식 한돌 때 쓰고 ‘䧉璹’는 공주 12살 때 혹은 왕자 15살 때 쓴다. 떡 차림상의 이름은 전부 이처럼 난해한 중국 글자로 되여있다. 원체 떡을 빚기조차 힘들었던 그때 그 당시의 민초의 궁핍한 생활상을 그대로 그려내는 듯하다.

궁정의 음식 품목에만 있던 떡이 민간의 식탁에도 떳떳이 나타나게 된 것은 임금이 궁정의 떡 조리법 책을 정씨의 선조에게 특별히 하사했기 때문이다. 그때가 조선 중후반인 것 같다고 최씨는 전한다.

실제로 궁정의 떡 조리법을 가족에게 전한 정씨 선조는 분명히 조선시대의 관원이였다. 정씨 가족이 그를 부른 호칭인 대감(大監)은 이 무렵에 비로소 생겼기 때문이다. 대감은 조선시대 정2품 이상의 관직을 가진 현직자거나 산직자에 대한 존칭이였다. 정2품은 품계 서렬에서 제3위이며 동반은 문관에 해당하고 서반은 무관에 해당한다.

궁정의 어용 떡 특혜는 드디여 비방울처럼 민간에 찔끔 떨어진다. 원앙새 모양을 빚은 떡이 쌍으로 되여 신랑과 신부의 차림상에 각기 한 쟁반씩 오른다. 그러나 제사상에는 그냥 떡을 함부로 올릴 수 없었다. 궁정의 전용 음식이기 때문이다. 민간에서는 떡 대신 찹쌀지짐을 제물상에 올렸다. 이때 ‘떡’이 석판에 달라붙지 않도록 기름을 쏟고 앞뒤를 뒤집어가며 지지는 것이다…

  기자 신연희 / 김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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