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만강 기슭의 천평벌이 품은 ‘백종절’

2024-04-15 06:30:03

"오정묵이 갖은 노력을 다해 열어놓은 백종절은 지난해까지 14회째 이어져오면서 이제는 명실상부한 우리 지역 대표적인 민속축제로 덩치를 불렸다."


룡정시에서 30여킬로메터 떨어진 두만강 기슭에 천평벌이 드러누워있다. 옛날 개척민들은 물 좋은 고장을 찾아다니다가 맑은 샘물이 솟는 펑퍼짐한 곳에 이르면 샘물주변에 집을 짓고 살았다. 샘 ‘천(泉)’, 버덕 ‘평(坪)’, ‘천평’이라는 지명도 이렇게 나온 것으로 전해진다.

연길에서 룡정을 거쳐 개산툰에 있는 천평벌의 하천평까지 가는 데는 한시간이 푼히 걸린다. 마을에 다달으면 ‘어곡전’이란 글을 새긴 돌비석과 마주치게 된다.

백종절 전승인을 양성하는 오정묵.(오른쪽 첫번째, 리광평 촬영)

“어곡미가 나는 논이 바로 여깁니다. 얼핏 보기엔 별로 특별한 데가 보이지 않지만 이곳은 임금님에게 천거되였던 땅이랍니다.”

오정묵의 흥분한 목소리에 끌려 어곡전의 이야기에 저도 모르게 귀가 솔깃해진다.

오정묵은 농부가 아니다. 우리(연변) 지역에서 꽤 이름 있는 의사로 일찍 연변의학원을 졸업하고 세계보건기구 산하의 세계전통의학과학원 박사학위를 땄다. 그런데 땅을 다루는 ‘농부’로도 불리운다.

“청나라 마지막 황제가 먹던 쌀이 여기서 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로 여기다 하고 기어이 땅을 사려고 작정했습니다.”

2002년 7월, 자신의 건강문제로 사처에 벼농사를 지을 논을 수소문하던 오정묵은 비로소 어곡전과 운명적인 인연이 단단히 맺게 된다.

그때는 마침 부근 종이공장의 오염으로 농사가 잘 안되고 쌀이 잘 팔리지 않는 시(기)점이여서 땅을 사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계약을 마친 이듬해에 정부에서는 농업세를 줄이는 정책을 시행했고 환경보호부문의 발 빠른 대처로 오염문제도 해결을 보았다.

개구리가 폴짝폴짝 뛰노는 논바닥,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고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짓는 어곡전의 웃쪽 논에는 잉어, 아래쪽 논에는 게를 넣었다. 그렇지 않아도 불과 0.6헥타르가량 되는 이 논은 어딘가 특별했다. 부근의 논들은 땅이 거무스레한데 임금의 수라상에 쌀밥을 올렸었다는 이 논만은 유독 누르께한 색상의 땅이였다. 그리고 여기에서 나는 쌀은 다른 논에서 나는 쌀보다 맑고 향기가 진하다고 한다.

어곡전이 품고 있는 이야기를 좀 더 풀어놓자면, 개산툰진 광소촌에 자리한 어곡전은 동쪽으로는 두만강을 끼고 있고 서쪽으로는 국사령을 두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선구산성을 업고 있고 남쪽에는 군산이 춤추고 있다.

1922년생인 광소촌 상천평의 토착민 박태인옹의 회억에 따르면 천평벌은 원래 나무 한그루 없는 습지였단다. 그러던중 1890년, 조선 길주군에서 이주한 장씨가 천평벌에 개간의 첫 삽을 박았다. 19세기 60년대, 조선 종성군 하산봉에 살던 농사군 리영수가 개척민 제1세대로 등록된 비망록의 후담이다.

이곳의 입쌀이 ‘어곡미’로 수라상에 오른 건 위만주국 부의 황제 때가 처음이 아니였다. 그에 앞서 ‘어곡미’는 일찍 발해의 왕이 즐겨 먹던 쌀이였다고 한다.

옛날 이곳은 버들이 방천을 이루었고 인적이 드물었다. 늪에서 피여난 련꽃 향기는 먼 하늘의 천궁까지 풍겼다. 천녀는 그 향기에 취해 지상에 내려오며 이곳에 살던 부지런한 총각과 연분을 맺는다. 옥황상제는 천녀에게 벼씨를 주어 총각과 더불어 벼농사를 짓게 했다고 한다. 이들 논에서 난 백옥미는 천녀가 가져온 쌀이라 천녀의 부드러운 살결처럼 희고 맑았으며 향기 또한 천녀의 체취처럼 그윽하고 감미로웠다. 한입, 두입 건너 소문이 자자해진 로송(력사기재에 따르면 옛적에 하천평 일대를 로송이라 불렀다.)의 백옥미는 드디여 임금의 수라상에 오르게 된다. 임금은 백옥미를 맛본 후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우리 나라 백성들이 이 쌀을 다 먹어보자면 널리 심어야 할 것이로다.”

사람들은 하늘의 은혜를 입어 벼농사가 잘되는 곳이라고 이곳을 ‘하늘의 복판’이라고 불렀고 임금은 또 이 ‘하늘의 복판’을 지키기 위해 뒤산에 둘레가 4000메터나 되는 산성을 쌓았다고 한다.

전래된 이야기는 이렇고, 그때로부터 수백년 세월 속에 로송은 상전벽해의 개벽을 맞는다. 천평벌을 지키던 산성은 어느덧 페허로 사라지고 산 아래의 마을들도 연기처럼 가뭇없이 사라져갔다. 더구나 청나라시기의 천평벌은 봉금정책으로 200년 동안 인기척이 드물게 되였다. 19세기 중반, 조선의 리재민들은 살길을 찾아 두만강을 건넜다. 기재에 따르면 연변 경내의 벼농사는 1868년부터 두만강 기슭의 조선주민들에 의해 시작되였다고 한다. 천평일대에서는 20세기초에 수전농사가 시작되였다.

천평벌이 ‘어곡전’으로 소문이 나게 된 것은 최학출이 위만주국의 괴뢰황제의 수라상에 올릴 입쌀을 지으면서부터였다. 최학출은 머리가 좋은 사람으로 몇년간의 벼농사에서 벼농사의 관건이 모를 일찍 내는 것임을 알고 새로운 농사법을 연구해냈다. 당시 소문난 ‘유지온상 육모법’은 오늘의 비닐하우스육모법과 매우 비슷하다. 그때에는 비닐제품이 없어서 기름을 바른 크라프트지를 모판 우에 덮어주어 모판의 온도를 높여 벼모를 빨리 자라게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최학출의 논에서 자란 벼는 소출이 높았고 밥맛이 좋아 점차 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일제 간도총사령부를 통해 위만주국에서까지 알게 되였다. 위만주국에서는 사람을 파견하여 조사를 거친 후에 최학출을 신경(지금의 장춘)에 불러다가 상금 1000원과 벽시계를 주었고 최학출에게 1000평의 땅을 떼여주면서 수라상에 올리는 어곡미를 생산할 것을 위임했다. 최학출은 1943년 봄에 위만주국에서 조직한 농업고찰단 일원으로 일본에 가 벼재배기술을 견학하고 돌아온 후 인차 어곡전을 다루었는데 논갈이와 써레질만 소를 쓰고 대부분 인력으로 농사를 지었다.

벼모내기 때면 어곡전에서 마을의 처녀들이 하얀 버선을 신고 모를 냈고 가을할 때에도 흰장갑을 끼고 벼가을을 했다고 한다. 또 어곡전 주변에 울타리를 둘러 마을의 개나 돼지가 얼씬 못하게 했다.

어곡전은 탈곡도 맨 먼저 했고 벼를 찧은 후에는 마을의 처녀들을 조직하여 쌀을 유리판 우에 한줌씩 올려놓고 귀가 떨어졌거나 색이 다른 알들을 모조리 골라냈다. 이어 선별해낸 쌀을 검사한 후 합격된 쌀을 새하얀 주머니에 꼭같이 포장하여 ‘황제’에게 진상했다. 이토록 소문이 난 어곡미이기에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맛보기에는 부족하다. 재래식 자연농법을 쓰고 땅이 한정되다 보니 한해 소출이 3톤 미만이다.

2007년 8월 27일 광소촌에서 열린 첫 백종절축제에서 마을제사를 주최하는 민속학자 천수산. (좌1) (차광범 촬영)

어곡전의 이야기를 풀어놓은 리유는 2021년에 국가급 무형문화유산 명부에 실린 중국조선족 백종절(농부절) 축제행사가 2007년 음력 7월 15일에 이곳 어곡전 기지인 하천평에서 처음으로 시작됐기 때문이다. 중국조선족 백종절을 위해 백방으로 뛰여다닌 오정묵은 대표 전승인이다.

오정묵은 어곡전의 새 주인으로 되면서 깊은 력사를 가진 벼와 벼농사, 입쌀에 빠져버리게 된다.

“어곡전 개발을 두고 막상 시작을 하자니 여러모로 고민이 많았습니다. 브랜드 개발에서 가장 중요한게 문화라고 생각되였습니다. 그때 문득 떠오른 게 조상들이 농사를 지으면서 형성된 농경문화를 다시 부활시키면 어떨가 하는 생각이였습니다. 농부들을 위한 민속축제를 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오정묵이 어곡전에 더 풍부한 이야기를 곁들이기로 마음 먹은 그때가 2004년이였다. 구상과 기획을 마친 뒤 바로 오정묵은 천수산, 리성비, 림장춘, 박용일, 정두길, 김희성 등 각 분야 전문가들과 머리를 맞댔고 천수산이 음력 7월 15일 백종절을 광소촌의 명절 ‘농부절’로 지정할 것을 건의하면서 드디여 음력 7월 15일 백종날을 연변의 ‘농부절’로 하기로 했다.

그리고 2007년 8월 27일에 제1회 중국조선족 백종절 및 어곡전 민속제가 이곳 어곡전 기지 하천평에서 성황리에 펼쳐졌다. 첫 백종절 경축 활동은 두가지 내용이 포함이 되였다. 하나는 부락제사로 촌민들중에서 11명 대표가 선출되여 제관을 담당했고 제주는 정자관을 쓴 민속학자 천수산이 맡고 재관들은 귤색도복을 입고 머리에 흑립을 썼다. 삶은 돼지머리가 제물로 올려졌고 제사절차는 제관 입장, 분향 영신, 독축, 초헌, 아헌, 종헌, 제과 퇴장으로 나뉘였다. 다른 하나는 이날 농부장원을 선발하여 촌장이 농부장원 박무송에게 푸짐한 상금을 안기였다. 장원은 꽃가마에 앉아서 축제현장을 한바퀴 돌고 농악대가 춤과 연주로 그뒤를 따랐다. 따라서 백종절 호미씻기가 열을 올리고 농악공연이 대성황을 이루었다.

“첫 백종절이 펼쳐졌던 그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동안 잠자고 있던 우리만의 문화가 다시 생생하게 눈앞에 펼쳐지니 그동안 노력이 정말 헛되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에 뿌듯하기만 했습니다.”

이렇게 오정묵이 굽힘없이 밀고 나갔던 백종절은 마침내 무형문화유산으로 거듭났다.

2016년 제7회 백종절축제에서 농부장원 강철주를 꽃가마에 태우고 마을을 돌며 축하하는 농민들. (리광평 촬영)

백종절은 조선족의 고유민속명절이다. 백종절이 처음으로 기재된 력사문헌은 18세기 후반 류득공의 ‘경도잡기’를 증빙으로 삼는다. ‘백종’은 백가지 농작물의 종자를 관리하는 신선을 일컫는 말이다.

백종절에는 이런 전설도 전해져 내려온다.

멀고도 먼 옛날에 백종이라는 소몰이군 아이가 소를 먹이고 있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옥황상제가 내려오더니 거부기를 불러놓고 “거부기야, 오늘 밤에 석자 다섯치의 비가 내리게 하고 바람이 크게 불게 하라!”하고 명령하고는 하늘로 올라갔다. 이것을 몰래 엿들은 백종은 큰일이 날 것 같아 꾀를 썼다. 그는 옥황상제의 목소리를 흉내 내여 거부기에게 다시 ‘명령’을 내렸다. “비는 다섯치만 내리게 하고 바람은 불지 않게 하라!”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날 밤을 무사히 보내게 되였다. 이를 안 옥황상제는 대노하여 백종을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백종은 이미 각오하고 있었던 터라 소식을 듣자 그대로 바다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 그런데 그해에 마을에 풍년이 들었다. 백종의 덕분에 재난을 피면하고 풍작을 얻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 마을사람들은 백종을 기념하여 그가 죽은 날인 7월 15일을 백종절로 하였다.

룡정시는 2006년부터 어곡전 농부축제를 열게 되였고 이듬해부터 해마다 음력 7월 15일에는 백종절을 성역 이벤트로 치러오는 터이다. 2017년부터는 룡정시를 대표하는 축제로 자리를 굳혔고 2022년 8월 27일에는 자치주 창립 70돐을 맞으면서 룡정비암산풍경구에서 규모급 축제로 성황리에 개최되였으며 이날 오정묵은 룡정시정부로부터 ‘무형문화유산 전승공훈 모범인물’로 선정되였다. 입소문은 날로 커져가면서 룡정시 개산툰진(백종민속)은 2021년-2023년 ‘중국 민간 문화예술의 고장’으로 선정되였다.

2014년 장춘의 위만황궁 전시원에 설치된 '어곡전 전시관' 일각. (리광평 촬영)

2011년에는 어곡전 광장 두리에 시비들이 세워졌고 2014년에는 룡정시어곡전협회와 장춘위만주국황궁박물원의 어곡전 입쌀을 개발 리용할 데 관한 계약체결이 이뤄졌으며 2017년에는 최학출탄생 100돐을 기념하여 어곡전기념비가 새로 세워졌다. 2019년 8월에는 어곡전 광장에 중국조선족백종절(농부절) 전시관이 지어졌고 2021년에는 어곡전광장가에 백종절기념비가 새롭게 들어섰고 같은 해 10월에 어곡전 광장에 30메터 길이, 1메터 너비의 중국조선족백종절 거폭 예술사진 전시판이 전시되였다… 이처럼 우리 농경문화를 계승, 발전하려는 오정묵의 노력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조상이 이룩해놓은 소중한 전통농경문화를 보존하여 대대로 이어나가도록 하기 위해 무등 애를 써왔습니다. 시작하고 보니 일이 점점 커졌습니다.”

오정묵이 갖은 노력을 다해 열어놓은 두만강 기슭의 백종절은 지난해까지 14회째 이어지면서 이제는 명실상부한 우리 지역 대표적인 민속축제로 덩치를 불렸다.

  신연희 기자 / 김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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