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만송이 눈꽃□ 장초봉

2023-07-21 09:34:50

새벽부터 눈이 내린다. 내려서는 새하얀 이불이 되여 얼고 메마른 대지를 포근하게 덮어준다.

진호는 잠을 깼다. 삭신이 쑤시고 머리가 천근처럼 무거웠다. 아버지의 제사날과 겹친 유이의 생일로 사랑과 효도라는 갈림길에서 방황했기 때문이다. 부친의 산소를 택할 수밖에 없었기에 유이의 불만도 쌓여만 갔다. 올해까지 산소에 간다면 정말이지 유이의 인내심이 붕괴할지도 모른다.

창밖에서 함박눈이 펑펑 쏟아졌다. 장쾌한 폭포처럼 퍼붓는 저 눈송이들을 산소방문을 취소하는 구실거리로 만들 수는 없을가. 진호는 일어나서 일단 주방으로 나갔다.

“일찍 깼구나. 빨리 아침 먹고 출발하자.”

서두르는 엄마의 모습을 보며 진호는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유이와 오늘 공원에서 데이트하기로 약속했는데 어떡하지?

“아버지는 우리가 언제 오나 눈 빠지게 기다릴 거다.”

“엄마, 폭설이 쏟아지는데 산소에 갈 만해? 다리 아프다며?”

“괜찮아. 기여서라도 가야지.”

다리 통증 때문에 동네 마트에 다녀오는 것도 힘들어하면서 이 눈폭탄 속에 그 먼 교외의 산소, 더구나 차에서 내려 가파른 언덕을 올라야 하는 악산에 꼭 간다고 고집이다. 벌써 제사음식을 다 마련해놓고 선보러 가는 아가씨처럼 남편을 위해 몸단장도 단아하게 마쳤다.

식사가 끝나자 진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태 효도에 얽매여 녀자친구의 생일을 챙기지 못했던 미안함을 덜기 위해서라도 오늘은 그녀를 꼭 만나기로 작정했다.

“아들, 먼저 내려가서 차 시동 걸어.”

엄마가 재촉한다. 그래도 오늘은 안돼. 오늘마저 그녀를 만나주지 않으면 둘의 관계가 끝장날지도 모른다. 도로에는 어느새 눈이 발목까지 잠길 정도로 많이 쌓였다. 하늘이 통째로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눈 오는 날 사랑하는 련인과의 데이트! 상상할수록 랑만적이다.

엄마는 란간을 잡고 묵직한 짐을 쥔 채 절뚝거리며 아픈 다리를 간신히 옮겨 계단을 내려갔다. 이때 유이한테서 문자가 왔다.

“오빠, 유이는 아홉시에 약속 장소에서 기다릴게용.”

진호는 다급해졌다. 모처럼의 생일데이트에 신이 난 유이가 미리 도착할 게 분명했으니까. 그런데 엄마한테 뭐라 핑게를 대지? 산소까지 모셔다드리고 가자니 시간이 너무 빠듯하다. 생일 선물에 생화까지 사 들고 공원에 먼저 도착해 유이를 놀라게 할 이벤트를 하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역부족이였다. 진호는 고민 끝에 용단을 내렸다.

“올해만 엄마 혼자 산소 다녀오면 안돼?”

그 말을 듣자 엄마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 만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또 있니? 생전에 아버지가 널 금이야 옥이야 했던 걸 너도 알잖냐.”

“알지. 그러니까 지금까지 계속 갔었잖아. 이후에도 줄곧 갈거니까 이번만 부탁해.”

“다른 데 가더라도 엄마를 태워다주고 가려무나. 작년 만큼 만해도 혼자 택시 타고 가겠는데 올해는 정말 다리가 불편해서 그런다.”

사정하는 엄마의 눈가에 이슬이 반짝였다. 진호는 당황해져 한참이나 망설였다. 유이의 꽃 같은 모습이 그의 흔들리는 마음을 붙잡았다. 다리까지 불편한 엄마가 혼자서… 진호는 못내 걱정되였지만 단념하고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 무작정 뒤좌석에 짐을 실었다. 엄마한테 문을 열어주었다. 오늘따라 엄마의 다리는 유난히 무거워 보인다.

“진호야, 정말 이 눈길에 엄마 혼자 가라는 거냐?”

아들을 쳐다보는 로인의 눈길에 애원이 그득 담겨있다. 진호는 차마 그 시선을 마주 대할 수가 없어 못 본 척하고 엄마의 등을 차 안으로 떠밀었다.

“아들, 어딜 가더라도 눈이 많이 오니까 서두르지 말고 운전 조심해라. 알았지.”

진호는 순간 가슴이 뭉클했다. 이 말은 원래 아들의 입에서 나와야 한다. 당신의 안위보다 아들의 신변을 걱정하는 엄마한테 미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유이가 도착하기 전에 가야 했기에 못 들은 척했다. 그는 택시가 시야에서 사라지기도 전에 부랴부랴 꽃가게에 들러 생화를 사들고 약속 장소로 차를 달렸다. 그때 횡단보도를 건너던 한 로인이 길바닥에 맥 없이 넘어지는 것이 보였다. 엄마도 혹시 올리막길에서… 설마 무슨 일이야 있겠어, 오늘 하루 뿐이야.

진호가 공원에 도착해서 5분 정도 지나서야 유이가 그 찬란한 모습을 드러냈다.

“어머! 오빠 웬일이야? 생일날 데이트도 처음인데 나보다 먼저 도착하고.”

진호는 웃으며 “짜잔!” 하고 등뒤에서 장미꽃다발과 커플링을 꺼냈다. 뜻밖의 선물에 유이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함께 행복의 미소가 찰랑거렸다.

“오빠, 센스쟁이!”

유이는 어린애처럼 진호의 목에 동동 매달렸다. 그들은 소복한 눈을 밟으며 눈싸움도 하고 눈사람도 만들었다. 새하얀 눈 우에서 사이좋게 뒹굴다가 나란히 누워 터질 듯 하늘을 꽉 메우고 춤추는 눈송이들을 세며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했다. 부모님에게는 미안했지만 유이한테 오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는 효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사랑도 공존한다. 점심 때 그들은 사랑에 흠뻑 빠져 자그마한 생일 케이크를 가운데에 두고 소원도 빌고 알콩달콩 서로 먹여주기도 하고 심지어 케이크를 얼굴에 바르는 장난을 쳤다. 그때 갑자기 전화벨 소리가 다급하게 울렸다.

“119구조댑니다. 모친께서 산행중 발을 삐끗하면서 굴러떨어져 머리를 심하게 다쳤습니다. 수술중이니 빨리 xx병원으로 오세요.”

맙소사! 설마 했던 일이 끝내는…

혼란한 정신상태에서 어렵게 수술실에 도착했으나 엄마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진호는 홀연 눈앞이 캄캄해졌다. 청천벽력 같았다. 세상을 다 잃은 듯한 기분이였다. 진호는 엄마를 혼자 보낸 자신을 후회하며 몸부림 치면서 오열했다…

눈발은 갈수록 더 촘촘하고 굵어졌다. 드넓은 허공에서 천만송이의 눈꽃들이 나비처럼 폴폴 날아다닌다. 동토를 눈 이불로 품어 봄이 되면 녹아내려 새싹을 틔워 길러내는 눈꽃들은 어려운 가정형편에서도 진호를 낳아 기른 엄마를 닮았다. 눈꽃들은 진호의 얼굴에서 녹으며 눈물이 되여 입안으로 흘러든다. 엄마의 달콤한 젖처럼…

엄마,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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