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밤에 병원에서 간호사 당직을 서고 아침에 집으로 돌아온 애기가 금방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데 시어머니가 문을 떼고 들어섰다.
-이거 며느리 자는 거 깨운 게 아닌가?
-아니예요. 어머니.
애기는 요즘 들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시어머니가 별로 반갑지 않았지만 얼굴엔 웃음을 바르느라 애를 썼다.
-꽃을 사려구 저 앞에 꽃가게 들렸더니 아직 문을 열지 않았네…
‘아니, 아침부터 무슨 꽃타령일가?…’
애기는 못들은 척 눈등만 비볐다.
-며느리, 빨래할 거 있으면 내놓게나…
-호… 없어요.
-먹고 싶은 건 없구?…
-없어요
-먹고 싶은 게 없다면 입덧을 하는게 아닌가?…
애기는 그 입덧소리가 무척 귀에 거슬렸다.
이방저방 기웃거리던 시어머니가 마침내 집을 나갔다. 그러자 꽉 막혔던 숨통이 활 열리는 것 같아 애기는 두 팔을 벌리며 벌렁 침대에 드러누웠다.
-엄마!
애기는 친정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 이 세상에서 허물없이 아무 말이나 할 수 있는 사람은 친정엄마 뿐이였다.
-엄마! 난 요즘 엄마 친구 시어머니 때문에 스트레스를 얼마나 받는지 모르겠어요! 어제는 글쎄 짬을 타 씻으려고 남편 것과 내 속옷을 침대 밑에 꿍져넣었는데 빈집에 오셔서 그걸 어떻게 뒤져가지고 빨래까지 해서 베란다에다 널어놨지 뭐예요?! 얼마나 부끄럽고 망신스럽던지… 그리고 요즘 들어선 입만 열면 듣기도 싫은 입덧타령을 하거든요. 엄마도 알지만 우리 부부는 결혼해서 3년내엔 아기를 가지지 않기로 했잖아요, 그런데 왜 저러시는지 통 알고도 모르겠어요…
신혼생활이 석달째 접어드는 애기가 처음으로 속에 있는 불만을 친정엄마한테 늘여놓고 있는데 엄마쪽에선 이렇다 저렇다 응대가 없다.
-엄마, 제 말 듣고 있어요?
- 며느리… 전화 잘못 걸었네.
‘어머나!’
애기는 전기에라도 닿은 듯 소스라치게 놀랐다. 오늘 아침 애기 머리엔 시어머니에 대한 불만만 한광주리 차있다 보니 친정엄마한테 전화를 한다는 게 그만 시어머니 번호를 잘못 눌렀던 것이다.
애기는 단통 속이 한줌만해서 어쩔바를 몰랐다.
욕을 먹든 매를 맞든 그래도 한몸을 맡길 곳은 친정집이였다. 애기는 승용차를 몰고 한 시내에 있는 친정집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친정집은 비여있었다. 애기가 친정엄마한테 전화를 넣었더니 친정엄마는 지금 네가 사는 신혼집 근처의 어느 거리에 있는데 면바로 너의 시어머니를 만나서 한창 얘기중이라고 한다.
‘저런! 올 건 빨리도 찾아오네.’
애기는 발등에 당장 불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엄마?
마침내 친정엄마가 집에 돌아오자 애기는 엄마의 얼굴기색부터 살폈다.
-저의 어머니 분해서 펄펄 뛰신 거 맞지?
-야가 지금 무슨 소릴 하니? 네 시어머니 뭐가 분해서 펄펄 뛰여?
-그럼 저를 두고 무슨 말 안하시던 가요?
-별 말 없던데… 왜? 네가 뭘 잘못했나?
애기는 가슴에 얼어들던 시름이 훌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순간, 시어머니는 보기보다 속이 깊고 입이 무거운 분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후련해났다.
-방금 거리에서 너의 시어머니를 봤는데 말이다…
이야기를 꺼내는 친정엄마의 얼굴이 어두웠다.
-너의 시어머니 손에 글쎄 솥뚜껑만한 생일케익이 들려있지 않겠니? 그래서 누구 생일이냐고 물었더니 뭐라 하는지 알어? 누구 생일이긴 오늘 우리 며느리 생일이지 이러지 않겠니… 기가 차서, 네 생일이 언젠데?…
-어머나… 오늘 아침 우리 집에 와서도 꽃을 사려구 했는데 꽃가게 문을 열지 않았더라고 하시지 않겠어요…
-저것 보지? 애야 그 뿐만 아니다. 며칠 전에도 나한테 전화가 와 밍크코트를 사서 며느리를 주겠다고 하길래 자네 뭐 잘못 먹은 거 아니야? 겨울도 다 지나고 봄이 오는데 지금 무슨 밍크코트를 사? 라고 했더니 그런가? 하며 무안해하더구나… 그래서 너한테 하는 말인데 내가 보기에 너의 시어머니가 혹시 그 몹쓸 병에 걸린 거 아니야?
-그 병이라니요? 혹시… 치매?
친정엄마는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너의 시어머니 뇌경색이 있다는 건 너희들도 알고 있지?
-예, 결혼 전에 남편이 저한테 말하더군요.
-그런데 너희들이 아직 모르는 거 있다. 네 시어머닌 뇌경색 뿐만 아니라 대뇌가 위축되는 증상도 있단다. 그런데 그것만은 제발 아이들한테 비밀로 해달라고 손이야 발이야 하길래 내 여태 말을 하지 않았던거다… 의사들이 그러는데 대뇌가 위축되는 환자들은 치매에 걸릴 확률이 아주 높다더구나…
친정엄마의 이야기를 듣는 애기는 너무 긴장해서 손에 땀을 가득 쥐였다.
친정집에서 나온 애기는 승용차 운전석에 오르자 시동은 걸 념도 하지 않고 급급히 남편한테 전화부터 넣었다.
-동자씨?
-그래!
남편이 전화를 받았다.
-전 오늘 어머니한테 아주 큰 잘못을 저질렀어요.
-무슨 잘못을 했길래?
-그 일은 저녁에 동자씨가 퇴근해 오면 자세히 이야기 할게요. 그보다도 저가 지금 급히 전화를 하는 리유는 따로 있어요. 동자씬 래일 출근을 못한다고 오늘 당장 회사에 청가를 맡아야 해요.
-왜, 무슨 일인데?
-동자씨도 어머니께서 머리에 뇌경색이 있는 줄만 알지 대뇌위축증상도 있다는 건 몰랐지요?
-대뇌위축? 그런 말 못 들었는데…
-그것 봐요. 래일 당장 어머님을 모시고 제가 근무하는 병원에 가야 해요. 방금 친정엄마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가능하게 어머님 치매가 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래서 래일 전문검사를 해서 그 병이 아니고 그저 건망증이라면 더없이 반가운 일이고 만약 정말 그 병이라해도 아직은 초기일 테니 빨리 치료에 접어들고 약만 제때에 쓴다면 치매를 지연시킬 수도 있고 병세가 호전될 수도 있을 거래요.
-알았어, 내 당장 청가를 맡지!
-그리고 동자씨! 저는 방금 아주 중요한 생각 하나 했거든요.
-또 무슨 생각?
-우리 당장 아기를 가지자요… 전 하루라도 빨리 어머니 품에 당신이 그렇게도 보고 싶어하는 손군을 안겨드리고 싶어요…
-여보, 고… 마워!
남편은 목이 메여 말을 잇지 못했다.
…
이튿날 아침, 애기와 남편은 어머니를 차에 모시고 애기가 근무하는 병원으로 향했다. 남편은 앞에서 운전을 하고 애기는 뒤좌석에 시어머니와 나란히 앉았다. 시어머니가 슬며시 애기의 손을 쥔다.
-며느리…
-예?
-요즘 입덧을 하지 않는가?
-호호…
애기는 시어머니 얼굴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 저 정말 입덧해요!
-엉, 그래?
찰나, 시어머니의 얼굴이 보름달처럼 환해진다. 그러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자 차를 몰던 남편이 얼른 엄지손가락을 애기에게 펼쳐보인다. 보매, 시어머니는 아직 병원 문 앞에 가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치매가 나아지고 있는 것 같았다.
- 많이 본 기사
- 종합
- 스포츠
- 경제
- 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