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사랑(외 4수)□ 허련화

2024-03-15 05:45:36

아버지 사랑이 산처럼 크다니요?

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사랑은

한낱 자잘하고 시시한 것들 뿐이였습니다.


어릴 적 따뜻한 이불 밑에서 꽁꽁 언 내 몸을 따뜻한 체온으로 녹여주면서 재미나는 동화를 들려주신다든가

월급날은 어김없이 만화책 두권을 들고 오신다든가

시시때때로 내 작은 엉덩이를 톡톡 다독이면서 누구 딸이냐고 묻고는 아빠 딸이라는 당연한 대답을 들을 줄 알면서도 매번 심히 좋아하신다든가

수학이며 어문이며 한어며 백점짜리 기말고사 시험지 석장을 가지고 온 날 내 손을 잡고 가 난생처음 파이내플 하나를 사주셨다든가

나를 바라볼 때는 눈매가 한없이 부드러워지신다든가

한번도 나무람하신 적이 없다든가

날마다 내 이부자리를 펴고 개여주셨다든가 등등…

하여튼 그저 그런, 돈도 별로 안 들고 힘도 별로 안 드는 시시한 것들 뿐이였습니다


아버지 사랑이 산처럼 크다구요?

내 아버지 사랑은 그저 공기나 물처럼 심상했는데요.

그래서일가요?

아버지를 생각하면 나도 그저 눈물이 흐를 뿐이예요.

아버지에 대한 내 그리움도 공기나 물처럼 심상한가 보죠


천장


독수리들이 초대받은 손님인 양 웅기중기 떼를 지어 모여섰다


천장사의 번개 같은 칼날과 도끼질에

화선지에는 붉은 물감이 튕기고 꽃이 화려하게 피였다가

드디여 꽃잎이며 꽃술이 랑자하게 피를 흘리며 널리고

울컥울컥 짙은 숨결 뿜어내면서


그리하여 꽃향기는 봄날 아지랑이처럼

붉은 꽃잎 사이로 피여오르려는 찰나


둥둥 북소리는 울리고

오색 경번은 바람에 펄펄펄 나붓기고

금빛 경통은 빙글빙글 끝없이 돌아가고


천장사의 손길 따라

독수리들은 정중하게 달려와 꽃잎과 꽃술을 쪼아 삼켜

천지간의 한 륜회에 참여코


꽃향기는 추레한 육체의 옷을 벗어버린 령혼처럼

맑은 하늘가를 맴돌며 맴돌며

다른 하나의 륜회를 그리네



계란


저녁식사를 준비하면서

계란을 어떻게 드시겠냐고

어머니한테 물었더니

삶은 계란을 드시겠다고 하십니다

묻지도 않은 말을 딸애가

난 계란볶음! 하고 웨칩니다


친정어머니는 삶은 계란을

딸애는 계란볶음을 원합니다


어머니는 며칠 뒤에 고향에 돌아가십니다

딸애는 한달 뒤에 대학에 갑니다


이제까지 함께 했던 세월은 어머니가 길고

앞으로 함께 할 세월은 딸애가 길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은 나를 낳아 키워주셨고

한 사람은 내가 낳아 키웠습니다


한 사람은 나의 과거이고

한 사람은 나의 미래입니다


그리고 오늘 저녁에는 계란을 먹습니다



대역불경죄


우리 시아버님, 시어머님을 병아리 같으시다고 하면,

아니, 그러니까, 우리 시아버님, 시어머님을 병아리같이 귀여우시다고 하면


대역불경죄에 걸리려나?


사실은 아주 쫌 그러신데…


아참, 나두 잘 모르겠다



모래그림


내가 어린아이일 적에는

할머니는 원래부터 할머니였고

큰어머니는 원래부터 큰어머니였고

어머니는 계속 어머니고

나와 언니와 동생네는 계속 조무래기들인 채로

그렇게 천년만년 살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아이인 것에 은근 불만스러워서

아직 시집가지 않은 작은 이모쯤이면 참 좋을 것 같았습니다.

그때는 세상이 네모밥상마냥 아주 든든했고

날마다 비슷한 하루여서 지루할 지경이였습니다


그런데 밥상은 절름발이 의자처럼 전혀 든든하지 않았고

그새 시간은 모래시계처럼 살살 빠져나간 것입니다

아니 시간은 실바람처럼 솔솔 불면서

뒤쳐진 우리의 삶을 흔적도 없이 지워버렸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선 새로운 그림을 자꾸만 그려냅니다

새로운 그림도 신선해서 좋긴 하지만

감쪽같이 지워진 옛 그림들이 그리운 건 어쩔 수가 없습니다

나도 이제 지워질 것이지만

  지금은 어느 아이 눈에 원래부터 큰어머니일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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