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집을 태우는 불의 춤 그리고 땅을 밟는 가락

2024-04-01 07:11:01

“어찌했든 이때면 온 마을은 남녀로소가 한데 어울리는 큰 잔치를 벌렸으며 서로의 정을 돈독히 하는 장을 엮었다.”

2010년 두만강변의 삼합진에서 마을사람들을 취재하고 있는 리광평(좌1).


“어, 달이 떴네, 달이 떴소!”

갑자기 누군가 환성을 올렸다. 마을 자락의 큰 마당은 대뜸 환락의 도가니에 빠졌다. 달집의 여기저기에 뻘건 불이 치솟기 시작하고 마당의 이곳저곳에 흥겨운 춤가락이 벌어졌다.


‘달집태우기’ 놀이는 안도현 신툰의 특유한 민속놀이였다. 신툰은 이주민의 집거촌으로 약 100년 전 강 건너 멀리 합천, 밀양, 거창에서 집단 이주하여 이룬 경상도마을이다. 아직도 현지에는 경상남도의 사투리를 쓰는 토박이들이 적지 않다.

일명 사진작가로 불리는 리광평이 ‘달집태우기’ 놀이를 보고 촬영하게 된 것은 2000년 2월의 정월 대보름날이였다.

“그날의 놀이로 특별히 벌어진 마을의 행사는 말 그대로 불의 춤이였습니다.”

오늘도 그날의 놀이는 어제처럼 리광평의 흰 기억에 살아 생생하다. 당시 리광평은 안도현과 이웃한 룡정시의 문화관 관장이였다.

작달막한 체구의 이 로인에게는 언제나 무한한 활력소가 넘치는 듯했다. 그는 연변 조선족 전통문화에 대한 사랑으로 벌써 10여년 동안 늘 산과 강을 넘나들며 현지를 찾아 그곳의 독특한 풍속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오늘까지 그는 선후하여 100여개 촌과 마을을 답사하고 600여명의 로인을 탐방했으며 그들과 더불어 많은 민속활동에 직접 참여하여 수만점에 달하는 희귀한 사진자료와 200여만자에 달하는 귀중한 구술자료를 남겼다.

“신툰은 집단이주의 마을인데요. 참으로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희귀한 게 많았어요.”

리광평이 사진기를 메고 일부러 이웃 현의 마을을 찾은 것은 따로 리유가 있었다. 이주민들은 반도 옛 고향의 단체 행사 놀이를 그대로 새 삶의 터전에 갖고 왔고, 행사는 옛 고향 때처럼 기타 지역과 양상부터 사뭇 달랐지만 나름 대로 고향처럼 별도의 체계를 잡고 있었다.

“인상에 제일 깊은 건요, 신툰의 ‘줄다리기’와 ‘달집태우기’였습니다. 저는 어릴 때 안도에서 생활했지만 ‘달집태우기’ 놀이구경은 난생 처음이였습니다.”

‘줄다리기’는 신툰은 물론 부근의 홍기촌 등 지역에도 류전된 시간이 아주 길다고 전한다. 이런 마을에서는 ‘줄다리기’의 놀이시합이 자주 벌어졌으며 나중에 이 놀이는 길림성 성급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였다.

이날 안도현 현성에서는 한족의 양걸춤과 조선족의 마당놀이 등 경연이 있었다. 신툰의 마당놀이가 당연히 1등상을 독차지했다. 마침 신툰이 설립된 50돐이 되는 때라서 신툰사람들은 더구나 흥이 났다.

동네사람들은 큰 마당에 달집을 짓고 북장단을 울리며 흥을 올렸다.

“길이가 5, 6메터 되는 이깔나무를 한데 동여놓아 삼각의 귀틀집 모양을 만들어요. 나무기둥에 벼짚 묶음을 동여매고 솔잎과 솔가지를 귀틀집에 넣어 채워요. 그리고 귀틀집 우에는 둥근달을 크게 그려 걸어놓습니다.”

리광평은 손짓발짓을 해가며 흥미진진하게 설명을 했다.

귀틀집의 둥근 달과 하늘의 달은 서로 마주 바라본다. 전하는 데 의하면 정월 대보름날 ‘달집’의 불길과 색갈, 불길의 방향에 따라 새해 농사와 인간의 새해 길흉이 결정된다고 한다.

불길이 싹 꺼지면 이날의 ‘달집태우기’ 놀이도 끝난다. 이때면 일부 사람들은 특별히 달집의 불씨를 가져다가 집의 아궁이에 넣는다고 한다. 새해 한해 동안 집안이 이 달집처럼 활활 타오르라는 의미를 가진다고 한다.

이 풍속은 조선족 농부들이 집안의 안전과 건강, 동네의 조화로움을 위해 기도하는 것으로 정월 대보름날 진행하던 마을의 전통적인 의례행사이다.

이날이면 사람들은 큰 마당에 달집을 짓고 하늘에 달이 두둥실 떠오르길 기다린다. 이윽고 마을 좌상 어른이 검은 하늘을 얼핏 쳐다보더니 ‘댕~’ 하고 징을 한번 크게 두드린다. 그러자 마당에 기다리고 섰던 사나이 몇몇이 귀틀집을 빙 에돌며 불더미를 지핀다. 귀틀집은 대뜸 불의 춤으로 활활 타오른다. 그리고 마을사람들은 불타는 달집 주변에 끼리끼리 모여 손을 맞잡고 정성껏 소망을 빈다.

달제사는 실제상 ‘달의 신’에 대한 인간의 숭배활동으로 옛날부터 행해져왔다. 달제사는 한마디로 달 존숭과 미래에 대한 인간의 아름다운 축원을 뜻한다.

“달집의 불길이 크고 서쪽으로 기울면요, 새해 농사가 잘되고 한해 운수가 대통할 징조라고 해요.” 리광평의 말이다.

1950년대 안도현의 시골에서는 정월 대보름날이면 이런 행사놀이가 늘 있었다. 리광평은 그가 살고 있는 룡정시의 삼합 일대와 이웃 화룡시에도 한때 이런 풍습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는 얘기하다가 삼합진 북흥촌의 ‘달집태우기’ 놀이에서 여든살의 장경락 로인을 만났던 정경을 새삼스레 기억에 떠올리기도 했다.

2010년 2월 정월 대보름날, 룡정시 개산툰진 광소촌에서 달집 주면을 돌며 춤을 추는 농부들.

2006년, 룡정에서 무형문화유산의 신청, 등록이 시작되자 리광평은 일찍 안도에서 눈으로 직접 보았고 룡정에도 있었던 ‘달집태우기’ 놀이를 기억, 상부에 보고한 후 개산툰에 가 이 놀이의 행사를 조직, 재현했다. ‘달집태우기’ 놀이는 그 후 룡정시내의 문화광장에서도 재현되였고 선후하여 주급 무형문화유산과 성급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였다.

옛 ‘달집태우기’의 놀이가 다시 룡정땅에 불길을 지펴올린 것이다.

‘달집태우기’처럼 조선족마을에는 그와 비슷한 놀이 하나가 또 있었다.

2000년 2월 정월 대보름날, 안도현 명월진 신툰마을에서 지신밟기를 지내고 있는 모습.

“‘지신밟기’ 놀이인데요, 동네사람들은 이 놀이를 하기 열흘 전에 벌써 전문 놀이군들에게 이 놀이를 신청한다고 합니다.”

기실 이 놀이의 연변 최초의 기록자도 리광평이다. 그는 ‘지신밟기’ 놀이군은 일반적으로 20여명으로 구성된다고 말한다. 와중에는 대장이 있었고 광대(춤군)가 있었으며 지게군도 따로 있었다는 것이다. 일행이 약속한 이웃 동네에 들어서기 바쁘게 집주인이 짚으로 만든 고깔모자를 쓰고 촌장과 더불어 그들을 뜨겁게 마중한다.

“에헤루화 지신, 지신 울려라.

주인, 주인 문을 여소. 문 안 열면 갈래요.

이 집 성주 초가면 초가 성주모시고…”

집주인은 부랴부랴 술과 반찬을 담은 소반을 손에 받쳐든다. 놀이군들은 먼저 집마당을 돌면서 기악 징과 북, 꽹과리를 열심히 두드렸고 저마다 땅을 지근지근 밟으며 둥실둥실 춤을 췄다.

“외양간을 밟으면 소가 탈이 안나오

연변황소 제일이라 농사일을 축내오

창고를 밟으면 농기구들이 안 썩고요

알곡 농기구 잘 두어 농사 근심 없다오…”

대장은 예전부터 ‘지신밟기’ 놀이를 하던 놀이군들의 좌상 어른이였다. 그는 놀이군들의 앞장에 섰고 집안에 들어서자 선참으로 온돌을 밟았다.

2000년 2월 정월 대보름날, 안도현 명월진 신툰마을 지신놀이에서 떽메를 휘두르는 농부들.

먼 옛날부터 선조들은 농경생활로 삶을 영위하며 땅을 목숨처럼 여겼다. 그들은 땅은 지신이라는 신비한 신의 조화를 받고 있다고 믿었으며 지신을 아주 숭배하였다. 그들은 종국적으로 지신의 힘을 빌어 잡귀를 물리치고 액을 막아 안녕과 행복, 건강을 얻기를 바랐다.

“학수고대한 놀이군들이 마당에 들어서면서부터 집주인은 분망 져요. 금방 솥에 뚜껑을 거꾸로 덮어놓아요. 거기에 쌀을 얹고 초 세대를 꽂아요. 옆에는 제사상인데요, 돼지대가리를 놓고 또 막걸리를 넣은 작은 항아리를 놓아요…”

리광평은 예전에 촬영한 사진들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때 이 집안에는 몸이 불편한 로인이 계셨다고 한다. 놀이군들은 일부러 로인의 아래와 우쪽 온돌을 발로 연신 지근지근 밟았다. 이에 앞서 쌀독 주변을 밟았고 또 찰떡을 치면서 흥을 올리기도 하고 와중에 법석을 놓으며 음식판을 벌이기도 했다.

놀이군들의 연주와 노래, 무용 그리고 대화가 놀이판의 사이사이를 잇고 있었다.

행사가 끝나자 집주인은 쌀 20, 30근을 주머니에 따로 담았다. 그는 이 주머니를 끈으로 졸라매서 특별히 놀이군의 지게군에게 넘겨줬다.

“놀이군들의 이날의 수고비라고 해요. 그러나 놀이군들은 이 쌀을 개인적으로 나누지 않고 단체의 행사용으로 사용한다고 합니다.”

현재로선 이 놀이가 언제 어떻게 시작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어쨌거나 정월 대보름날의 마을의 무속행사로 잡귀를 물리치고 액을 막는다는 뜻이며 이 한해를 무사히 지내게 해달라는 기원의 의미를 갖고 있다. 중국 민간 도교의 신앙이 무속에 수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놀이는 대륙과 반도에 대대로 전해내려오면서 민속성과 지역성에 어울리며 꾸준히 전승, 변화, 발전되였다.

2000년 2월 정월 대보름날, 안도현 명월진 신툰마을에서 지신밟기를 지내고 있는 모습.

뭐니뭐니 해도 ‘지신밟기’는 방위를 지키며 악귀를 쫓고 복을 기원하면서 땅을 밟으며 춤을 추는데 이것은 오행설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오행설은 고대 무속, 도교에서 유래한 것으로 동, 서, 남, 북과 중앙의 그 방위를 지키는 신장이 있다고 말한다. 반도에 전입된 후 민간에서 지역을 수호하는 또 다른 기능을 가지게 되었다.

오방신장은 원래 중국에서 전래된 도교에서 동, 서, 남, 북과 중앙 등 다섯 방위를 통령하는 수호장령이다. 반도에서는 무속에 리용되여 가장 뚜렷하고 강력한 방위신으로 된 것이다.

반도의 무속에서 오방신은 굿의 대상으로 잡신과 잡귀를 물리치고 모든 액을 정화하고 막는 등 사악함을 피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고 보면 ‘지신밟기’ 놀이는 무당굿의 한장면을 련상케 한다. 놀이판의 잡귀를 쫓고 액을 물리치는 의식무의 성격을 다분히 띠고 있다.

사실상 경상남도 일대의 옛 오광대(五廣大)는 원래 전문적인 놀이군으로 오행설에 연유한 것이다. 중국의 오방신장놀이는 기실 반도의 어느 토박이 오광대 특유의 과장이다. 그런데 마침 안도현 신툰은 경상남도의 이주민 집거지라는 것이다. 실제로 반도에서 토박이 오광대는 반도에서 지방에 따라서 악귀를 쫓고 복을 비는 오방신장무로 불리고 있다.

오광대라고 하든지 아니면 오방신장무라고 하든지 혹은 ‘지신밟기’라고 하든지 이 놀이는 약 10년 전부터 안도의 시골마을에서 종적없이 사라졌다.

리광평은 아쉽다며 연신 머리를 흔들었다.

“그때의 놀이군 대장은 김태호라고 부르는 동네의 어르신이였는데요, 그분이 사망하면서 대를 이어줄 사람이 동네에 없었답니다. 중년세대는 물론 젊은이들까지 거의 다 밖으로 나가고 있었으니깐요?”

물론 예전에 ‘달집태우기’나 ‘지신밟기’ 놀이로 동네가 흥성했던 것은 동네 일부 어르신들이 그들의 지체 높은 신분을 과시하려고 이런 놀이를 자주 조직한 데도 원인이 있다고 리광평은 말한다. 어찌했든 이때면 온 마을은 남녀로소가 한데 어울리는 큰 잔치를 벌렸으며 서로의 정을 돈독히 하는 장을 엮었다.

“사실 우리 연변에는 아직도 발굴할 이런 문화유산들이 적지 않습니다.”

리광평은 문화관 옛 관장의 신분답게 인터뷰도중에 이렇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우리는 ‘줄다리기’ 등 큰 문화재에만 주목하지 말아야 합니다. 계속 더 발견하고 발굴을 해서 기타 문화유산을 명부에 잘 보완, 기록해야 합니다.”

  신연희 기자 / 김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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