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길목에 발을 묻고 (외 6수)□ 최선숙

2024-05-10 06:33:56

봄만을 기다렸지


그 봄을 기다리느라

목이 빠지는 줄 알았지

엄동설한 혹독한 추위에도

내내 그리움을 화로불에 구워댔지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

몸통에 나이테 하나 더 그어지는 줄 알면서도

봄만을 기다렸지

겨울에 한사코 무심하면서


눈꽃의 아양도 서리의 예리함도

겨울왕국의 그 모든 이야기들을

외면한 채

무작정 봄만을 기다렸지


계절의 길목에 발을 묻고

겨울이 다 가기 전

꽃샘추위 앞에

솔직해지자


겨울에 대한 희미한 그리움도

봄아지랑이처럼 피워올리자



낮꿈의 정체


이런 이런 아아 부수고 싶다

하늘은 빙글빙글 돌고

땅은 천길나락

그 사이에 납작하게 끼인 나는

휘청 텀벙 갈팡질팡

멈추겠지

세상이 이대로 박살나는 건 아니겠지

조금만 버텨보자

산전수전 다 겪은 나를 이겨보겠다고

오산이다 그건

망상이다 그건

받은 만치 되돌려주마

이제부터 내가

폭풍이다

우뢰이다

소나기이다

상전벽해를 만들어주마

내 땀줄기에서 은하수가 흐른다



땡땡이 좀 치면 어때


눈코 뜰 새 없이

아니지

눈코입귀 뜰 새 없이

허둥지둥 달려왔어라


먹고살기 위해서

빚 갚기 위해서

아이 키우고

받은 인정 갚아주기 위해서


아아 오늘은 모처럼

땡땡이 좀 치면 어떨가


지나가는 바람에

고맙다고 인사도 하고

피여서 한들거리는 꽃을 보며

이쁘다고 칭찬도 얹어주며


사랑하는 이야기

사랑받는 이야기

그건 매일 수없이 반복되고

수없이 태여나는 것들


너무 그런 것에 신경 쓰지 말고

이제 모처럼 하루쯤

땡땡이 좀 치면 어떨가


땡— 땡

—자정입니다 주무십시오



오늘은 저도 백수임더


저 오늘 쉽니다

일년 삼백예순닷새

음력설에만 쉬는 저는

오늘 모처럼 쉽니다


지금까지 계속 누구 탓처럼

툴툴거리다가

오늘 작심하고

스스로에게 휴가를 준걸요


오늘은 저도 백수랍니다


매일 아침 다섯시부터 저녁 열한시까지

풀가동이 되여 팽글팽글 돌아가던 기계

하루 뿐이면 몰라도

그 삼백예순날을

하루도 빠짐없이 그렇게 돌려댔거든요


저 오늘 쉽니다

친구들과 데이트나 신청해볼가

미녀들과 수다나 좀 떨어볼가

마무리 못한 글이나 다듬어볼가

실컷 먹을가

등산 갈가

이도저도 아니면 그냥

낮잠이나 실컷 자볼가


아아 이러다가 쉬는 날 쉬지 못하고

똥궁리만 하다 말겠네

저 ㅎㅎ 오늘 ㅋㅋ 쉽니다



쉼표 둥둥 떠다니다


할 일도 참 많은데

그만 잠을 자버리고 말았네


책도 봐야 하고

글도 써야 하고

가사일 바깥일 산더미인데

그만 잠을 자버리고 말았네


어서 저 쓰던 글에

마침표를 찍어야 하는데

갑자기 눈앞에서 둥둥 떠다니는

이 많은 쉼표 쉼표 쉼표들


할 일도 참 많은데

그만 덜컥 자버리고 말았네



길이 될지도 몰라요


잘하고 계십니다

지금 잘 흘러가고 있어요


젊었고

끈질기고

하는 일에 미쳐있는데

미친 사람을 어떻게 이긴답니까


아주 좋아요

제대로 흘러가는중입니다


이게 맞냐구요

이게 길이냐구요

이상한 질문 하지 마세요

잘못된 길이 지도를 새로 만든답니다


새로운 길이 될지도 몰라요

새로운 삶이 열릴지도 몰라요



엄마      


버릴 것들 아직 너무 많은데 버리면 천길만길 뛰시는 엄마 젊어서는 지구촌 촌장이라도 된 듯이 쓸데없이 사서 고생고생이시더니 이제는 순하디 순한 양이 되신 울 엄마

머리 깎아요 그러면 머리를 들이밀고 샤와합시다 그러면 고삐도 없는데 마냥 잘 따라주시는 엄마 그런 엄마가 무척 낯설다

내 딸처럼 아니 나 만치라도 세상 흔하디 흔한 사랑한다는 그 말 입 밖에 번질 줄 모르는 엄마 엄마는 눈으로 말을 하신다

내가 찾아가면 텀벙텀벙 달려와 하나라도 내 입에 넣어주지 못해 늘 안달이신 내 엄마

엄마는 아직도 얼마나 더 당신을 파먹이고 싶으신 걸가

이제 혀를 놀리는 말보다는 성한 데 하나 없는 그 가녀린 몸으로 온통 세상말들을 대신하시는 엄마 그런 엄마는 여든 하고도 일곱 아직도 엄마를 먹어야 속이 편한 나는 쉰 하고 셋

  •  
  • 많이 본 기사
  • 종합
  • 스포츠
  • 경제
  • 사회

주소:중국 길림성 연길시 신화가 2호 (中国 吉林省 延吉市 新华街 2号)

신고 및 련락 전화번호: 0433-2513100  |   Email: webmaster@iybrb.com

互联网新闻信息服务许可证编号:22120180019

吉ICP备09000490-2号 | Copyright © 2007-

吉公网安备 22240102000014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