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로웠던 설날이여□ 김정순

2024-05-24 08:58:40

설날은 우리 나라에서 음력으로 새해를 맞이하는 날인데 민간에서 가장 성대하게 쇠는, 가장 특색 있는 전통명절이다. 설날은 대지가 봄을 맞이하고 만물이 갱신하는 기점인데 일체 재생의 시작이고 새로운 순환의 개시로 여겨진다. 설날이 되면 사람들은 새롭게 시작하는 의미에서 온 집안을 깨끗하게 거두고 새 옷을 갈아입으며 맛있는 음식을 해먹으면서 즐겁게 보낸다. 그리고 이웃이나 친척들이 함께 모여 맛있는 음식을 풍성하게 차려 먹으면서 밤새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하는데 북적북적하고 웃음소리 그칠 새 없는 그런 뜻깊은 명절을 보낸다.

올해 음력설은 해살은 따사로우나 기온이 퍽 떨어져 밖에 나서니 퍼그나 추웠다. 나는 아침에 시부모님께 인사를 올리고 새해 첫 밥상을 차려 함께 식사한 후 친정어머니 집으로 향했다. 홀로 계실 어머니, 더우기 설날 아침에 설인사 드릴 사람도, 찾아올 사람도 없을 어머니집이다. 아직도 석탄불을 때는 어머니집으로 나는 잰걸음을 놓았다.

어렸을 적 우리 집은 룡정시에 소속된 유색금속광산기지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버지는 평범한 광산로동자로 출근하셨고 어머니는 ‘5.7’생산대에서 일하셨다. 당시 어머니가 광산로동자인 아버지한테로 시집오게 되면서부터 전씨 가문의 장녀로 태여난 어머니의 본가집 친척들은 은근히 공인 아빠가 로임을 타는 우리 집을 부러워했고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오군 하였다. 그때 아버지의 월로임은 70여원 좌우였다. 또 어머니가 생산대에서 억척스레 일하고 부업도 했기에 우리 집은 꽤 잘살았다. 손님이 오는 날에는 쌀을 한두근씩, 기름 한잔씩 꾸던 동네 사람들에 비하면 우리는 그래도 배를 곯지 않고 배불리 먹을 수 있어 좋았다. 광산에서 용접공으로 일하는 아버지는 해마다 설이 다가올 때면 일터 주변에서 페철을 주어서는 낫, 괭이, 호미 등 농기구라든가 숟가락, 저가락 등등 일상에 쓰는 용기들을 만들어놓군 하였다. 한해 농사를 짓고 겨울이 지나기까지 그냥 화로불을 둘러싸고 잡담을 하거나 트럼프 치기에 열을 내던 그 세월에 농촌에 살고 있던 어머니의 사촌이나 삼촌 되는 친척들은 설이 되기 며칠 전부터 우리 집에 모여들군 하였다.

그리하여 음력설 림박에는 미리 불려놓은 콩을 하루종일 허리 아프게 매돌에 갈아서는 두부를 두세함지 만들어놓았고 밀가루도 삼사십근씩 장만해놓았다. 또 일년 내내 키운 돼지를 잡은 후 돼지고기는 절반 좌우만 동네에 팔고 나머지 고기는 서너근씩 되게 크게 토막을 내여 배광주리에 담고 얼음과 함께 얼구어두군 하였다. 그리고 삼촌이나 이모들이 명절마다 가져온 찹쌀로는 찰떡도 치고 때론 시루떡도 만들어놓기도 하였다. 아무튼 설날이 되면 우리 집에서는 웬만한 잔치 만큼 음식을 그득 장만하였고 친척들이 모여들어 북적거렸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의례 그런 설날을 바랐고 그런 날에 찾아온 친척들에게 마음껏 음식을 대접하고 또 그들이 수요하는 여러가지 농기구를 나눠주기도 했으며 또 로동보호용으로 탄 방수용 장화나 로동용 장갑 같은 것을 선물하는 것을 퍽 기쁘게 생각했다. 그랬기에 설날이 지난 지 며칠이 되도록 친척들은 인차 돌아갈 념을 하지 않았고 열흘 혹은 보름씩 묵었다가 떠나기도 하였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출근하면서도 해와 달을 이고지고 항상 부지런히 일하셨다. 터밭을 가꾸거나 산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콩이나 조, 기장 등 알곡을 심는외에도 부업을 다양하게 하셨다. 그렇게 눈코 뜰 새 없이 일하고 일한 덕에 우리 집에는 남먼저 재봉기나 라지오가 갖춰졌고 식장 우에는 마주 엎은 커다란 함박꽃 꽃대야가 두줄이나 곱게 배렬되여있어 놀러오는 사람마다 부러워했다. 더우기 윤기 찰찰 넘치게 닦아놓은 가마뚜껑이라든가 새노란 색으로 칠한 깔끔한 장판, 벽에 정연하게 배렬한 사진액자나 막내딸의 상장들, 이불장에 정연하게 얹혀진 꽃이불 등이 산뜻하게 안겨와 한폭의 아름다운 그림인양 조화를 이루었기에 우리 집에 놀러오는 사람들마다 너무 멋있고 깨끗하다면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 세월에 우리 집은 설날이 아니더라도 삼촌 사촌들은 때론 돈을 꿔달라 때론 농기구를 구해달라 때론 로동보장용 장갑이나 마스크를 구해달라 하면서 자주 우리 집에 들리군 하였다.

하지만 그런 좋은 세월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어느날부터는 우리 집에 서늘한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눈 내리는 날 아침, 아버지가 출근하면서 올리막길을 걷다가 미끌어 넘어진 것이 화근이 되여 앓아눕게 된 것이다. 골반뼈가 골절되였는데 그 당시에는 움직이지 않고 그냥 휴식하면 되는 줄 알았다. 그 후 아버지는 광산병원에서 주는 약을 드시면서 아픔을 참고 출근했다. 어머니가 시름시름 앓아서 병원으로 달려간 적은 있으나 우리의 눈에 아버지는 너무나 멋지고 건강한 사람이였기에 다친 다리가 인차 낫고 씩씩하게 걸을 수 있는 기적이 나타날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 아버지였는데 왠지 병세가 점점 악화되여 큰 병원에 가지 않으면 안되였다. 결과 간암으로 진단을 받고 어쩔 수 없이 집에 돌아왔고 그해도 다 가고 곧 새해가 밝아오는 그믐날에 끝내 이 세상을 떠나셨다.

또 설날이 왔다. 이제 기름기 돌던 집안은 거미줄이 여기저기 보이기 시작하고 눈처럼 하얗던 벽은 얼기설기 금이 실렸으며 깨끗하고 정연하던 사진틀은 얼룩덜룩 흠집이 뚜렷했다. 설날이라고 모두 아들며느리 그리고 손자, 손녀들과 단란하게 설을 쇠는데 이제 남편을 잃은 우리 집은 그제날의 풍경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아들까지 잃은 어머니는 이 딸도 시집보내고 거의 20여년을 홀로 설을 쇠는 수밖에 없었다. 평소에도 고독하셨지만 설날의 고독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어머니는 이제 78세 고령의 할매로, 전신에 병투성이인 그런 늙은이로 되였다. 일어서기조차 힘들어 간신히 운신을 하시면서 오늘도 턱 높은 부엌에 겨우겨우 들어서서 석탄불 지펴 온돌을 덮힌다. 어머니는 한번도 그렇게 모여들던 친척들이 오지 않는다고 원망하지 않으셨다. 그것은 전씨집 제일 큰 장녀로서 응당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였다. 그처럼 단란하고 행복했던 사람들로 북적이던 우리 집이 지금은 되려 산산쪼각이 나고 대들보 기둥도 푹 꺼져 내려앉았다. 썰렁한 그런 집에 더는 그제날의 모습을, 문턱이 다슬게 사람들이 모여들던 모습을 엿볼 수 없었다.

잘살아보겠다고 모두 여념 없는 친척들은 우선 자기를 돌보고 자식을 돌보야 하기에 언제 주변의 사람들마저 챙길 여유가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 사실 생활환경이 변하고 생활절주가 빨라지다 보니 나조차도 여유가 없어서 십여년간 옆집에 산 사람과도 따뜻하게 서로 인사를 나눈 일이 거의 없었고 모두가 제 갈길에 바빴다.

구름처럼 모여들던 친척들은 대도시행, 출국행으로 돈 벌어서 자식들을 시집, 장가 보내고 새집을 마련하기에 바빴다. 그제날에 많은 이들에게 있는 대로 베풀었던 그 ‘공인남자에게 시집간’ 우리 엄마를 보러 올 시간들이 없는 같다.

폭죽소리 요란하고 집집마다의 마당에 빨간 초롱이 걸려서 밤을 환히 밝히던 설날, 어려서 너무나도 고대하고 바라던 그제날의 설날이 그립다. 정 많은 시골에 사시던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도 그리고 나를 ‘울보’라고 항상 놀려주던 익살 많은 외삼촌도 보고싶다.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삼촌들, 너무 예쁘고 웃기 좋아하던 막내고모도 무지무지 보고 싶다. 북적이는 우리 집에 설날이면 밤중까지 전등불이 꺼질 줄 모르고 푸짐하게 차린 음식들을 드신 후에는 함께 트럼프도 치고 윷놀이도 놀던 그런 설날이 기다려진다. 일년에 한번을 고운 옷도 사입고 새 신발도 신을 수 있고 또 맛있는 알사탕도 실컷 먹을 수 있었던, 평소에 못 보던 희한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그런 설날이 정말 좋았다. 물질이 풍요로운 요즘 시절에 비해 그때는 오히려 설날에 대한 설레임과 기대가 더 컸고 작은 어떤 것에도 크낙한 행복과 감사를 느낄 수 있던 것 같다. 아낌없이 베풀던 그런 설날, 인심 후하던 그 풍경이 다시 올 수 있을가. 나는 오늘 아침에도 그제날의 설날을 쇠던 동년으로 돌아가 행복하게 웃음 짓다가 꿈속에서 깨여났다. 그리운 동년시절의 풍요로운 설날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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