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등성이 등굽은 오솔길에
선인들의 눈물과 한숨이 서려있고
발자국 하나에 한 시대가
깊은 잠에서 깨여난다
달빛에 젖은 밤길 우로
가난을 짊어진
쪽지게의 노래 흐르고
밭이랑에 맺힌 이슬방울은
땀으로 빚은 세월의 훈장이다
두만강 건너 하얀 마을 일구며
흙에 뿌리 내린 발끝에서
전해지는 뜨거운 발자취
구름보다 자유로웠던 꿈
비바람보다 단단했던 뜻
고개 숙여 그 길을 따라가노라니
한을 품고 서러이 흐느꼈을 그 세월
고통조차 빛으로 피여나
어두운 앞길 밝혀준다
민속박물관에서
선사시대의 어둠을 가르고
오래된 바람이 스치는 이곳
선조의 그림자 따라 걷노라면
유물 하나하나가 말을 걸어온다
백자에 어린 달빛 속에서
선인들의 슬픔과 환희가 파도치고
세월의 고난을 이겨낸 장신구에선
바느질로 엮은 삶의 무게가
고스란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옛조상의 숨결이 내 손끝에
살며시 닿는 순간
이 땅에 뿌리내린 우리 이야기가
피눈물로 얼룩진 사랑이 되여
내 심장에 혼을 불어넣는다
바람과 돌의 대화
바람이 묻는다
“너의 상처는 어디에 잠들었는가”
돌은 조용히
바다의 노래를 틀어놓는다
깎이고 갈린 날들도
결국은 빛을 품기 위해
참아야 했던 시간들이다
구름이 데려간 것들
파도가 삼킨 것들의 무게는
바로 아득한 세월의 눈물
끝없이 밀려오는
모든 상처들의 저편에
달빛이 기여들어
어머니의 깊은 주름으로 새겨지고
한줄기 슬픈 삶은
돌이 되여 다시 태여난다
고향사람들
먼길을 걷다 발끝에 묻힌
모래알 하나가 흐느낀다
계절의 무게를 견뎌낸 그리움
달빛에 젖어드는데
낯선 거리에서 부딪친 낯선 미소
“어디서 본 듯하네”
한모금 사투리에 고향이 스며들고
잊혀졌던 이름들이
얼굴에 핀 꽃향기마냥 새록새록 피여오른다
고향사람들의 등에 얹혀
구름따라 꽃노을 새겨가는 고향
고향은 이제 더는 한줌의 흙이 아니라
밤하늘에 휘뿌려진 반짝이는 별이다
야시장의 풍경
하루의 피곤이
꺼져가는 불씨와 함께
하늘가로 사그라들 때면
또다시 팔딱이는 삶의 숨소리
한 쪼각 두 쪼각
인생을 굽는 달궈진 철판 우에
뜨거운 김이 사구려소리를 감아올리고
눈물이 배여나는 술잔 속에
주름진 미소가 한움큼 스며든다
뒤척이는 삶의 깊이를
한입 베여 물면
달콤쌉싸름한 맛이
혀끝에 녹아 내린다
밤이 깊어도 꺼질 줄 모르는
화려한 빛갈의 속삭임
돌아서는 이의 등 너머로
새벽은 소리없이 기다리고 있다
고향의 진달래
고향산 기슭에
노을빛으로 흘러간 이야기를
물들이는 진달래
스치는 봄바람에
나물캐는 아낙네들 웃음소리 흘러나오고
땀방울로 얼룩진 논두렁 길에
남정들의 발자국 숨결 들려온다
앞마을 순이 작년에 명문대 붙었소
뒤마을 로총각 철이 장가갔소
한점 두점 모은 이야기
곱디고운 꽃망울에 담아
봄노래로 불러주는 진달래
그리움이 많을수록
더욱 붉게 타오르는 진달래
올해도 고향의 봄을
연분홍 입술로 노래하는 진달래
초보운전자
첫 출발의 신호가 떨린다
핸들 우 손끝이 노을빛에 흔들리고
차창문밖으로 세월이
한 차선씩 미끄러져간다
십자로마다 새로운 길이 열리고
신호등은 깜빡이며 망설임을 연주한다
액셀과 브레이크 사이에서
나는 발끝으로 인생의 클러치를 밟으며
어설픈 오늘을 간신히 달린다
락엽에 묻혀서
나무가지 손끝에서
한장 한장 주소없는 편지쪼각들이
한줄기 바람에 어디론가 사라진다
꽃잎으로 부서져 흩날리던
사랑의 웃음소리
깊은 잠의 뿌리로 스며들고
발아래 쌓인 계절의 먼지
너의 향기마저 덮어버린다
락엽은 나무가 떨어뜨린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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