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군가 여든에 들어서야 아버지의 위대함을 느끼게 되였다고 했다.
아직 그 나이는 아니지만 우리 형제자매들은 세월이 한해두해 흘러지나갈 수록 이를 실감하고 있다. 그래서 형제자매들의 부탁을 받고 이 글을 쓰는 바이다.
… …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해가 1986년, 어언 40년이 된다. 그 동안 나는 문예인들과 접촉 없이 지내다가 우연이라 할가 필연이라 할가 아버지의 미발표 작품집 《장수비결》의 출판으로 머리을 앓다가 시인이자 아동문학가이며 아버지의 선배, 문학의 길동무였던 채택룡 선생님의 자제분이 되는 채영춘 선생을 소개받게 되였다. 채영춘 선생은 퇴직전 원 주당위 선전부 부부장을 담임했었다.
첫 만남에서 나는 초면이라 매우 송구스러운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채영춘 선생은 인사하기 바쁘게 아버지를 잘 안다고 하면서 자신의 집에도 여러번 다녀가신적 있다고 알려주었다. 또 우리 어머니도 신흥소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 자신을 가르쳐준 적이 있다면서 나와의 거리를 스스럼없게 가깝게 해주었다.
오래간만에 옆집 큰 형님을 만나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구속 없이 대화가 오갔다. 그리고 대화 과정에 채영춘 선생은 나에게 아버지의 작품집을 낼 것을 극구 권장하면서 자신이 도움을 줄테니 자료수집만 잘하라고 부탁하였다.

채영춘 선생의 말씀에 힘을 얻은 나는 형님의 집에서 갖고 온 부친의 유고들을 다시 한번 읽어보기 시작했다. 읽어볼수록 아버지의 모습이 새삼스럽게 또렷이 떠오른다…
1. 아버지의 일생
아버지는 태여난 해에 어머님을 여의고 이듬해 겨울 누님의 등에 업혀 만주벌로 오게 되였다고 한다.
어릴 적에 고모님이 처녀의 몸으로 동생을 업고 려인숙에 도착하니 마음씨 고운 주인집 마누라가 “어서 빨리 올라와 애기한테 젖을 먹이오.”라고 해서 얼굴이 불덩이이처럼 달아올랐었다고 하던 고모님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그때 우리 집은 이곳저곳 살만한 곳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결국 연길현 조양천진 광석촌(지금의 연길서역 자리)에 정착하였다.
1936년 3월 아버지는 여덟살 나는 해 장백촌 진흥국민소학교에 입학하였고 이듬해인 1937년에 〈겨울〉이란 작문이 당시 위만주국 간도성 소학생작품응모에서 2등으로 뽑혔다. 아버지는 그때로부터 문학에 흥취를 갖게 되였다고 한다.
지난 세기 50년대는 아버지의 창작 고봉기였다고 한다. 평균 달마다 한편의 작품이 연변의 각종 신문과 간행물에 발표되였고 그래서 달마다 원고료가 어느 정도 나왔는데 월급만 집에 들여놓고 원고료는 전부 동료나 친구들과 함께 술을 사 마셨다고 한다. 인심이 후한 분이였다.
하지만 아버지의 창작 전성기는 6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사그라졌다. ‘그물에 빠진 우파’, ‘현행반혁명분자’ 등 모자를 쓰고 2년 남짓이 연변화극단 지하실에 갇혀 투쟁을 받게 되였던 것이다.
1969년 12월 13일, ‘5.7’지시에 따라 우리 집은 농촌으로 내려가게 되였다. 처음에 훈춘현 량수공사 량수대대 7대에 내려갔다가 무슨 원인인지 1971 년 4월 1일에 훈춘현 마천자공사 포태대대 5대에로 자리를 옮기였다. 1974년 재배치에서는 ‘고린내나는 아홉째’로 락인되여 연길로 돌아오지 못하고 화룡현 복동에 있는 연변탄광으로 배치받았다. 우리 식구들은 그해 11 월 13일 트럭에 앉아 장재광구의 숙소에 이르러 잠시 짐을 풀었다가 이듬해 민광에 새로 지은 유일한 2층집으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1978년까지 살다가 정책 락실을 받고 그해 9월에 아버지는 원 단위인 연변연극단으로 복직하여 창작사업을 다시 시작하였다.
하지만 종잡을 수 없는 것이 세상일이였다. 1986년 3월 아버지는 〈장수비결〉이란 삼로인극 초고를 쓰셨고 그해 8월 26일 간암으로 58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이 〈장수비결〉은 남수길 선생께서 수개, 정리하시고 연변연극단에서 무대에 올려 수십차례 공연을 하였는데 연변텔레비죤방송에도 방송된 적이 있다.
이 삼로인극 〈장수비결〉은 아버지의 생애 마지막 작품이자 삼로인이란 극종을 탄생시키고 또한 마지막으로 이 세상에 남겨놓은 작품이기도 하다. 아쉬운 것이라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도 작품들을 책으로 출판하지 못한 것이였다...
2. 우리 집 로소 3대
아버지는 1954년 1월 1일에 어머니와 결혼하여 슬하에 사남매를 두었다. 결혼해서 첫 살림집은 연변인민방송국 울안의 단위 사택이였고 그곳에서 장남 홍심이를 낳고 큰고모를 시집보냈다. 그후 광명가 38 조 즉 ‘복무대루’ 동쪽 편의 살림집으로 자리를 옮겼고(지금의 ‘백리성(百利城)’자리) 이곳에서 장녀 홍련, 차남 홍파, 차녀 홍실이를 낳았고 작은고모도 시집보냈다.
우리 할머니는 친할머니가 아니다. 아버지의 셋째삼촌댁으로서 딸 둘을 낳고 셋째 삼촌이 돌아가자 아들이 없어 우리 아버지가 아들로 마주섰다.
26세인가 28세때 과부로 된 할머니는 홍씨가문 팔간집에서 아버지 형제 넷과 아버지의 넷째삼촌 가족, 다섯째삼촌 가족들과 함께 생활하였는데 장춘에서 한약방을 꾸리고 있던 할아버지가 아버지 결혼 한달을 앞두고 집에 돌아와서 출근하는 아버지를 광석촌으로 불렀다.
저녘식사가 끝나자 할아버지는 식솔들을 불러놓고 말을 꺼냈다. 바로 셋째삼촌댁의 안치문제였다. 관례대로면 큰어버지는 맏이이기에 할아버지를 모셔야 했으므로 둘째큰아버지가 삼촌댁을 모셔야 했다. 할아버지 의견도 그러하고 해서 둘째아들에게 지시하는데 셋째삼촌댁이 “다 같은 조카들인데 어디에 간들 의견이 있으랴만 같은 값에 저의 손에서 자란 네째한테 가면 어떻겠는지.”하고 제기했다고 한다. 할아버지도 그 말을 들으시고 “제수 그 생각 잘했다.”고 하면서 당시 가문에서 제일 잘 나가고 생활형펀도 제일 좋은 막내아들에게 허락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군말 없이 “예, 알았습니다.”하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렇게 되여 셋째삼촌댁과 그의 두 딸이 우리 집에 오게 되였고, 어머니도 처음에 그 얘기를 듣고서 매우 놀라셨다고 한다.
워낙 두분의 약속으로는 우리 외삼촌이 연변농학원(대학교) 학생이므로 그가 졸업할 때까지 외할머니를 모시기로 했던 것이다. 그것도 어릴적부터 어머니의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아버지가 가시어머니의 사랑이나마 받아볼 수 있다면서 흔쾌히 동의했던 일이란다... 그런데 이런 돌변이 생겨 두분은 매우 난감했다. 하지만 어쩌랴, 아버님이 이미 결정한 일임에야…
비록 삼촌댁이라 하지만 어머니와 할머니의 관계는 매우 좋았다. 월급이 나오면 두분께서 월급을 고스란히 할머니에게 받쳤는데 집안살림은 할머니가 전담하다싶이 했다(아버지 월급 85원, 어머니 월급 39원, 합계 124원, 그 당시 이 돈이면 상당한 액수였다.) 또한 할머니와 어머니가 얼굴을 붉히는 일을 보지 못했다.
포태대대 5대에 내려갔을 때 일이 떠오른다. 저녘에 사원대회를 하는데 나는 어른들 속에 끼여든적이 있었다. 어머니와 할머니는 무엇을 의론하는지 귀속말로 이야기를 나누는데 사원들이 그 장면을 보고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가 저렇게 좋은게 신기하다며 감탄했다....
아버지가 쓴 수필 〈보통사람〉은 아버지가 가정을 대표해서 할머니를 그리면서 쓴 것이고 〈모범수첩〉은 아버지가 안해 자랑을 늘여놓은 것이라 하겠다.
3. 기억 속의 아버지
아버지가 연변화극단 지하실에 2년간 갇혀있을 때였다. 형님이 매일이다싶이 아침저녘으로 아버지에게 곽밥을 날랐는데 동학들이 눈총질한다고 형님은 복무대루를 에돌아 화극단(지금의 연길백화청사 옆)으로 가지 않고 우리 집 앞마당 토성을 타고 가로질러 갔단다. 그때 내 나이가 서너살이였다.
언젠가 어머니가 밥을 나르는 날 나도 함께 따라나선적 있었는데 그때 나는 지하실에 갇혀있는 아버지를 보았다. 화극단의 여러 면목 있는 분들도 있었는데 성냥불처럼 희미한 전등빛 속에 앉아 우리들을 쳐다보던 기억이 난다…
1969년 12월 13일, 우리 집은 ‘5.7’지시에 따라 훈춘현 량수공사(지금의 도문시 량수진) 량수대대 7 대로 내려가 살게 되였다. 그리고 1971년 4월 1일에는 훈춘현 마천자공사 포태대대 5대로 자리를 옮기였다.
비록 도시에서 농촌으로 내려왔지만 워낙 성격이 락관적인 아버지는 개의치 않고 늘 분망히 보냈다. 생산대의 일, 대대의 일, 공사의 일 등을 시키는대로 맡아했는데 열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생산대의 우사에 일하는 사람이 없으면 자진하여 우사에 가 소똥을 치는 일이며 소여물을 주는 일이며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했고 대대 선전대에서 공연을 준비하면 저녁마다 구락부에 가서 지도하고 작품을 써주면서 공연에 도움을 주었다. 공사에서 공작조를 무어가지고 각 대대로 돌아다니며 선전공작을 하라고 하면 가방을 둘러메고 선뜻이 나섰다.
이렇게 4년이 지나 다시 배치받은 곳이 연변탄광이였다. 처음엔 장재갱구 선전보도원으로 있었고 후에는 ‘연변탄광로동자대학교’에서 총무일을 맡아하였다. 이곳은 탄광이여서 다른 곳과는 달리 술은 표제가 없이 언제나 공급되였다. 술을 반가워하는 아버지는 저녁마다 50 도 되는 백주를 반근씩이나 마셨는데 그때가 아버지의 순간적인 락이였을지도 모른다.
워낙 붙힘성이 좋은 아버지는 누구든 반갑게 대해주었다. 특히 젊은이들이 찾아와 문학을 론하면서 문학공부를 하고 싶다고 하면 언제나 열정스레 얘기하면서 가르쳐주었다.
당시 우광훈 선생님과 박학림 선생님이 우리 집의 단골손님이였다.
우광훈 선생님이 각별히 인상 깊은 것은 그의 련애편지 때문이다. 한번은 우광훈 선생님이 빌려간 아버지의 책을 돌리려고 우리 집에 왔는데 마침 내가 그 책을 받게 되였다. 그런데 책 속에 편지봉투가 있었다. 가만히 훔쳐 읽어봤더니 우광훈선생님의 련애편지였다. 편지를 쓰고나서 보관을 잘못했던 것이다… 그후 우광훈 선생님은 소설가로 성장하여 연변작가협회의 직업작가로 되였다.
박학림선생은 열혈 문예청년이였다. 그의 처녀작 〈채탄부의 노래〉를 실례로 들 수 있다.
1975년도인가 장재갱구에 자리잡은 우리 집으로 박학림선생이 퇴근하던 걸음으로 찾아와서 가사를 써달라고 아버지에게 부탁하였다. 아버지는 흔쾌히 승낙하더니 며칠 후에 가사를 주었다. 곡을 단 박학림선생은 자신의 첫 작품을 어떻게 발표할 수 없겠는가 하고 아버지와 문의했다. 아버지가 나서서 여러모로 련계를 하여 작품은 간행물에 발표되였다. 그러자 박학림 선생님은 또 아버지를 찾아와 어떻게 노래가 방송되게 할 수 없겠는가고 청들었다. 이번에도 아버지는 몸소 연변인민방송국에 찾아갔다. 이렇게 되여 〈채탄부의 노래〉가 라지오를 통해 방송되였는데 《매주일가》프로에서 남성중창으로 방송된 것으로 기억된다…
아버지는 정직하고 대바른 성격의 소유자였다. 아버지는 로신을 매우 숭배하였는데 그의 좌우명인 “눈 흘려 천부에 손가락질 하고 머리 숙여 유자의 소가 되리라.(横眉冷对千夫指,俯首甘为孺子牛)”를 벽에 걸어놓기까지 하였다. 또한 그렇게 행동했다.
반우파때 일이였다. 연변연극단 배우 리영근 선생님이 우파로 몰려 자주 투쟁을 받았다. 어느날 또 우파분자들을 투쟁한다는 소식을 접한 아버지는 가만히 리영근선생님을 데리고 기차를 타고 흑룡강성 목단강시 해림현으로 갔다. 그 곳엔 아버지의 둘째형님과 셋째형님이 살고 있었는데 그곳으로 피신을 간 것이다. 그 세월에 아버지가 이렇듯 대담한 일을 하였으니 그 인성이 얼마나 훌륭한가를 알 수가 있다.
또 한가지 꼭 적어야 할 이야기가 있다. 지난 세기 60년대초 저명한 작곡가 정률성 선생님이 연변에 온신적이 있는데 아버지께서 그분을 안내하였다고 한다. 우리 집에도 오고 자그마한 손수건을 어머니에게 선물로 드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우리 할머니와는 자치동갑이라면서 누님이라 부르기도 했고. 그때 그분은 아버지에게 무엇을 하나 틀에 구속되지 말고 대담하게 해야 한다면서 자신이 〈연안송〉을 작곡할 때에도 음악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고, 그러니 대담하게 글을 쓰라고 충언을 해줬다고 한다. 그래서 아버지는 우리에게도 무엇을 하든 대담하게 내밀고 정한 목표를 포기하지 말라고 늘 귀뜸을 해주었다.
… …
돌이켜보면 아버지는 이렇게 세월의 풍파를 겪는 가운데서 ‘삼로인’과 같은 민족의 문화와 문학에 가치있는 유산을 남기였다. 다행히 민족과 민족문학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과 집념이 이번에 중국조선족무형문화유산총서 《삿갓봉의 웃음》의 출판발행으로 빛을 발하게 되여 우리 가족들으로서는 기쁘기 한량없다.
이 총서의 출판에 도움을 주신 채영춘 선생님과 편집선생님들 그리고 물심량면으로 후원을 해주신 여러 분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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