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로 쓴 시와 머리로 쓴 시와 가슴으로 쓴 시□ 송미자

2025-11-07 09:02:02

기계로 시를 쓴다?

시쓰는 프로그램도 있다? 10여년 전, 호기심이라 할가 더 솔직한 말을 한다면 시를 쓰면서 도움이라도 받을가 하여 그 프로그램을 다운받으려다가 곤혹을 치른 적이 있었다. 숱한 용량이 큰 게임프로그램들과 유령프로그램들이 시 쓰는 프로그램을 인질처럼 앞세우고 쳐들어와 ‘안방은 내 차지’하고 올방자를 틀고 앉아 쫓아도 나가지 않았다. 프로그램과 프로그램이 충돌이 생겨 컴퓨터가 다운되기가 일쑤였다. 며칠 동안 컴퓨터와 씨름하다가 결국 컴마스터를 불러 컴퓨터를 다시 복구한 적 있었다.

요즘 같은 인공지능시대에 컴퓨터와 스마트폰으로 많은 단어를 쉽게 찾으  려는 작가들에게는 복음이 아닐 수 없다. 더우기 4차 산업시대에 들어서 딥시크 대형 인공지능 대화모델의 출현은 너무 놀랍게 모든 사람에게 원한다면 시인이 되게 하는 시대, 작가가 되는 시대를 열어놓았는지 모르겠다. 복음인지 화인지는 누구도 모르는 일이다. 삶이 편리하고 원하는 정보를 쉽게 얻는 대신 기계에 의존하여 창의력이 소실됨과 동시에 무기력함을 동반하지 않을가 념려가 많이 된다.

인공지능에 너무 의지하면 도리여 더 많은 것을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머리를 잃고 가슴을 잃고 자신마저 잃고 나면 작가는 더 이상 작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작가의 기능은 마비되고 피 없고 눈물 없는 문학이 란무할 것 같다. 작가에게 주어진 사명이 머리와 가슴을 떠나 행해질 수 있을가?

기계로 쓴 시 같은 이상한 단어들의 조합만으로 이루어진 시를 암호풀이하듯 보노라면 모래알 한숟가락을 입에 넣고 밥이라고 오기를 부려 삼키려 애쓰는 심정이다. 이때 뇌하수에서 분비되는 아드레날린(악마호르몬)이 심히 괴롭힌다. 이런 괴로움을 피해 아예 이런 시는 멀리하는편이 낫지 않을가? 때론 “쓴 약이 보약이지” 하면서 나의 취약한 부분을 치료하는 약으로 써보려고 억지로 삼키려 한다. 약은 어디까지나 자양분을 만드는 밥과 다른 치료제로 쓰이는 약일 뿐이다. 하기에 약은 생태를 파괴하는 부작용이 없을 수 없다. 시론에서 기교 배우기는 시 쓰기보다 쉽다. 시론을 모르고 시를 쓴다는 것은 거짓말 같지만 시론에 완전히 의지하여 시를 쓰는 시인이 몇일가? 시론에 의지하여 시를 쓴다면 시 평론가들이나 시학을 가르치는 교수들에게서 대부분 명시들이 나와야 될 것이 아닌가?

“균형 속에 있는 눈에 거슬리지 않는 파격(破格)”(<수필> 피천득)이 수필의 개성이라면 시는 시인 그 자체의 스타일이 균형이고 개성이 아닐가? 시는 시인 그 자체이다. 정교하면 정교한 그대로 거칠면 거친 그대로, 분방하면 분방한 그대로, 섬세하면서도 거창하고 격이 있으면서도 자유로운 자연이고 우주이다. 하여 조류에 따라서만, 사조에 따라서만, 격에 따라서만 쓰는 시는 기계로 쓴 시라 이름한다.

머리로 시를 쓴다?

머리 없이 시를 쓸 수 없다. 한수의 시를 완벽하게 하려면 차디찬 머리를 열이 나도록 굴려야 하고 열이 났던 머리를 다시 차겁게 식혀야 한다. 이것을 반복하면서 한수의 시를 완벽하게 완성하기 위해 시인은 일상의 경험으로부터 구성, 표현에 이르기까지, 감정의 등가물을 찾아 이미지 표현으로부터 단어와 토까지 머리로 닦고 다듬어 정교한 옥을 만들어낸다.

‘속 깊은 비취색 속살로 환생’(박문파의 <흙을 만나면 청자되리>)하는 아름다운 시, ‘쪼각난 단어들의 모음집’에 ‘호수같이 깊은 사랑’을 담고 ‘작은 단어들의 빛갈’로 ‘슬픈 어둠의 의상을 벗겨주’(리임원의 <작은 시 한수로 사랑한다는 것은>)는 감미로운 시, ‘사래 긴 밭을 갈면 가끔씩 오랜 옛말이 기와쪼각에 묻어나’(석화의 <천지꽃과 백두산>)는 구수한 시, ‘땅은 상상의 넓이, 하늘은 탐방의 높이’로 ‘시의 순민’(김성휘의 <나의 국토>)을 노래한 격조 높은 호방한 시… 이처럼 별처럼 눈부시는 주옥 같은 각양각색의 시들을 보면 엔도르핀(항체호르몬)이 솟구치는 감각을 느낀다. 머리가 맑아지면서 자못 즐겁다. 머리로 쓴 시는 육체를 지키는 밥처럼 정신에 에너지를 공급한다. 머리로 쓴 시를 읊으면 어두웠던 눈이 빛나고 드리웠던 마음의 하늘이 푸르청청하다. 밥 같고 산소 같은 시, 가슴에서 움터 나와 머리로 정렬된 시를  머리로 쓴 시라 이름한다.

가슴으로 시를 쓴다?

가슴을 거치지 않은 시는 가뭄에 굳어진 흙덩이라기보다 돌덩이라 하겠다. 또한 시는 오직 머리로만 생산되는 것이 아니다. ‘시인이란 슬픈 천명’(윤동주의 <쉽게 씌여진 시>)의 젖은 가슴을 뚫고 싹이 터 자란 령혼의 생명이고 자양분이다.

“행여 북방의 하늘을 보셨습니까? 지금쯤 내 고향의 하늘은 쪽빛보다 더 푸르러 손을 치켜들면 내 손이 하늘색으로 푸르러질 것만 같습니다. 남쪽하늘 아래 인왕산자락에서 북쪽하늘 우러러 고향을 그리면서 쓴 시를 이 무대에서 고향을 그리면서 랑송하겠습니다.”

“…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우에 내 이름자를 꺼보고 흙으로 덮어버렸습니다…”(윤동주의 <별헤는 밤>)

나는 이미 가슴이 촉촉히 젖어있었고 두 눈이 이슬로 반짝이고 있었다. 앵콜을 받고 한수 더 랑송하고 무대를 내려서는데 기다리고 섰던 손들이 내 손을 덮친다. 눈굽을 찍으면서 “정말 감동입니다. 고맙습니다.” 하면서 울먹임을 감추지 못한다.

더우기 이 시는 수십명이 자원으로 모인 자리에서 손에 원고를 들지 않고서도 하나같이 외워서 합송된다는 것이 한없이 자랑스러웠다. 내 고향에서 탄생한 시인의 시가 산 너머 바다 건너 해양 너머 다른 언어로까지 번역되여 가장 많이 애송된다는 것이 그 후세로서 어찌 자랑스럽지 않으랴? 감동이 없는 시를 사람들은 읊지 않는다. 더욱더 외우지 않는다. 감동은 허공에서 떨어지는것이 아니라 가슴에서 우러러 나오는 샘이다.

“조국이란 무엇일가요? 시인 김성휘의 <조국 나의 영원한 보모> 감상하시겠습니다.”

“… 내 잠들었을 때에도/후둑후둑 뛰는 내 심방 가까이에 앉아/맥박을 세여보는 보모입니다…”

구구절절 짜릿하게 심금을 울려주었다고, 조국애란 무엇인가를 깊이 느끼게 하였다면서 갈채를 보내준다.

10여분 랑송되는 시에 지겨움을 느낄 줄 알았는데 조용히 감상하면서 공감이 되면 머리를 끄덕이다가 진한 감동에는 눈굽을 찍는 이들, 긴 랑송은 끝났는 데도 물 뿌린 듯 조용한 분위기, 100여명의 청중들은 가슴에 울린 감동을 정리하고 있었다.

“나도 굽은 나무 되리라/못난 나무 되리라/지지리 못난 나무가 되여/고향의 성산 푸르게 하리라…”(김학송의 <혼의 노래>)

감동이 짙은 시는 사람을 행동하게 한다. 또한 운명도 변화시킨다. 나도 이 시를 읊고 귀향을 다졌고 이 시를 듣고 귀향한 이들도 있다고 한다.

가슴은 시의 온상이다. 위안과 공감과 희열을 주는 항체호르몬의 5000배 되는 강력한 다이도르핀(감동호르몬)이 생성되는, 마음을 울렁이게 하고 신심을 북돋아주고 철리를 느끼게 하는 그런 시는 알알하게 혹은 미여지게 가슴에서 솟구치는 정감을 주재료로 가공한 것이다. 시인의 경험이 발효된 짜릿한 느낌이 전달되는 감수라 하겠다. 즉 경험을 거쳐 느껴진 주관적 감정을 감격조의 론리에서 탈출시켜 한결 공감을 줄 수 있는 객관적 사물과 장면들이 구체적인 형상으로 업그레이드되면 독자(청중)들에게 균형 잡힌 감수로 전달된다. 언어의 구성이 렵기적으로 기이하거나 오묘하게 멋만 있으면 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심오한 이야기를 품고 암시적인 뉘앙스를 발하면서 살짝살짝 가슴을 토닥여주는 시를 정녕 좋은 시라 하겠다. 가슴으로 씌여진 시는 가슴으로 이어져 다시 가슴에 터를 잡는다. 이야기 없는 삶이 어디 있으며 감정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기계는 삶을 모르고 수집한 데이터에 의지한 정보를 내놓을 뿐이다. 이런 시가 어떻게 감동을 전할 수 있을가?

가슴(정감)은 뜨겁다. 이 뜨거운 열기를 차거운 머리(리성)로 식혀 시가 완성되는 과정에 시인은 해와 달을 바꾸는 고독의 시병을 앓아야 한다. 시병을 앓을 때 시인은 신이 된다. 그리하여 고금동서로 시는 아름답고 시인은 위대하다고 력사가 인정해주지 않았는가?

  ‘50% 이상의 가슴으로 40% 좌우의 머리로 10% 이하의 기계로’라는 공식으로 쓴 시는 다이도르핀(감동호르몬)과 엔도르핀(항체호르몬)을 많이 함유하고 있어 그대의 심신건강을 지켜줄 것이다.

来源:延边日报
初审:金麟美
复审:郑恩峰
终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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