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개구쟁이가 산에 갔다가 독수리 알 하나를 주웠다. 그는 그 독수리 알을 알을 품고 있는 암탉의 둥지 속에 집어넣었다. 얼마 뒤 병아리들과 함께 새끼독수리도 부화했다. 새끼독수리는 태여나자마자 닭들의 세상 속에 갇혔고 자신이 맹금이 아닌 병아리인 줄로 오해했다. 그는 다른 병아리들이 하는 짓을 그대로 따라했다. 땅을 쪼고 벌레를 찾으며 울타리 안에서 날마다 똑같은 일을 반복하며 평범하게 자랐다.
그러나 자라면서 새끼독수리는 자신의 부리가 다른 병아리들보다 훨씬 굽어지고 날개가 유난히 넓어지며 덩치가 압도적으로 커져가는 것을 느꼈다. 어느 날 자신의 날개를 펼쳐보이며 의아해하는 새끼독수리에게 늙은 암탉이 말했다.
“너는 키만 클 뿐이야. 독수리는 저 높은 하늘에 사는 법이고 넌 땅에서 태여났으니 닭이 맞아. 저 하늘을 보렴. 저기 독수리가 날고 있지. 하지만 넌 절대 그렇게 될 수 없어.”
새끼독수리는 그 말을 믿었다.
어느 날 밤, 수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였다. 들쥐떼가 무리 지어 닭장을 습격해온 것이다. 평소 닭장은 사람의 보호 아래 굶주림과 포식자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한 터전이였기에 닭들은 이런 공포를 겪어본 적이 없었다.
“저렇게 덩치가 크면 분명 우리를 지킬 수 있을 거야!”
닭들은 덩치만 크다는 리유로 자신들보다 강할 거라 막연히 기대하며 독수리가 쥐떼를 막아주길 바랐다. 그러나 닭들과 오랜 시간 함께 지낸 독수리 역시 들쥐떼를 보고 두려움에 움츠렸다. 그 순간 닭들의 눈빛이 두려움에서 분노로 바뀌였다. 실망감이 폭발한 닭들은 일제히 독수리에게 손가락질하며 원망하기 시작했다.
“겉만 번지르르한 허풍쟁이! 덩치가 저렇게 큰 주제에 우리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하다니!”
그날 이후 독수리는 그 조롱 속에서 점점 더 자신을 작게 만들었다.
세월이 흘러 울타리 안에서 위축되고 기가 죽은 채 초라하게 늙은 독수리는 어느 날 구름 한점 없는 맑은 하늘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위풍당당한 큰 새를 발견했다.
“아, 저렇게 멋진 새도 있구나.”
혼자 중얼거리는 독수리에게 곁에 있던 닭이 점잖게 말했다.
“저건 독수리라는 새야, 날개 달린 새들중에서 하늘의 왕이지. 하지만 넌 저런 모습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해. 넌 작은 들쥐한테도 쫓겨 다니는 평범한 닭에 불과하니까.”
닭은 악의가 없었다. 오히려 독수리가 하늘을 나는 꿈을 꾸다 실패할가 봐 걱정한 것이다. 독수리는 그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는 그냥 닭일 뿐이야.”
늙은 독수리는 생의 마지막 날 울타리 우에 올라서서 힘껏 날개를 펼쳤다. 독수리는 날지 못했다. 땅으로 그대로 처박혀 생을 마감했다.
이 우화를 읽을 때 우리는 닭들과 어울려 살며 자신이 맹금임을 완전히 잊은 독수리를 안타깝게 여긴다. 그런데 정작 우리 자신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을가? 우리는 진짜 자기 모습을 온전히 인지하고 있을가? 혹시 지금 나만의 좁은 닭장 안에 갇혀 본래 가진 커다란 날개를 잊은 채 평범함 속에 안주하고 있지는 않은가?
인간은 태여나면서부터 속한 공동체에서 정체성을 부여받는다. 독수리가 닭둥지에서 태여나 ‘병아리’라는 락인을 달고 닭들의 언어와 두려움을 체화했듯 우리 역시 가정, 학교, 직장, 사회가 던진 말들 속에서 자기 자신을 규정한다. ‘고집이 센 아이’, ‘공부를 못하는 사람’, ‘크게 될 리 없는 평범한 사람’ 등과 같은 평가들은 오랜 시간 내면에 스며들어 자아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이 거울만 오래동안 들여다보면 거울 너머 다른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리고 만다.
닭들이 독수리를 원망했던 표면적 리유는 기대가 배신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원인은 자신들과 다른 존재에 대한 본연의 두려움과 배척 심리이다. 집단은 언제나 자기들과 다른 모습의 대상을 경계하고 그 경계는 때로는 손가락질로 때로는 무시로 드러난다. 이런 환경 속에서 우리는 점차 ‘튀지 않는 닭’이 되여간다. 모두가 따르는 틀 속에 맞춰 살며 눈에 띄지 않으려 애쓰고 그 과정에서 본래 가진 잠재력과 커다란 날개를 영영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
우화를 읽다 보면 가장 가슴아픈 대목은 독수리가 하늘을 나는 진짜 동족을 보고도 ‘나도 저렇게 날 수 있다.’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는 멀리서 그 모습을 경외만 할 뿐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지 못했다. 닭의 선의 섞인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나는 그냥 닭일 뿐’이라는 스스로 부정하는 결론을 내렸다. 이것은 단순한 환경의 한계를 넘어 더 깊은 병페 바로 자기 무시의 문제이다.
우리는 타인의 눈부신 성취를 보고도 습관적으로 ‘나는 안돼’라고 선을 긋는다. 타고난 재능이 부족하거나 운이 없다 혹은 아직 때가 아니라고 스스로 합리화하며 포기할 핑게를 찾는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 앞길을 막는 건 외부의 장벽보다 내면에 스스로 쌓은 벽일 경우가 훨씬 많다. 독수리가 하늘을 날지 못한 건 날개가 없어서가 아니다. 단지 자신에게 비상할 날개가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고 설사 알았다 해도 주변 닭들의 시선을 의식해 날개를 펼 용기를 내지 못했을 뿐이다.
닭장은 독수리에게 익숙한 안전지대의 상징이다. 정해진 먹이, 언제나 함께 하는 무리, 위험이 차단된 울타리 비록 들쥐 습격 같은 례외는 있었지만 평소 닭장은 굶주림과 포식자로부터 보호받는 상대적 안전을 제공했다. 반면 끝없는 하늘은 자유를 주지만 위험이 존재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안에 큰 잠재력이 있음에도 현실로 펼치지 못하는 리유는 바로 익숙한 안전의 닭장을 떠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닭장을 벗어난 독수리는 배고픔과 외로움을 겪고 여러번 땅으로 추락하는 좌절을 맛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모든 고통과 시행착오야말로 그를 진정한 하늘의 주인, 진짜 독수리로 만들어주는 성장 과정이다. 인간은 언제나 편안한 안주와 고통스러운 성장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는다. 닭장의 평온함은 우리를 점점 작게 만들고 하늘의 모험은 본연의 크기를 회복시켜준다.
닭들은 차이를 견디지 못하고 독수리를 손가락질했고 친구 닭은 선의로 그의 꿈을 가로막았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여서 타인의 인정을 갈망하지만 그 인정을 얻기 위해 본성을 외곡해서는 안된다. 독수리가 닭들의 환심을 사려 닭처럼 구는 순간 그는 독수리로서 가진 모든 가능성을 잃어버린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주변 모두가 바라는 모습만 따라 살아가면 내면의 진짜 목소리는 점점 희미해지고 만다. 때로는 누군가 나를 비난하고 배척하더라도 그들의 시선보다 자기 내면을 직시할 용기가 반드시 필요하다.
닭의 말처럼 타인의 ‘선의’는 때로는 가장 위험한 족쇄가 된다. 진정한 동반자란 안전한 닭장에 머물라고 권하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두려움을 딛고 하늘을 향해 날개를 펼치는 사람을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좁은 닭장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을가?
첫째,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닭장이 무엇인지, 누가 만들고 어떤 틀로 나를 가두고 있는지 객관적으로 인식해야 한다.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나는 지금 누구의 기대에 맞춰 살고 있는가?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둘째, 깊이 자문해야 한다. 나는 본래 어떤 존재인지, 내 안의 진짜 날개는 무엇인지, 내가 진정으로 가고 싶은 곳은 어디인지 스스로 발견해야 한다. 어린시절 가장 하고 싶었지만 ‘현실적이지 않다.’며 접은 꿈이 무엇인지 떠올려본다.
셋째, 두렵고 외롭더라도 용기를 내 닭장을 떠나 하늘을 향해 한걸음 내디뎌야 한다. 이 첫걸음은 분명 힘들지만 이걸 포기하는 한 우리는 영원히 닭으로 늙어갈 수밖에 없다. 그 꿈을 위해 오늘 당장 실행할 수 있는 가장 작은 행동 하나를 찾아라. 그 작은 행동이 바로 첫번째 날개짓이다.
독수리는 안타깝게도 끝내 하늘을 날지 못하고 울타리 안에서 죽어갔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아직 기회가 남아있다. 독수리는 죽음 직전에야 자신의 날개를 펼쳐보았지만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독수리보다 더 일찍 더 용기 있게 날개를 펼칠 수 있다.
우리의 날개는 단지 접혀있을 뿐 사라진 게 아니다. 지금 머물고 있는 닭장은 잠시 쉬여가는 림시 숙소일 뿐 우리의 진짜 터전은 저 광활한 하늘이다. 저 하늘을 기억하고 나아가는 것 이것이 이 우화가 전하는 가장 진실한 메시지이다.
주변 닭들의 손가락질을 견디고 가까운 이들의 선의 섞인 만류를 딛고 마침내 날개를 펼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자기 본연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독수리는 독수리답게 살아야 하고 인간 역시 자기 본성에 맞춰 살아가야 한다. 타인의 틀에 억눌리지 않고 진짜 나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자연의 질서이자 인생의 궁극적인 진리이다.
우리는 모두 어딘가의 닭장 속에서 자란 독수리였다. 문제는 그 사실을 언제 깨닫느냐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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