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게 드리운 흰 머리, 안경너머 예지로 번뜩이는 두 눈, 구름 한점 없이 쾌청한 날 청도에서 만난 한영준옹은 박학다식하고 소탈하고 정열적인 학자였다.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기자와 만난 한영준(1937년생)옹의 첫 마디였다.

고향이 화룡인 한영준옹은 1961년에 연변대학 조문학부를 졸업했고 연변1중 교원을 거쳐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정년퇴직했다. 그가 집필한 저서중 네권의 도서가 재판되였는데 《습자책》은 재판을 거듭해 5만부 이상 팔렸고 《우리 말 고치기》도 2만부 이상 팔렸으며 《6용 우리 말 사전》도 2만부 이상 팔렸다. 또한 20년 전에 출판한 《우리 말 작문지도》는 지난해에 중앙민족출판사에서 재판하기까지 했다.
“《우리 말 한자(汉字)옥편》을 곧 인쇄에 넘기게 됩니다. 아마 지금까지 없었던 방대한 량의 옥편이 될 겁니다.”
한영준옹에 따르면 중국에서 만든 옥편에는 한자가 5만 3000개가 수록되였고 한국에서 만든 대자전에도 한자가 5만 3000개가 수록되였지만 그가 이번에 집필한 《우리 말 한자 옥편》에는 한자가 7만 2000개 수록되였다.
방대한 공정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옥편 집필에 손을 댄 리유는 완정한 옥편을 후대들에게 물려주기 위한 일념 때문이였다. 25년 전 중국어 사자성어를 번역하던 그는 자전이 해석이 전면적이지 못하고 빠진 것이 많으며 틀린 글자가 많은 것을 발견하였다.
“장장 25년간 연구하였습니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출판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한영준옹의 얼굴에는 자긍심이 흘러 넘쳤다. 지금까지 그는 ‘옥편’ 연구를 위해 30여만원의 자금을 투입했다. 일반적인 타자는 한장에 5원이지만 번체자는 한장에 80원이라고 했다. 검퓨터에 입력 안된 글이 많은 상황에서 많은 번체자는 스캔한 후 다시 옮겨야 한다.
그는 연변대학 중문계 석사생이였던 안해 김정희의 공백이 너무나도 크다고 했다. 담담하게 말했지만 그의 얼굴에는 몇해 전 타계한 안해에 대한 그리움이 흘러넘쳤다.
25년 동안 옥편 연구에 몰입하는 한편 한영준옹은 최근 시조에 매료되였다.
“어느 한번 연변텔레비죤방송국 국장을 지냈던 김희관씨가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 시조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보고 시조에 관심을 갖게 되였습니다.”
연변시조협회는 1992년 8월에 정판룡, 김학철, 김철, 리상각 네명의 지성인들이 설립, 그는 설립 25주년 행사부터 시작해 참가했다.
시조는 석줄에 깊은 내용을 담아 주제가 심오하고 집약적이며 입에 잘 오르고 생명력이 강한 특징을 갖고 있다. 기, 승, 전, 결 기본 률로 간결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명쾌한 시조를 접하면서 그는 시조의 묘미에 빠지게 되였고 우리 민족의 시조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시조는 원래 정형시로 되여야 하지만 현대시조는 비정형시가 많아 아쉽다고 했다. 특히 한자로 된 것과 구두로 된 시조를 현대인들이 나름 대로 해석하고 번역하는 것은 제창할 바가 아니라고 했다.
“번역하더라도 반드시 정형시로 번역해야 한다고 봅니다.”
비정형시로 된 시조가 많기에 우리 민족의 시조가 세계화와 멀어진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중국은 5언률시, 7언률시가 유명하고 영국, 이딸리아 역시 정형시로 유명하고 일본은 5+7+5 형태의 하이꾸로 세계화에 성공했다.
다행히 정형시를 쓰기 위한 열조가 조선족시조 애호가들 속에서 일고 있어 기쁘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현재 연변 시조협회(회장 리영해)에는 300여명 회원이 있으며 시조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자치주 창건 70돐과 연변시조협회 설립 30돐을 맞으면서 그는 《연변조선족시조집》 출간을 위해 여직 발표된 시조중에서 600수를 선정하고 직접 편집했다. 또 선정된 600수의 시조를 넓이 33센치메터, 길이 150메터 되는 선지에 옮기는 일에 나섰다.
서예가이기도 한 한영준옹은 그 벅찬 과정을 자치주 창건 70돐 헌례작품으로 내놓으려는 일념으로 옹근 석달을 노력해 마침내 ‘세기적인 작품’을 완성했다. 장시기 동안 차디찬 유리에 손을 대고 쓴 탓으로 그의 오른손 새끼손가락은 이미 마비되여 거의 기능을 잃었다.
“아버지의 작품은 기니스기록에 올라도 문제 없을 것 같습니다.”
연변대학을 졸업하고 청도에서 사업하고 있는 아들 한웅이 말했다. 그는 아버지에게는 한가한 시간이 단 한시간도 없다고 했다.
“저는 철저한 중국공산당당원입니다. 한점 부끄럼없이 살고 싶고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여 나라와 후대를 위해 공헌하고 싶습니다.”
이제 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도 루루히 설명해 나가는 한영준옹의 말을 들으면서 경건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가 이제 열어갈 아침은 또 어떤 모습일가?
허강일 기자
- 많이 본 기사
- 종합
- 스포츠
- 경제
- 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