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6월 8일 오후, 이런 태양빛 아래라면 기운 넘치는 아이들도 기운이 쏙 빠질 법한데 ‘문화와 자연 유산의 날’을 맞아 연길시아리랑광장에 마련된 무형문화재 체험부스 앞에서 아이들이 왁자지껄 떠들고 있어 심상치 않다.
무엇이 즐거운지 부스를 떠나는 아이들의 얼굴에는 즐거움이 력력했다. 그런데 저 아이들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무엇이지? 지푸래기가 아닌가?!
짚풀공예 대표적인 기능 보유자인 제3대 전승인 권영철.
부스에 전시된 물건을 살펴보니 대부분이 짚신, 멍석, 광주리, 망태 등 짚으로 만든 물건들이였다.
그리고 그게 그렇게 신기해보이는지 어른들의 설명을 듣고 있는 아이들이 손에 든 짚풀공예품을 놓을 념 안 한다. 한켠의 짚풀공예 체험코너에서는 젊은 아빠, 엄마와 아이들이 새끼를 꼬는 방법을 배우느라 법석이다. 우리 조상들의 삶 그리고 그들의 슬기로움과 지혜가 오롯이 묻어나는 순간들이였다.
현재, 우리 지역의 조선족짚풀공예는 2009년에 성급 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였고 보존장소는 70리 평강벌의 아늑한 곳에 자리한 화룡시 투도진 신민촌이다.
10여년 전 취재차 들렀던 신민촌은 우리 지역 시골마을이 다 그렇듯 농작물을 쪼아먹는 새들을 쫓기 위해 논밭 곳곳에 허수아비를 세워두고 있었다. 나무막대기로 십자형 뼈대를 만들고 거기에 헌옷을 입히고 또 짚이나 새끼를 리용해 ‘머리’를 만들어 꼭대기에 꽂은 뒤 숱이나 먹물로 눈, 코, 입을 그려넣고 큰 밀짚모자를 씌웠다.
짚풀로 만든 단순한 인형이지만, 논밭 속 그 허수아비는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마을사람들의 깊은 소망이 담겨있었다.
늦가을 바심이 끝나면 논 가득 버려지는 지푸래기들, 옛 조상들은 이 짚을 활용해 방석, 짚신, 멍석, 둥구미를 만들어 일상에서 요긴하게 썼다. 바람이 잘 통하고 보온도 잘 되는 짚으로 만든 생활용품은 우리 조상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조선족짚풀공예 성급 대표 전승인 박윤호.
지난 세기 90년대초부터 신민촌 마을사람들이 만들어낸 짚풀공예품은 중국농민예술절에도 전시되고 국내외로 판로를 넓혀가면서 2000년대에는 마을의 ‘일촌일품’ 중점프로젝트로 자리잡기까지 했다.
10여년 전 당시 신민촌은 마을의 촌민인 박윤호, 권영철, 김학봉이 주력으로 짚풀공예품 만들기를 이끌어가고 있었다.
덤덤한 표정으로 두 발을 곧게 펴고 엄지발가락에 끈을 걸어 짚신을 삼던 권영철은 우리를 보자 바지에 묻은 지푸래기를 툭툭 털며 반갑게 맞아줬다. 세월의 무게를 지고 오느라 구부정해진 등과 반갑다 맞잡은 두 손은 농사철 농기구와 흙에 거칠어지고 손바닥은 겨우내 짚을 만지면서 닳고 갈라져 피가 흐르고 딱지가 지면서 제법 껄껄했다.
당시 권영철은 대표적인 기능보유자로 제3대 전승인이였다.
그때 우리 취재진도 평소 쉽게 접하기 힘들었던 짚풀공예품의 제작 과정을 처음으로 볼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짐을 싣기 위하여 지게에 얹는 소쿠리인 ‘발채’, 닭알둥지, 감자와 옥수수 등의 곡물을 나르는 데 쓰이는 ‘주루막’, 김치독 덮개 등 평소 접하기 힘든 짚풀공예품과 이 밖에도 미투리, 패랭이, 도롱이 같은 생활용품과 식생활용품인 거적, 두트레방석, 저장용품인 종다래끼, 꼴망태, 쟁쟁이바구니 등 이름만으론 형태를 알 수 없는 공예품을 비롯해 창작품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짚풀공예 명맥을 이어가는 신민촌 촌민들.
한가닥의 지푸래기를 당기면 뚝 하고 끊어지지만 그것들을 여러개 모아 엮으면 해님, 달님도 하늘로 끌어올렸다는 전래동화의 튼튼한 동아줄이 된다.
따라서 ‘지푸래기라도 잡는 심정’이라며 지푸래기를 실낱같은 희망에 빗댄다면 지푸래기들은 말 그대로 섭섭할 것이다.
‘짚풀 박물관’을 방불케 하는 권영철의 집은 그야말로 별천지였다.
“옛날엔 벼짚더미가 숨박꼭질하는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였다네. 벼짚 두어단 빼내고 그 안에 숨어있다가 따뜻함에 깜박 잠이 들어 어두워지도록 집에 들어가지 않아 엄마에게 혼나기도 하고…”
마당에 가득 쌓인 벼짚더미에는 권영철의 추억이 고스란히 쌓여있었다.
그리고 얼마 전 신민촌을 다시 찾아갔을 때는 권영철과 김학봉 로인은 이미 세상을 떠나고 팔순이 다된 박윤호 로인이 홀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박로인은 현재 조선족짚풀공예 성급 대표 전승인으로 있었다.
박로인은 30년 전부터 짚풀 수공예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논일을 마치고 나오는데 논둑에 버려진 지푸래기가 가득했어. 하두 버리기 아까워서 끌고 온 소수레에 가득 실어다 말렸지. 그리군 농사일이 끝나 한가할 때 방석을 만들기 시작했지.”
따로 배운 적은 없다. 13세쯤 됐을 때인가, 징징 울어대는 동생을 업고 아버지가 사랑채마루에서 만들고 있는 것을 어깨너머로 유심히 지켜본 게 전부이다.
“심심하니까 옛날에 아버지가 하시던 것을 어디 한번 해보자고 시작한 것이 이렇게 되였소.”
평생을 농민으로 살아온 박씨는 가을이면 큰 낫자루로 아침부터 서녘 산 너머로 해가 질 때까지 나락을 베여 바닥에 깔아놓고 어느 정도 마르면 또 묶는 일을 했다. 그렇게 몇주가 지나면 소달구지로 벼단을 실어 집앞까지 옮겨온 후 또 몇주가 흐르면 타작을 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숙성된 지푸래긴 다시 짚단이 되여 마당 한켠에 성곽처럼 쌓인다. 짚단은 박로인의 일년의 일용거리였다. 겨울 동안 아궁이의 땔감은 물론이고 짚과 새끼를 한올한올 엮어가며 설계도 하나 없이 머리속 셈법만으로 둥구미를 틀고 갖가지 모양의 생필품을 만들어낸다. 새초롱, 짚독 등 정교한 솜씨가 아니면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들도 박로인은 마술사처럼 척척 만들어냈다.
그중에서도 박로인은 유난히 짚신만들기를 좋아했다. 제대로 된 짚신 한컬레를 만들려면 옹근 하루 품을 정성을 들여야 한다.
언제나 바빴던 시절, 낮일을 마친 박씨의 아버지는 호롱불을 밝히고 아이 몫, 부인 몫, 자기 몫의 짚신까지 컬레 컬레 삼았다 한다.
박로인은 어릴 때 해진 짚신을 버리고 다시 새 짚신을 바꿔 신는 날이면 신이 나서 온 동네를 뛰여다녔다고 한다. 그러면 언제나 “뛰지 마라, 신발 닳는다.”는 어머니의 꾸지람이 뒤따랐다.
문헌자료에 따르면 몇천년 전의 청동기시대부터 우리 민족은 짚풀공예의 가장 기본적인 방법인 엮음법을 활용할 줄 알았으며 일상생활에 필요한 용품들을 만들어 썼다. 고구려 무덤벽화와 같은 자료에서 짚풀로 된 키나 삿갓 같은 용품들을 다루고 착용한 인물형상들이 보인다. 짚풀공예는 근현대에 들어와서도 민간에서 계속 전승되여왔고 지난 세기 70년대까지만 해도 집집마다 짚풀로 가마니를 짜고 삿자리나 돗자리를 엮고 키나 광주리도 만드는 정경을 종종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지금은 공예품이라는 이름으로 맥을 이어가고 있다.
“짚풀이라야말로 우리 백성들의 진짜 살아있는 력사이야기입니다.”
박로인이 한마디 넌지시 던진다.
그러고 보니 대부분의 력사책에는 왕, 왕비, 귀족, 신하, 선비가 주로 등장한다. 이렇게 지배세력의 관점에서 력사를 기록하다 보니 백성들의 삶은 어떠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짚풀에 관심을 가지다 보면 그 시절 백성들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다.
과거 백성들의 질긴 생명력을 ‘민초’라고 표현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던 것이 짚풀이였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선녀와 나무군 같은 옛날 전래동화에 나오는 나무군들도 하나같이 지게를 지고 ‘짚신’을 신었다. 또 어머니를 여읜 오누이는 하늘에서 내려준 새 ‘동아줄’과 새 ‘삼태기’ 덕분에 못된 호랑이를 따돌리고 하늘로 올라가 해와 달이 되였다.
우리 조상들은 농경이 주된 산업이였기 때문에 풀과 짚은 삶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속담만 보더라도 짚을 소재로 한 것이 많다. 반가운 사람을 맞으려고 허둥지둥 정신없이 뛰여나간다는 뜻을 가진 ‘짚신을 거꾸로 끌다’, 하찮아서 쓸모가 없을 듯한 물건도 없어지면 서운하다는 뜻의 ‘짚불도 쬐다 나면 섭섭하다’, 약한 것이라도 큰일을 해낼 수 있다는 ‘짚불에 무쇠가 녹는다’ 등등이 있다.
전통사회는 거의 모든 것들이 짚풀을 재료로 유지되였다. 가축의 축사나 둥우리를 비롯해 비올 때 쓰는 도롱이, 멍석과 동구미, 바구니와 키, 수세미와 두트레 방석 등 짚풀이 없었다면 일상생활 자체가 불가능했다.
우리 민속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이가 태여나거나 마을 제사를 지낼 때 대문 앞이나 동구 밖에 쳤던 금줄은 벼짚으로 꼰 새끼줄이였다. 숱, 한지, 솔가지 등을 꽂아 외부인의 출입을 금한다는 표시를 한 것으로 꼬는 방향을 왼쪽으로 했기 때문에 새끼라고도 했다. 줄다리기 줄도 벼짚이나 칡덩굴과 같은 짚풀로 꼰 것이였다. 지금도 우리 지역에서 정월 대보름에 편을 나누어 줄다리기를 한다. 이기는 편이 풍년이 든다고 믿었기에 죽을 힘을 다해 줄을 당겼다. 특히 성별로 줄다리기를 할 때면 녀성이 이기는 편이 풍년이 든다고 믿었기 때문에 녀성이 이길 수 있도록 온 마을 사람들이 암암리에 도왔다고 한다. 그리고 마을 탈놀이에서 탈군들이 썼던 벼짚으로 만든 12가지 띠 탈 등도 짚풀을 재료로 했다. 그런가 하면 집 안팎을 지켜주는 가장 높은 신인 성주신은 단지 뚜껑을 짚으로 씌운 후 마루 한쪽에 모셔두었다. 아기를 보호해주는 삼신 할머니도 짚풀로 모셨다.
그리고 초가집은 과거에 짚풀이 가장 많이 쓰이던 곳이였다. 부유한 량반들은 기와지붕을 올렸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대개 벼짚으로 초가지붕을 올렸다. 1, 2년에 한번은 해짚으로 갈아주는데 혼자서는 할 수 없는 큰일이라 품앗이로 서로 도와주었다고 한다.
“초가지붕을 새로 하는 날에는 동네가 떠들썩하니 잔치하는 것 같았다네.”
박윤호 로인은 한참을 그렇게 추억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옆에서 같이 이야기를 듣던 최송철 촌당지부 서기도 목소리를 높였다.
“어르신들이 정말 열심히 노력해서 우리 마을이 짚풀공예로 아주 유명해졌습니다. 우리 마을에만 여러 대회에서 상을 많이 탔습니다. 당시 어렵게 다시 부활한 우리 짚풀문화가 지금은 이래저래 배우려는 젊은이들이 없어 너무 안타깝습니다.”
추수과정마저 기계화가 된 요즘 작품으로 만들 제대로 된 짚단 한단 얻기도 힘든 데다 먹는 품에 비해 가격이 맞지 않고 짚풀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도 거의 없다. 사실상 박로인이 손을 놓으면 이제 이 마을의 짚풀공예도 맥이 끊기게 된다.
“지금은 눈이 침침해 일을 할 수가 없어. 이젠 숨도 가쁘고. 재작년까지만 해도 만들었는데 지금은 못하고 있어. 그리고 만들어도 누가 안 사가니까. 장식용으로 가끔 사갈 때도 있지만…”
무형문화유산이라 하면 그럴듯해보이지만 실상은 그것을 영위하자면 어려움이 많다. 가장 어려운 것이 경제적인 문제이다. 판로가 없으니 누가 대를 이어 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전수자 찾기도 힘들다.
한동안 우리는 짚풀공예품은 물론 짚풀문화를 잊고 있었다. 휴대폰으로 시원한 랭면에 막걸리를 논두렁까지 주문해 먹으며 농사일을 하는 시대에 벼짚 생활용구를 들춰내는 일은 시대착오로 보일 수 있다.
“우리 로인네들 늙어가는 게 궁금하면 언제든지 또 와요. 나 죽으면 할 사람도 없을 테니 구경도 좀더 하고.”
나지막한 소리로 혼자말처럼 중얼거리며 박로인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방구석에 놓여있던 짚신을 신고 옛추억을 살며시 밟아본다.
신연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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