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날, 길림성 통화시에 위치한 양정우간부학원에서는 특수한 당수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강단 우에는 항일 철혈장군 양정우의 손자 마계지가 연설하고 있었다. 감동적인 부분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는 나무껍질 한장을 꺼내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나무껍질은 부모님이 할아버지가 희생된 곳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식량이 다 떨어졌을 때 할아버지는 이런 나무껍질을 자시면서 허기를 달랬습니다.” 현장에 있는 청중들은 모두 감동을 금치 못했다.
양정우는 본명이 마상덕으로 1905년 하남성 확산현의 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으며 항일민족영웅, 동북항일련군의 주요 창건자와 지도자중의 한명이다. 1927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이듬해 혁명의 수요로 고향을 떠나면서 안해와 두 어린아이들을 남겨두게 되였다. 하지만 그번 리별은 영원한 리별이 되고 말았다.
양정우는 선후하여 5차례나 체포되여 투옥되였고 여러차례 고문을 당했지만 절개를 굽히지 않았다. 항일투쟁에 투신하기 전에 그는 감옥에서 금방 구출되여 상처를 치료하지도 않은 채 즉시 전투에 투입할 것을 신청했다.
1931년 9.18사변 후, 양정우는 중국공산당 할빈시위 서기로 있었으며 만주성당위 군사위원회 서기 대리를 겸임하여 동북인민의 항일투쟁을 령도했다. 1932년 가을, 그는 남만 즉 길림성 반석, 해룡(지금의 매하구), 류하 일대에 파견되여 중국로농홍군 제32군 남만유격대를 조직하고 반석 홍석라자를 중심으로 하는 유격근거지를 창설했다. 1934년, 17개 항일무장을 통합하여 항일련합군 총지휘부를 설립하고 총지휘를 맡았으며 같은 해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군장 겸 정치위원을 맡았다. 1936년에 동북항일련군 제1군 군장 겸 정치위원,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총사령관 겸 정치위원으로 있었다.
적아의 력량 차이가 현저하고 전쟁이 오래동안 지속되는 간고한 상황에서 양정우는 동북항일련군을 인솔하여 수많은 밀영을 세우고 령활하고 기동적인 전략전술을 제정했으며 산간지대 유격전을 전개하여 일본침략자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항일무장력량으로 부상했다.
양정우는 시종일관 인민에게 뿌리내리고 인민을 위하는 것을 견지했다. 그가 전투를 지휘, 배치하는 중요한 원칙은 바로 ‘군중들에게 해를 끼치는 전투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매번 적을 섬멸하고 물자를 로획할 때마다 그는 현지 백성들에게 일부분을 나누어주었다. 양정우는 부대와 백성을 등심과 등유로 비유했는데 동북항일련군은 마지막까지 군중과 밀접히 련계하고 군중에 긴밀히 의거했다.
동북항일련군은 한때 오래동안 당중앙과 련락이 끊겼지만 충성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지부를 련에 설립하는 원칙을 준수하여 시종일관 부대 당조직 건설 사업을 중요한 위치에 놓았다.
련이어 타격을 입은 일본군과 괴뢰군은 동북항일련군에 대한 포위공격에 박차를 가했다. 1940년초, 양정우와 부대는 겹겹한 포위망에 빠졌다. 양정우는 적의 가장 주요한 목표가 바로 그 자신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며 동지들에게 병력을 나누어 포위를 돌파하라고 명령했다. 양정우는 이렇게 말했다. “동지들, 혁명을 위해 우리는 끝까지 견지해야 합니다. 죽더라도 적에게 굴복해서는 안됩니다!”
자료에 따르면 1939년 10월 하순부터 1940년 2월 23일까지 양정우가 희생되기 전 100여일간 그는 47차례나 전투를 전개했다.
1940년 2월 23일, 길림성 몽강현 부근에서 양정우는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며 적들과 5일간 대치했다. 적들의 항복 권유에 양정우는 분노의 총알로 응수했으며 결국 35세의 나이로 장렬하게 순국했다. 적들은 잔인하게 양정우의 머리를 자르고 배를 갈랐지만 그의 위에는 알곡이 하나도 없고 소화되지 못한 풀뿌리, 나무껍질과 솜털만 들어있는 것을 보았다. 쟁쟁한 철골은 적들도 경탄케 했다.
후에 몽강현은 정우현으로 개칭했다. 정우거리, 정우소학교, 정우광장 등 ‘정우’의 흔적이 검은 땅에 깊이 새겨져있다.
양정우렬사릉원에서 멀지 않은 양정우간부학원은 2021년에 정식 가동되여 당원간부를 주체로 하는 학원들을 대상으로 당성교육을 전개했으며 지금까지 연 30여만명을 양성했다. “모든 수업은 동북항일련군 정신을 담고 있으며 모두가 일터에서 용감하게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과감히 책임지며 진정으로 홍색정신을 사업을 추진하는 동력으로 전환시키도록 격려해주고 있다.” 양정우간부학원 훈련부 주임 국리리는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우리 집의 가보입니다.” 환갑이 넘은 마계지는 조심스럽게 나무껍질을 챙겨넣었다. 기차 운전사로 퇴직한 그는 하남에서 길림으로 이사하여 양정우간부학원 객원교수로 초빙되여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마계지는 양정우와 항일련군 전우들이 생명으로 초심과 사명을 실천하여 영원히 마멸되지 않는 정신적 금자탑을 쌓았으며 한 세대 또 한 세대 사람들이 앞으로 나아가도록 격려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신화사 기자 소미기
- 많이 본 기사
- 종합
- 스포츠
- 경제
- 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