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여년의 력사를 간직한 이 오래된 거리는 한쪽 끝은 도시와 이어져있고 다른 한쪽 끝은 바다와 이어졌으며 오래된 거리의 석구 패방에는 ‘해문관’이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있다. 이 세 글자는 군사요충지로서 그 중요한 역할을 지켜봐왔다.
절강성 태주시 초강구당위 당사연구실의 퇴직간부 방근법이 성남쪽의 높지 않은 구릉을 가리키며 “1941년 4월, 일본군이 해문을 진공할 때 절강성 동부 연해지역을 지키고 있던 태주 수비지휘부의 장지영 장군은 해문관 부근 회엄령에서 장렬히 희생했다.”고 말했다.

장지영은 1902년에 절강 제기 리포진 반산촌에서 태여났다. 1925년 11월에 황포군관학교 조주분교 제1기로 입학하였고 1926년 졸업 후 국민혁명군에 가입하여 북벌전쟁에 참가하였으며 북벌군 패장, 련장, 영장 직을 력임했다. 1929년 절강성 보안부대로 전출되여 영장, 상좌 퇀장, 성보안처 부처장 등 직을 력임했다. 1937년, 항일전쟁이 전면적으로 폭발하자 장지영은 결연히 항일전쟁에 뛰여들어 절강성 보안 제2종대 소장 사령, 제3전구 사령장관부 고급참모 등 직을 력임했다.
절강 동부 연해에 위치한 해문은 예로부터 군사요충지로 알려져있었다. 1940년, 장지영은 명을 받고 절강 동부 연해지역 태주 수비지휘부의 소장 지휘관으로 전임되여 해문에 주둔하면서 온령과 림해 일대의 해안 방어를 책임졌다.
당시 수비부대는 대부분 지방자위대원과 수상경찰로 구성되였는데 군사 자질과 규률성이 비교적 낮았다. 장지영은 부임한 후 부대조직규률을 엄격히 집행하고 상벌을 분명히 하였으며 엄격한 군사훈련을 실시하였고 항일구국의 도리로 장병들을 교육하며 군사기술을 열심히 련마하여 일본침략자를 타격하고 희생된 동포들의 원수를 갚을 것을 격려했다. 그의 세심한 지도와 훈련을 통해 부대의 자질이 뚜렷이 제고되였다.
1941년,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은 절강성 동부에 있는 수만명의 중국군대를 소멸하기 위해 해상에서 륙해공 3군의 련합공격을 발동했다. 혹독한 전황에 직면한 장지영은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수비부대를 조직하여 엄밀하게 배치하여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4월 18일 밤, 수비군은 몰래 상륙한 일본 침략군과 치렬한 전투를 벌렸다. 포성이 울부짖고 탄알이 비발치듯 하는 해문은 화광으로 인해 대낮처럼 환했다.
지휘부에서 지휘하고 있던 장지영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경위영에 엄밀한 경계를 명령하는 동시에 증원을 요청하는 전보를 보냈다. 그러나 참모와 부관 몇명을 거느리고 전선을 옮기던중 불행하게도 일본군의 총검에 가슴이 찔려 장렬하게 희생되였다. 그해 장지영은 39세였다.
올해 55세의 장재부는 지난 세기 90년대 반산촌을 떠나 창업했지만 어릴적부터 들으며 자란 영웅이야기를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그는 “황포군관학교 졸업생중 우리 반산 출신은 10여명이 넘는데 장지영이 바로 그중에서도 뛰여난 인물이였다. 매년 설이 되면 고향에 내려가 어른들과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가장 많이 하고 가장 많이 듣는 것이 바로 항일영웅들의 이야기이며 마을사람들은 이를 자랑스러워한다.”고 말했다.
반산촌 장씨사당 옆에는 높이 약 2.5메터, 길이 20메터의 대리석 조각상이 세워져있다. 2013년, 반산촌은 장지영을 포함한 12명의 항일전쟁 영웅상을 조각해 고향과 나라를 지키는 영웅들의 정신을 후대들에게 전해 젊은 세대들이 항상 감사의 마음을 간직하며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저 하는 뜻을 품기를 희망했다.
마을의 ‘00후’ 장신남은 줄곧 ‘군인의 꿈’을 품어왔다. 지난해 대학교 2학년이였던 그는 입대에 성공했다. 그는 “선인 영웅들의 정신에 감화를 받아 우리 마을의 청년들은 해마다 적극적으로 입대한다. 나는 실제행동으로 영웅정신을 잘 계승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신화사 기자 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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