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라지꽃은 장미처럼 그렇게 아름다운 꽃은 아니지만 내가 셈이 들기 시작해서부터 80 고령을 넘어선 오늘까지 언제나 가슴속에 청신한 모습으로 피여있는 꽃이다.
나는 여섯살 나던 해에 어머니를 잃었다. 여느 애들 같으면 커가면서 가끔 세상 뜬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렸으련만 나는 천성이 둔한편이였던지 기억 속에 어머니의 얼굴모습을 새겨놓지 못하였다. 기억에 남아있는 건 어머니의 장례를 지내던 날 새파란 도라지꽃을 꺾어 어머니의 무덤 앞에 꽂아놓던 일 뿐이다. 그때 내가 왜서 어머니의 무덤 앞에 도리지꽃을 꺾어서 꽂아 놓았을가? 슬퍼서? 아니면 소꿉놀이로?
그러다 셈이 들기 시작한 여덟살 나던 해에 새어머니가 들어왔다. 새어머니는 마음씨 착한 분이여서 나를 잘 대해주었으나 그때부터 어쩐지 세상 뜬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강렬하게 생기기 시작했다. 집에는 어머니의 사진 한장 없었다. 어머니는 어떻게 생겼을가? 그런데 그렇게 어머니를 그리워할 때면 자연히 어머니의 무덤 앞에 꽂아놓던 새파란 도라지꽃이 떠오르군 했다. 나는 그 새파란 도라지꽃을 머리에 떠올리며 얼마나 많이 어머니! 하며 불러보았는지 모른다…
그러다가 내가 초중 1학년에 붙어 현성중학교에서 공부하던 겨울방학의 어느 날 외숙부가 우리 집에 놀러왔다. 외숙부는 며칠 놀다가 외할머니가 나를 몹시 보고 싶어한다면서 나를 데리고 갔다.
그때 외가집은 밀산현 현성에서 90여리나 떨어진 동발촌이라는 마을에 있었다. 나는 외숙부를 따라 10여시간이나 차를 타고 밀산역에서 내려 그 먼곳을 도보로 갔다. 지금도 눈이 흩날리던 황량한 흥개호 갈대밭길을 걷던중 갑자기 길가의 눈 속에서 푸드득 소리를 내며 장꿩 한마리가 날아가던 일이 머리속에 생생하다. 그때 얼마나 놀랐던지…
외가집에 도착하자 외할머니는 나를 붙잡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나서 낡은 가죽트렁크 속에서 어머니가 처녀시절에 잘랐다는 머리태를 꺼내 나한테 보여주었고 또 사진첩에 보관했던 어머니의 결혼사진을 보여주었다. 나는 한손에는 어머니의 머리태를, 다른 한손에는 어머니의 결혼사진을 들고 보았다. 나는 사진 속 어머니의 얼굴에서 눈길을 뗄 수 없었다. 아, 얼마나 젊디젊은가! 너울을 쓰고 나를 마주보는 어머니의 얼굴은 이슬을 머금고 갓 피여난 도라지꽃마냥 그렇게 생신했고 아름다웠다. 열일곱살 나이에 결혼했다는 어머니는 아직 애티를 벗지 못한 소녀였다. 어느새 내 눈에서 눈물이 방울져 흘렀다.
옛날 녀인들은 처녀시절 길게 자래운 머리태를 잘라두었다가 후날 머리장식을 할 때 다시 머리에 얹어 사용했다 한다. 아, 어머니의 유일한 흔적인 어머니의 머리태!
꽃너울을 쓰고 아버지와 팔장을 끼고 찍은 어머니의 결혼사진은 내 머리속에 어머니의 모습을 다시 재생시켜 그려놓은 유일한 기념품이다. 아, 사진 속 어머니의 아릿다운 소녀모습!
그리고 도라지꽃, 내가 셈이 들어 어머니를 그리워할 때마다 어머니의 모습을 대신하여 눈앞에 떠오르던 도라지꽃, 아, 어머니의 화신 도라지꽃!
외할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어머니는 생전에 노래도 잘 불렀다고 한다. 노래 <도라지꽃>은 어머니가 제일 즐겨 부른 노래였는데 그 노래를 부를 때면 듣는 사람 모두가 찬탄했다고 한다.
그렇게 나한테 어머니의 생전이야기를 자랑스레 들려주던 외할머니는 내가 개학이 되여 학교로 돌아온 후 얼마 안되여 세상을 떠났다. 외숙부가 편지로 외할머니가 갑작스레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는 부고를 전해왔던 것이다…
세월이 흘렀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 꼭 79년이 되는 금년 봄에 나는 도라지꽃 씨를 얻어다 집앞 정원에 심었다. 원래 구역내 정원은 채소를 심는 밭이였는데 후에 상급의 규정에 의해 채소를 심지 못하게 되였다. 그래서 과일나무나 꽃을 심게 되였는데 나는 우리 집앞 정원에 살구나무 세그루를 심어놓았다. 그랬건만 살구나무들 사이에는 잡풀들이 무성하게 자라 미관에 불쾌한 감을 주었다. 그래서 올해 한평방도 안되는 면적에다 도라지꽃 씨를 심고 비닐하우스를 씌워 모를 키웠다. 모가 좀 자라자 보는 사람들마다 모가 너무 배서 3분의 2쯤은 솎아내야 가을에 가 옮겨 심을 수 있다는 것이였다. 3분의 2나 되는 모를 솎아내면 과수나무 사이의 공간에 심을 모가 태부족이였다.
나는 3분의 2나 되는 모를 솎아버리는 것이 아까워 잠자리에 누워서도 이리저리 궁리해보았다. 어떻게 하면 솎지 않고 다 옮겨 심을 수 있을가? 생각하던 끝에 나는 먼저 시험적으로 몇포기 옮겨 심어보기로 하고 이튿날 도라지모를 옮겨 심을 땅을 파서 고른 후 가볍게 다지고 10센치메터 간격으로 작은 구멍을 뚫어놓았다. 그리고 나서 애들 장난감 삽으로 도라지모를 떴다. 그리고 핀세트로 뿌리가 상하지 않게 조심히 집어 뚫어놓은 땅구멍 속에 옮겨 심었다. 며칠 후 보니 실오리 같던 도라지들이 죽지 않고 모두 살아난 것이였다.
우리 집은 길옆에 있어 오가는 사람들이 내가 핀세트로 도라지모를 옮겨 심는 것을 보고 걱정되여 타일렀다. 십여년이나 도라지농사를 했다는 한 녀인은 내가 하는 일이 너무 한심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아바이, 도라지모는 늦가을에 옮깁꾸마, 실오리처럼 그렇게 가늘고 작은 것을 옮겨 살아나겠슴둥? 살지 못합꾸마. 가을에 뿌리를 옮깁소.”
녀인은 도리지농사에 대해 상세히 나한테 알려주었다. 가을까지 모를 기르기 위해 솎아버려야 할 모가 아까워 실오리 같이 야들야들하게 자란 모를 옮겨 심는 나의 마음도 조마조마하였다. 그러나 이미 실험을 통해 성공하지 않았는가. 나는 누가 뭐라 하든 먼저 옮겨 심은 도라지모들을 세심히 관찰하며 20여일간을 리용하여 몽땅 옮겨 심었다.
“아이유, 몽땅 살았습꾸마. 우린 도라지모를 가을에만 심는 줄로만 알았는데 봄에 옮겨 심어두 잘 자랍꾸마, 예?”
나한테 도라지농사법을 가르쳐주던 그 녀인이 길을 가다가 들러서 보고 감탄해서 하는 말이였다.
옮겨 심은 도라지모는 모두 건실하게 자라더니 8월에 접어들어 꽃이 피기 시작했다.
“한 3년 자라면 한 둬마대는 넉넉하게 캐겠스꾸마, 팔면 돈이 적재일껨둥!”
나한테 도라지 심는 방법을 알려주던 그 녀인이 와 보고 부러워하는 소리였다.
“돈을 벌자고 심은 게 아니우. 잡풀이 무성하니 그게 보기 싫어 심은 거지.”
나는 그녀에게 도라지를 심은 리유를 상세히 밝히지 않았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야산에 청신하게 피여있는 도라지꽃들을 흔히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이 도라지뿌리를 캐여 팔기 시작하자 도라지는 대대손손으로 살아오던 삶의 터전을 잃고 아예 농작물로 전락되여버렸다.
나는 실오리처럼 작고 가는 도라지모를 옮겨 심으면서 여러 면으로 타산해보기도 했다. 명년 봄에 도라지 뿌리를 캐여 구역내 꽃밭을 다루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 꽃밭마다 도라지꽃이 청신하게 피여나게 할 생각을.
가을에 도라지씨를 받아 두었다가 산행을 할 때마다 야산에 뿌려주거나 길가에 심어주어 도라지를 다시 야산에 돌려보내고픈 생각을.
겨울만 되면 기관지기침 때문에 고생하는 낚시친구 차령감에게도 다문 얼마라도 나누어주어 약으로 쓰게 하고픈 생각을…
이런 여러가지 타산들을 하며 심은 도라지는 내가 바라던 대로 건실하게 자라더니 드디여 포기마다 고운 꽃들이 피여 정원을 아름답게 장식해놓았다.
어머니가 그리울 때마다 어머니의 얼굴과 함께 눈앞에 떠오르던 도라지꽃, 손수 내 손으로 심고 가꾸니 하늘색 파란 꽃들이 더욱 순결하고 청신해보인다.
지금 내 눈에는 도라지꽃들이 처녀시절 어머니의 화신으로 보인다. 아니, 분명 그렇다고 믿고 있다!
처녀시절 어머니가 노래 <도라지꽃>을 부를 때면 듣는 사람 모두가 찬탄을 했다고 하니 그시절 어머니의 노래실력은 어떠했고 품은 꿈은 무엇이였을가.
아마도 나는 어머니의 유전자를 이어받아서인지 노래를 즐기고 악기 다루기를 즐기는 것 같다. 그래서 손수 가꾼 도라지꽃밭 속에 앉아 손풍금으로 <도라지꽃>을 연주하니 어머니의 모습이 더욱 새롭게 떠오른다. 아침이슬을 머금고 갓 피여난 도라지꽃은 소녀시절 어머니의 청신한 영상! 똑 마치 지금 어머니는 하늘나라에서 내가 연주하는 손풍금반주에 맞춰 <도라지꽃>을 부르고 있는 것 같다. 아니 분명 어머니의 노래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도라지 도라지 백도라지
심심산천에 백도라지
…
아, 어머니! 나는 도라지꽃밭 속에서 가슴을 움켜쥐고 애연한 어머니의 모습을 머리에 떠올리며 소리쳐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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