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의 매력 □ 김춘식

2023-07-07 09:33:22

오늘 병원에 가서 상처를 소독하고 오는 길에 마트에 들려 노트 한권을 샀다. 발 수술로 입원했다가 퇴원한 후에도 목발에 의해 겨우 걸음을 조금씩 옮기는 처지라 바깥출입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이다. 하여 부득불 매일 집안에 갇혀있는데 마침 독서하고 글을 쓸 수 있는 기회라 겸사로  매일 두세시간씩 시간을 들여 필사도 하고 있다.

우리의 옛시조를 에세이형식으로 풀이한 책의 필사는 지난주에 이미 마쳤다. 나는 현대시나 현대시조에는 별로 흥취가 없는 대신 고시조는 무척이나 즐겨 읊는다. 옛시조는 우리 민족의 삶과 그에 깃든 문화를 그리고 숨결을 함께 느낄 수 있는 문학이다. 옛시인들의 옛가락 절창 300수로 만나는 고전시가의 백미가 바로 이 책에 담겨있다. 이 시조들에는 배꽃이 흩날리는 모습이나, 기운 달이 서쪽 창에 비추는 정경이나, 추운 겨울밤을 한자리 베여내여 봄 이불 속에 감춰두고 님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마음의 여유를 보여주고 있으며 느긋한 마음으로 자연을 벗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애틋한 감정이 살아 숨 쉬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필사는 끝났으되 옛 시인들, 그 정조의 다채로움, 그 정한의 애절함, 그 여정의 잔운이 가슴에 깊이 남는다!

“리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 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多情)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이번 주부터는 청나라의 문장가 장조(张潮), 주석수(朱锡绶)의 소품산문선 《내가 사랑하는 삶》의 필사를 하고 있다. 이 책은 청나라 초기의 소품가 장조의 《유몽영(幽梦影)》과 청나라 말기 주석수의 《유몽속영(幽梦续影)》 전체 글을 우리 말로 옮기고 평설을 단 것이다. 《유몽영》과 《유몽속영》은 각각 219개와 86개의 항목으로 이루어져있어 분량은 많지 않지만, 거기에 담긴 내용과 풍격은 참으로 다채로운 정금미옥과도 같아서 구절구절이 페부를 찌르고 마음을 파고드는 감화력을 지니고 있다. 평범하게 지나치기 쉬운 일상 사물 속에서 인생의 의미를 포착해내는 두 문인의 시선은 재치로우면서도 촌철살인의 날카로움이 있다. 도처에 기취가 넘쳐흐르는 글들을 필사하다 보면 어느새 자기의 삶과 주변을 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생긴다. 그러니 내 어찌 필사를 게을리하겠는가.

나에게 있어서 필사는 한가지 즐거움이다. 신문과 책을 좋아하게 되고 꾸준히 읽게 되면서, 필사는 어느새 습관으로 자리잡았다 글을 읽을 때 좋아하는 어휘와 구절, 문장은 잊어질세라 베껴놓으며 틈틈이 여기저기에 실려있는 시, 에세이, 칼럼 그리고 어디에선가 주어온 브로셔의 글들을 베껴 쓰는 것을 습관처럼 해왔다. 그리고 자기가 끌리는 책이 있으면 큰 품을 들여서라도 통째로 필사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것이 시집이나 에세이라도 좋고 한 분야의 비문학, 논픽션이라도 좋았다. 물론 두터운 분량의 책에서는 내가 판단하기로도 너무나 좋은 글들이고, 남들한테도 언젠가 한번쯤은 꼭 보여주고 싶은 욕심마저 드는, 그런 문장들만 고르고 골라서 베낀다. 하지만 그 량도 결코 적지는 않다. 내가 처음 통째로 필사한 책은 부대에 있을 때 전우에게서 빌린 《모택동시사선집》과 《당시 삼백수》다. 지난 세기 70년대여서 별로 달리 볼 책도 없는 데다 일상적으로 하는 훈련과 학습 등을 빼고는 여유시간이 충족한지라 시간 땜 삼아 재미 삼아 책을 통째로 필사한 것이였는데 거기서 필사의 매력을 느끼고부터는 필사에 혹해버렸다. 지금까지 내가 필사로 꽉 채운 노트가 수십권 되는데 그중 책을 거의 통째로 필사한 노트도 10여권에 달한다.

베껴 쓴다는 것은 문자가 만들어내는 열락을 고스란히 경험하는 일이다. 그 열락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맛을 음미하는 일이다. 글을 읽다 보면 읽을수록 힘이 솟거나 감동을 주는 문장을 만나게 된다. 마치 지금까지 눈을 감고 살기라도 했던 것처럼, 갑자기 눈이 확 트이는 문장이 있다. 나는 이런 말이나 문장을 수시로 노트에 옮겨 적는다. 나는 필사할수록 점점 더 필사의 매력에 빠져서 이제는 필사를 하지 않으면 독서가 되지 않을 정도다. 그래서 책을 펼치고 베껴 쓰고 싶은 구절을 내 마음대로 내 방식 대로 노트에 써내려간다. 자투리 시간을 보낼 때도 필사는 더할 나위 없다. 빨리 쓸 필요도 없다. 아주 천천히 문장을 곱씹으며 쓰는 동안 누리는 즐거움은 한정이 없다.

나는 책을 읽는 동안에 책에 단 얼마라도 밑줄을 긋고, 노트에 뭐라도 좀 끄적거려야 마음이 놓인다. 그래서 시시때때로 근사한 볼펜과 노트를 마련하는 걸 잊지 않는다. 나는 필사용으로 쓰는 필기구로 주로 활엽노트와 볼펜을 쓰는데 일년에 적어도 서너권의 노트와 십여자루의 볼펜을 필사에 소모한다. 하기에 전에 손세차장에서 일할 때는 차주인이 트렁크를 정리하면서 버리는 노트(그중에는 겨우 첫 몇장만 적은 노트가 많았다)를 부지런히 챙겨 모았으며, 세탁공장에서 일할 때는 세탁에 앞서 의사가운이나 간호사가운 호주머니에서 털어낸 볼펜을 한자루라도 버릴세라 모아두기도 했다. 그때 내가 챙겨모았던 노트는 수십권이나 되며 볼펜은 수백자루에 달한다. 그때 모아두었던 볼펜을 나는 여직 쓰고 있는데 아직도 수십자루가 남아있다. 나는 지금도 신문사나 출판사, 혹은 문인협회들에서 마련한 이런저런 모임에 자주 나가는데 번마다 주최측에서는 이러저러한 기념품을 준다. 그때마다 나는 다른 기념품은 몰라도 서적, 노트나 볼펜 등 기념품만은 꼭 챙겨온다.

내가 글을 가장 많이 필사한 때는 연수조선족중학교에서 근무하던 지난 세기 90년대였다. 그때 에세이문학에 매료된 나는 그 선집들을 한권도 빠짐없이 모조리 읽었을 뿐만 아니라 그중 수백편의 에세이를 골라 필사하였다. 휴일이나 방학기간에는 그야말로 침식을 잊어가며 필사하였다.

나에게 있어 필사의 궁극적인 목적은 남의 글을 베껴 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글을 쓰기 위한 것이다. 독서를 꾸준히 하는 것도 좋지만 필사를 꾸준히 하는 것은 독서를 넘어 글 쓰기를 하도록 하기 때문에 그 의미가 훨씬 더 깊다. 나는 좋아하는 책이나 작가의 글을 장인이 한땀한땀 가방을 꿰매듯이 따라 적으며 작가의 생각과 감정을 대신하여 체험하고 령혼의 힘으로 작가의 능력을 빨아들인다. 나는 글쓰기에서 독서필기의 도움을 많이 받는다. 이즈음 글을 쓸 때면 그때그때 여기저기서 자료를 따로 찾느라 분주히 서둘 필요가 없이 전에 필기해두었던 관련 어구들이 곧잘 머리에 툭툭 살아난다. 어떤 것은 수시로 머리에 떠오르고 어떤 것은 노트를 펼치면 즉시 찾을 수 있다. 나의 글들중 노트 속에서 뽑은 글들의 인용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그로 하여 글들이 보다 생동하고 설득력을 가지게 되였다. 즉 내가 쓴 수필이나 칼럼 가운데 허다한 인용구는 바로 필사본에서 옮겨온 것이다. 례하면 수필 <세월의 흐름과 함께하는 력서>, <립춘을 맞으며>, 칼럼 <미쳐야 미친다> 등 글은 모두 필사노트에서 자료를 인용한 것이다. 나는 필사를 통해 실력을 키웠다.

시간이 흐를수록 서서히 드리우는 땅거미처럼 기억력이 어두워져가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사실이다. 돌아서면 반은 잊어버리고 다시 고개를 돌리면 남은 절반의 반을 까먹고 하루밤 자고 나면 무엇을 했는지조차 희미한 박약한 기억력을 나는 필사로 보완한다. 망각의 법칙이 우리에게 알려주다시피 새 지식을 접수한 후 짧은 시간내에는 누구나 그것을 기억할 수 있지만 시간이 좀 지나면 거의 다 잊게 되는바 필사는 바로 이런 결점을 미봉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그러니 필사의 즐거움은 또한 ‘기억의 연장’에 있다. 열번 읽기보다 한번 베끼는 것이 낫다는 말이 있다. 필사를 하려면 눈으로 보고 머리로 사고하고 입으로 읽고 손으로 베끼는 네개 과정을 거치는바 한번 읽고 지나는 것보다 머리에 남는 것이 퍽 많다. 한번 대충 읽을 것도 철자 하나, 어휘 하나, 토 하나 틀릴세라 신경을 도사리며 베끼다 보면 머리에 더 완연히 남는다.

책을 아무리 읽어도 필기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독서와 함께 세세하게 필기하는 습관을 버리지 않는다. 보고 들은 것에 그치지 않고 손으로 쓰면 기억은 오래간다. 책은 손이 기억한다. 필사를 하면 기억력이 좋아진다. 필사하는 동안 머리가 아니라 손이 기억하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어 기억력이 날로 못해가는 요즘 나는 그래도 부지런히 필사를 하는 덕분에 많은 것을 머리에 남길 수 있었다. 둔필승총(둔한 붓이 총명한 머리를 이긴다), 적자생존은 괜한 말이 아니다.

세상을 바꾼 창조는 모방에서 시작되였다. 적극적으로 베끼는 행위야말로 창조를 위한 거름이다. 고금중외를 돌아보면 성취 있는 학자나 작가는 거의 모두가 베껴 쓰기의 대가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필사를 통해 글 실력을 키웠다고 솔직하게 말한바 있으며,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지금 당장 필사하라.”며 필사가 얼마나 중요한지 한마디로 표현했다.

책을 읽다 보면 ‘어, 이 말 참 좋은데!’ 하는 글을 자주 만나게 된다. 그럴 때면 ‘이 말은 꼭 써먹어야지.’하고 결심한다. 또 그런 말들에서 힌트를 얻어 자기의 생각을 정리하는 법도 터득하게 된다. 나는 때로 에세이를 쓰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지만 어디서부터, 무얼 써야 할지 막막하기만 할 때는 노트에 필사한 소설이나 시, 에세이에서 령감을 얻는다. 때론 필사를 하며 옮겨쓴 문장에서 비롯된 나의 생각과 경험을 풀어쓰는데 그게 바로 또한 에세이가 된다.

‘필사적으로 필사하면 필승한다.’는 말도 있거니와 ‘필사적으로 필사하면 필생(必生)한다.’는 말도 있다. 모방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천재는 없다. 그래서 책을 베끼고 베끼고 또 베낀다. 명작을 필사하면 천재들의 령혼과 사고방식이 내 것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필사 덕분에 작가의 길에 들어섰고 필사는 나의 필력을 더욱 향상시키고 세상을 보는 통찰력도 키워주었다.

이 몇해 나는 수백편의 수필과 칼럼을 발표하였고 ‘송화강수필문학상’을 비롯하여 10여차례의 문학상을 받기도 했는데 이 모든 성취에는 필사의 영향이 크다. 그러니 내 어찌 필사를 열애하지 않을 수 있으랴.

필사는 엉덩이의 힘으로 쓰는 것이다. 엉덩이가 무거울수록 필사 시간이 늘어나고 진득한 독서습관이 된다. 글은 엉덩이로 쓴다라는 격언처럼, 작가에게 끈기는 매우 중요하다. 집중력을 발휘해 오래 앉아 많이 써야 좋은 글을 쓸 수 있다. 나는 아무리 피곤해도 매일 저녁 한번씩은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에서 혹시 좋은 수필이나 칼럼이 있는지 훑어본다. 그러다 좋은 글을 만나면 그것을 잃을세라 즉시 다운로드 해놓았다가 시간을 내여 노트에 필사한다.

나는 여전히 앞으로도 ‘필사의 욕망’을 좀체로 버리지 못할 듯하다. 필사는 내가 죽을 때까지 갖고 가는 습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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